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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역사기행] 백제의 눈물이 맺혀있는 황산벌, 그 역사 현장 속으로
[역사기행] 백제의 눈물이 맺혀있는 황산벌, 그 역사 현장 속으로
  • 여행스케치
  • 승인 2003.12.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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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황산성을 올라가는 길목에서 바라본 황산벌. 넓은 벌판을 산이 겹겹이 두르고 있다. 2003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황산성을 올라가는 길목에서 바라본 황산벌. 넓은 벌판을 산이 겹겹이 두르고 있다. 2003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여행스케치=논산] 요즘 인터넷에 난리가 났다. 영화 ‘황산벌’ 때문이다. 역사를 뒤집은 반역사적인 영화라느니, 어떻게 충청도 지방의 백제인이 전라도 사투리를 쓰냐는 둥 말도 많고 탈도 많다. 그래서 호기심에 그 역사를 따라가 보니 황산벌 전투의 실제무대는 ‘충남 논산’에 펼쳐져 있었다.

백제 의자왕 20년(서기 660년), 당의 지원을 받은 신라 김유신 장군과 5만 군대가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쳐들어오자 백제에서는 계백장군이 이끄는 5천 군사가 ‘황산’으로 나가 신라군과 맞섰다. 계백 장군의 군대는 먼저 험준한 산성 세 곳에 3영을 설치해 3도에서 쳐들어오는 김유신의 군사를 막았는데, 네 번 전투에 네 번을 모두 이겼다.

계속되는 연패에 신라군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자 신라 우장군인 흠춘이 아들 반굴을 불러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이 제일이요,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가 제일이다. 위태로움을 당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은 충과 효를 다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에 반굴은 그 길로 적진에 뛰어 들어 열심히 싸우다 죽었다.

황산성 올라가는 입구. 수풀이 무성해 뒷길로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확인하러 들렀다. 2003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황산성 올라가는 입구. 수풀이 무성해 뒷길로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확인하러 들렀다. 2003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한편, 신라 품일 장군의 아들 관창은 양편 군사가 대치하자 적진으로 달려가 수명을 죽이고  사로잡혀 계백장군의 앞으로 끌려갔다. 계백은 갑옷을 벗은 어린 관창의 나이와 용기에 감탄을 하며 “신라에는 기특한 선비가 이렇게 많구나. 하물며 소년이 저러할진데 장수는 어떻겠는가”하며 관창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관창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내가 아까 적군에 들어가 장수를 베고 기를 꺾지 못하여서 후회스럽다. 두 번째 들어가서는 반드시 성공하리라”하며 다시 들어가 싸우다 붙잡혔다. 이에 계백이 그의 목을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보냈는데 품일 장군이 그 머리를 쳐들고 소매로 피를 씻으며 “내 아이의 얼굴이 살아있는 것 같다. 나라일로 죽었으니 뉘우칠 것 없다”하였다.

계백장군이 잠들어 있는 묘. 몇 세기를 지나는 동안 그의 투구화 갑옷도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 찾을 길이 없다고 한다. 2003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계백장군이 잠들어 있는 묘. 몇 세기를 지나는 동안 그의 투구화 갑옷도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 찾을 길이 없다고 한다. 2003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이를 본 신라 군대가 힘을 얻어 나팔 소리와 함께 진격하여 백제의 5천 결사대와 죽음의 격전을 치렀다. 이미 4번의 싸움으로 지친 백제군은 10배나 되는 신라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백제군은 산상에서 밀려 황산벌로 내려섰고 그 처절한 결전장에서 계백장군은 그 5천 결사대와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나당 연합군은 그 후 사비성을 점령하고 백제는 31왕 678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상의 이야기들은 삼국사기에 유래한다.

우국충절의 모범, 계백의 흔적을 따라
이 황산벌은 넓은 의미로는 논산, 좁은 의미로는 현재 논산시 연산면 신앙리 일대를 의미한다. 전투가 일어났던 접전지인 신앙리 일대의 벌판과 함께 이에 얽힌 역사의 흔적은 논산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황산성 꼭대기에서 바라본 논산의 풍경. 2003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황산성 꼭대기에서 바라본 논산의 풍경. 2003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처자가 잡혀 노비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하여 친히 가족의 목을 베고 마지막 전투에 임한 계백. 그런 충의를 가진 계백장군이기에 많은 후손들이 그의 공덕을 칭송했었을 것이다. 현재 그의 묘소는 논산시 부적면 수락산 근처에 있다.

이제는 이 묘소가 계백장군 전적지가 되어 묘소 옆에 공원과 계백장군의 사당, 군사 박물관까지 지어지고 있는 형편이지만 계백장군의 묘가 확실하다는 증거는 없다.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전쟁이 끝난 후 김유신 장군이 계백장군의 시체를 찾도록 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한다.

다만 부근의 백제인들이 몰래 시신을 거둬 묘를 만들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구전으로 떠돌던 그의 묘가 조선시대 ‘선조대왕실록 권지’에 잠깐 등장하긴 하였으나 본격적으로 계백장군의 묘를 가꾸기 시작한 것은 부여 박물관장을 지낸 홍사준 선생의 덕이다.

1966년 그는 선조실록과 광해군 일기를 참고로 하여 계백장군 묘를 찾아 나섰는데, 황산벌 중심으로 답사를 하던 터 근처 노인들의 증언과 유해의 크기, 묘소의 위치 등을 보고 이 묘가 계백의 묘임을 확신하였다 한다. 결국 관곽까지 드러나 있던 묘소가 말끔하게 단장되어 이제는 해마다 계백장군 묘제를 지낼 정도다.

아직도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기는 하지만 묘를 잃어버렸을 때 모시는 단처럼 그런 의미로 계백장군의 묘를 바라봐야 할 것 같다. 깔끔하게 단장된 장군의 묘는 의연하게 돌아가신 장군을 떠올리게 하는 것 같아 절로 숙연해진다.

무관으로서는 드물게 계백장군이 주벽(사당에 모신 여러 위패 가운데서 으뜸 되는 위패)으로 모셔진 충곡서원도 묘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불과 계백장군 묘에서 2~3분 거리다.

계백장군을 모신 충곡서원이다. 무관으로는 드물게 주벽(사당에 모신 여러 위패 가운데서 으뜸 되는 위패)으로 모셔져 있다. 2003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계백장군을 모신 충곡서원이다. 무관으로는 드물게 주벽(사당에 모신 여러 위패 가운데서 으뜸 되는 위패)으로 모셔져 있다. 2003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이 서원은 1680년(숙종 6년)에 유림들에 의해 창건되었다. 우국충절보다는 이 곳이 그의 전사지와 가깝고 가장골에 있는 묘소와도 가까워 모셔진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한다. 사당에 들어가면 가장 가운데 신주에 ‘百濟將軍階伯先生(백제장군계백선생)’이라는 글귀가 써 있다.

흔적만 남아 더욱 처참한 유적들
이제는 기수를 돌려 연산면으로 향한다. 전투가 일어났던 바로 그 현장과 논산일대가 펼쳐져 보인다는 황산성을 둘러보러 가는 길이다. 연산면은 국도를 타고 논산에서 20 여 분 정도 벗어나야 한다.

황산벌의 최후 접전지 황산 일대. 이제는 넓은 평야와 간간히 보이는 민가만 조용히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첩첩이 산으로 둘러싸인 넓은 평지. 아마 그 안에 갇혔다면 독 안에 든 쥐가 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 그 산 너머로는 계백장군의 묘가 있다.

안내하시는 분이 신라군이 쳐들어왔을 길이라며 산 쪽으로 나있는 길로 이끈다. 험한 산세와 더불어 수풀이 우거진 골짜기 뒤로는 호남 고속도로가 나 있다. 황산성을 둘러보러 간다. 황산성을 지역민들은 청동리 산성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이유는 황산성이 청동리에 있기 때문이란다.

겨우 찾아낸 황산성의 흔적. 가시덤불이 무성하다. 2003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겨우 찾아낸 황산성의 흔적. 가시덤불이 무성하다. 2003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황산성은 전투가 있었을 당시 지휘본부였을 것이라 예상하는데 큰 도로에서도 3km쯤 임도를 따라 들어가야 한다. 차가 아닌 도보로 걸어서 간다면 2시간은 너끈히 걸릴 법 하다. 황산성은 훼손이 너무나 심한 상태였다. 올라가는 길조차 덤불에 휩싸여 굉장히 조심스럽다.

사람의 흔적이 없어 안내자에게 물었더니 예상대로 일반인들의 발길은 뜸하다 한다. 그나마 남아있는 산성의 흔적은 무너진 돌탑처럼 처참할 뿐이었다. 그 아쉬움을 뒤로하고 꼭대기를 향해 올랐다. 갑자기 입에서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백제의 장수들이 그 위에서 논산을 내려다보고 있었을 거라더니 불과 2백64m 산성 꼭대기에서 논산이 한 눈에 잡힌다. 계백장군이 이 곳에 서서 이렇게 백제를 지키고 있었나 보다. 둘레 8백70m, 높이 2m 였을 성곽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주춧돌만 남았다.

황산벌 전투는 전설이 아닌 지나간 역사다. 막상 여행을 하고 보니 그 역사를 다시 한번 일깨워준 ‘황산벌’이라는 영화가 고맙기까지 하다. 사람들의 무관심 때문에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유적들을 다시금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어서 말이다.

참고
논산황산벌전적지, 충남대학교백제연구소, 2000 夫赤 (내고장 으뜸 가꾸기 마을이야기 모음 제11집), 논산군, 1994

천연기념물 제265호 연산 화악리 오골계. 2003년 12월. 사진. 김정민 기자
천연기념물 제265호 연산 화악리 오골계. 2003년 12월. 사진. 김정민 기자

Tip. 천연기념물 제265호 연산 화악리 오골계
연산 화악리 오골계는 1980년 가금류로는 처음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오골계는 뼈가 까마귀처럼 검은 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깃털은 대부분 검은색이나 간혹 흰색 또는 얼룩무늬 옷을 입고 나오는 닭도 있다.

조선조 중병을 앓던 숙종 임금이 오골계를 먹고 건강을 회복한 후부터 지방특산품으로 임금님께 진상하였다 한다. 오골계를 먹으면 사람의 놀램이나 공포, 정신적 충격, 산부의 보익이나 대하증, 자궁출혈증에 효과가 있다.

오골계 황기탕 한상 차림. 2003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오골계 황기탕 한상차림. 2003년 12월. 사진 / 김정민 기자

설사나 이질 후에는 보양제가, 특히, 風, 冷, 떨리고 마비가 오는 증상, 신경통, 타박상, 골절상, 골통에 효과가 있다고 하며 간장, 신장의 혈분병에 좋고 어혈을 제거한다고 동의보감과 본초강목에 나와 있다. 오골계는 키우기가 까다로워 그 종족을 보존하기 어렵다고 하는데 현재는 천연기념물로서 지정 사육인만 사육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연산 화악리 오골계는 천연기념물을 간청하였던 이계진 씨의 후손들이 이어 받아 그 농장과 식당을 경영하고 있다. 오골계를 맛보려면 적어도 한 시간 전에는 예약을 해야 기다리지 않고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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