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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제주 아트 로드 ②] 그와 걸었던 모든 길이 예술이었네, 작가의 산책길 B코스
[제주 아트 로드 ②] 그와 걸었던 모든 길이 예술이었네, 작가의 산책길 B코스
  • 정은주 여행작가
  • 승인 2024.04.12 16: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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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시지 화백의 흔적을 볼 수 있는 작가의 산책길 B코스를 마저 걷는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변시지 화백의 흔적을 볼 수 있는 작가의 산책길 B코스를 마저 걷는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여행스케치=서귀포] 따스한 봄날, 내내 아껴 두었던 작가의 산책길을 마저 걸었다. 연둣빛 새순이 돋아나기 시작한 오솔길에는 아지랑이처럼 예술의 향기가 피어오르고 숨어 있던 이야기들이 튀어나와 귓가에 재잘재잘 속삭여댔다. 변시지 화백이 평생 마음에 품었던 고향 서귀포에도 새 봄이 시작되고 있었다.

작가의 산책길 A코스에 이어 걷는 B코스는 폭풍의 화가로 유명한 우성 변시지 화백의 흔적을 찾아가는 길이다. 기당미술관과 곳곳에 설치된 작품들을 관람하고 숲과 바다에 젖어드는 힐링 테마로 A코스와 마찬가지로 종합안내소에서 출발해 원점 회귀하게 된다. 안내소에서 운영하는 해설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약 2시간 30분 소요되며 작품을 감상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작가의 산책길 출발점과 도착점인 종합안내소.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작가의 산책길 출발점과 도착점인 종합안내소.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해설사와 동행하면 작품 감상에 큰 도움이 된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해설사와 동행하면 작품 감상에 큰 도움이 된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깊이 들여다보면 더욱 아름답다
종합안내소에 도착하니 해설사 두 분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지난 A코스는 셀프 투어로 다녀왔지만 이번 B코스는 일부러 해설 시간에 맞춰 방문했다. 작가의 산책길에 관한 좀 더 깊고 풍부한 이야기들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작가의 산책길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듣고 난 후 곧바로 산책길에 나섰다.

이 길에는 2013년 마을 미술 프로젝트 사업으로 설치된 공공 미술작품들이 20여 개가 있습니다. 여기 이 돌담이 그중 하나인데요, 자세히 보면 일반 돌담하고는 다르게 빈틈이 없죠. 원래는 바람이 통하도록 성글게 쌓아야 하거든요. 제주와 서귀포를 상징하는 예술 작품으로 보시면 됩니다.”

한라산 고사목을 활용해 제주 조랑말을 형상화 한 이승수 작가의 '영원한 생명'.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한라산 고사목을 활용해 제주 조랑말을 형상화 한 이승수 작가의 '영원한 생명'.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공원처럼 잘 가꿔진 숲길을 따라간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공원처럼 잘 가꿔진 숲길을 따라간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작가가 만들었다고 하지만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돌담은 주변 풍경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었다. 이러한 설명이 없었다면 별의미 없이 지나쳤을 터이다. 돌담이 이어진 샛기정 공원은 천지연 폭포를 거슬러 가는 길이다. 공원 아래쪽에 있던 울창한 숲 속 오솔길은 과거에 주민들이 물을 길어 다니던 곳이었는데 마침 그와 관련한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이광진 작가의 <샛기정, 구름으로 살다>였다. 구름에서 비가 내려 물허벅에 담기는 것을 표현한 설치 작품으로 수많은 여인들이 물허벅을 지고 오고 갔을 시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비록 지금은 사라져 버린 옛 시간이지만.

사실 사라져 버린 건 따로 있다. 샛기정 공원 터는 과거에 호텔이 있던 자리였다.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었다면 아마도 서귀포 최고의 전망을 자랑했을 터다. 무성한 수풀 너머로 서귀포 앞바다가 훤하게 보일 테니 말이다. 과거의 영광을 엿보게 하는 건 정민호 작가의 <물의 축제>이다. 건물은 모두 허물어졌지만 앞마당에 있던 인공폭포는 그대로 남아 작품을 위한 캔버스가 되었다. 수직적인 관계로만 여겨지던 어른과 어린이가 허물없이 비눗방울 놀이를 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바로 이 같은 소통이 아닐까.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하는 작품이다.

물이 쏟아져 나오던 분수터에 비눗방울이 퍼져가는 모습을 표현했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물이 쏟아져 나오던 분수터에 비눗방울이 퍼져가는 모습을 표현했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제주색이 물씬한 이승택 작가의 '제주 돌담'.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제주색이 물씬한 이승택 작가의 '제주 돌담'.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INFO 작가의 산책길 종합안내소
주소 제주 서귀포시 중앙로4번길 13
시간 10:00~17:00
문의 064-732-1963(지역주민협의회)
* 매주 화, , , 일요일마다 해설사 탐방 프로그램이 진행되며 오후 1시에 종합안내소에서 출발한다.

황톳빛과 먹색, 폭풍 전야의 제주
발길이 어느새 기당미술관에 닿았다. 변시지 화백의 작품을 상설 전시하는 곳이다. 미술관에선 또 다른 해설사가 도슨트 역할을 맡아주었다. 나선형 통로를 따라가다 온통 황톳빛 투성이인 그림들 앞에서 멈추더니 이 작품들이 바로 변시지 화백이 독창적인 기법으로 그린 제주화입니다.”라며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해주었다.

변시지 화백은 1926년 서귀포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적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마음 한 구석에 늘 간직하고 있었다. 일찍이 미술에 재능을 보였는데 일본 최고 권위의 미술전 광풍회전에서 최연소인 23세 나이에 수상하면서 화가로 명성을 얻었다. 이후 서울대의 초청으로 1957년 영구 귀국했으며 서귀포로 귀향해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을 때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에게 그림은 운명이자 삶 그 자체였던 것이다.

변시지 화백의 작품을 상설 전시한 기당미술관.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변시지 화백의 작품을 상설 전시한 기당미술관.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기당미술관에서 바라보이는 한라산 풍경도 예술이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기당미술관에서 바라보이는 한라산 풍경도 예술이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마음에 품고 있던 자신과 고향의 이미지를 그림에 투영하기 시작한 것도 고향에 돌아온 때부터였다. 전과는 완전히 다른, 황톳빛과 먹색만으로 표현한 그림을 두고 사람들은 제주화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그를 폭풍의 화가라 불렀다. 독창적인 그의 그림을 먼저 알아본 건 미국 스미소니언박물관이었다. 동양인 최초로 그의 작품 2점이 박물관에 2007년부터 10년간 상설 전시되었다.

황톳빛과 먹색의 조화가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황톳빛과 먹색의 조화가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변시지 화백의 그림은 예전부터 보아왔지만 해설사의 설명이 더해지니 또 다르게 느껴졌다. 폭풍 전야와도 같은 기이한 적막감이 감도는 바다, 그 한 구석엔 전에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작은 배가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던 화가의 마음이 여기에 깃들어 있었구나. 아는 만큼 보인다고 전보다 더욱 깊은 감동이 몰려왔다. 2013년 별세한 그는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그림 속에는 모든 것이 짝이 없다고 했는데 그림을 보는 이와 그림 속 피사체가 서로 생각을 나누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고 한다. 그 마음이 와 닿은 걸까. 사람도, 말도, 까마귀도 모두 홀로였지만 단지 고독할 뿐, 외롭지 않게 느껴졌다.

잠시 쉬어가는 공간. 작품이지만 앉아도 된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잠시 쉬어가는 공간. 작품이지만 앉아도 된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하늘로 비상하는 느낌을 주는 작품.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하늘로 비상하는 느낌을 주는 작품.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모든 것이 예술이 되는 시간
변시지 화백도 종종 나섰을 산책길, 칠십리 시 공원에서도 영감이 넘치는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공원이 조성되기 전에는 수풀이 무성해 우범지대로 여겨졌다는데 여기에 시가 더해지고 예술이 덧입혀져 지금 같은 근사한 공간이 되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전종철 작가의 <경계선 사이에서>이다. 연못 가운데 거울 문을 세워 놓았는데 가까이 가면 저절로 열리면서 문 밖의 세계가 드러난다. 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안팎을 사색하게 만드는 이색적인 작품이다. 징검다리를 건너면 거울 문이 나와 걸어온 길을 비춘다. 이내 스르르 열린 문 사이로 또 다른 징검다리가 보인다. 저 길은 어떤 세계로 나를 이어줄까. 징검다리로 걸음을 내딛자마자 망설일 틈도 없이 문이 다시 굳게 닫혀버렸다.

징검다리를 건너면 거울 문이 스르르 열리며 또 다른 길이 나타난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징검다리를 건너면 거울 문이 스르르 열리며 또 다른 길이 나타난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칠십리 시 공원 전망대에서 작품처럼 걸린 서귀포항의 풍경.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칠십리 시 공원 전망대에서 작품처럼 걸린 서귀포항의 풍경.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작가의 산책길에서 볼 수 있는 작품들은 모두 만져보거나 마음껏 사진을 찍으셔도 된답니다. 여기 이 의자도 작품인데요, 쉬어도 갈 겸 한 번 앉아보세요.”

숲과 바다, 감귤 등 제주의 색에서 모티브를 따온 돌 의자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고개를 젖히고 멀리 바라보니 파란 하늘에 한라산이 담겼다. 사람과 자연이 함께 빚어낸 합작품이 그곳에 있었다. 내려오는 길에 바라보이던, 섶섬을 어깨 너머에 걸친 서귀포항도, 새섬에 걸쳐진 새연교도 모두가 작품이었다. 변시지 화백이 걸었을 그 모든 길이, 그 길에서 만났던 모든 것들이 예술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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