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김제] 호남에 경치가 빼어난 절경이 네 곳 있으니 호남 사경이라 한다. 금산사의 봄, 변산반도의 여름, 내장산의 단풍, 백양사의 설경. 모악산 줄기들이 빙글빙글 병풍처럼 빙 둘러 싸안은 분지, 금산사에 가을이 떨어진다.
정상의 ‘쉰길 바위’가 아이를 품은 어머니의 형상 같아 모악산이라 했다든가. 금산사는 모악산 뱃속 깊은 곳에 있다. 계곡을 끼고 들어가는 길이 길다. 지금이야 차로 달려간다지만 그 옛날 견훤이 아들 신검에게 잡혀 끌려 갈 때라면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길이 아니었을까?
견훤은 넷째 아들 금검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다 장남 신검의 모반에 의해 이 곳 금산사에 유폐된다. 기록에 의하면 미륵전 밑에 3개월이나 갇혀 있다가 간신히 탈출하여 왕건을 찾아 갔다고 한다. 금산사 한가운데 서면 하늘이 보인다. 병풍처럼 두른 모악산이 하늘을 또렷하게 도려냈다.
그 한가운데 국보 제 62호 미륵전이 우뚝 서있다. 겉에서 보면 3층이지만 안은 하나로 통해 있다. 그 안에 높이 11.82m 미륵불이 안치되어있다. 밖에서 보면 다리부분만 보일 정도로 거대한 미륵불상이다. 미륵불은 앞으로 올 부처이다.
인도 브라만 집안에서 태어나 석가모니불의 교화를 받았으며 도솔천에 올라가 하늘에서 설법을 하고 있는데 약 57억년 후에 다시 사바세계에 현신하여 모든 중생을 교화한다고 한다. 현신하여 성불하기 전까지는 미륵보살로 불리고 성불 후에야 비로소 미륵불로 불리게 된다.
금산사 대적광전은 좀 특이하다. 원래 대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곳이다. 대개 화엄종사찰에서 주불전으로 삼는다. 금산사에서는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해서 노사나불,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불을 한꺼번에 안치했다.
편액의 글씨는 악필법을 창안한 석전 황욱의 작품. 손바닥으로 붓을 감고 엄지손가락으로 윗부분을 눌러쓴 글씨다. 금산사의 기원은 서기 599년 백제 법왕으로 올라간다. 이후 통일신라시대 진표 율사가 중건을 하면서 규모가 커졌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의승 뇌묵 대사가 인솔한 일천승병의 거점이기도 했다.
정유재란 때 불에 탔으나 인조 13년 중건을 하였으며 1961년 송월주 스님이 불사를 마무리하여 현재에 이른다. 진표 율사는 모악산 밑 완산 지방의 사냥꾼 아들이었는데 하루는 짐승을 쫓다가 연못에서 쉬게 됐다. 연못에 개구리들이 많이 있었는데 버드나무 가지에 한 30마리쯤 꿰어 물속에 담아 두었다.
나중에 가져가려 했는데 짐승을 쫓다 다른 길로 내려가는 바람에 깜빡 잊고 만다. 이듬해 봄, 산을 오르던 그는 연못에서 버드나무 가지에 꿰인 개구리들을 보았는데 그때까지 살아서 울고 있었다고 한다. 이 때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개구리들을 풀어주고 그 길로 금산사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출가했다고 전한다.
그 후 부안 영산사에서 미륵보살로부터 점찰경 2권과 189간자를 받았고, 금산사에 돌아와 서기 766년 미륵전을 크게 중건하였다고 한다. 미륵전을 빙 두른 벽화에는 진표 율사가 미륵보살에게 간자를 받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는 데 그림이 오래되어 알아보기가 어렵다.
금산사는 한바퀴 둘러보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린다. 미륵전과 대적광전을 비롯한 18전각은 물론 보물로 지정된 육각다층석탑과 오층석탑, 팔각석등, 노주 등 돌아볼 곳이 많다. 대적광전 앞마당 소나무는 세월의 흐름 속에 이제는 지팡이(?)에 의지하여 서 있다. 미륵불이 현신할 57억년은 도대체 무슨 세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