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속초] 마음에 드는 겨울바다 하나쯤 숨겨두고 사는 것도 행복일 것이다. 시인 이경실 씨는 동명항을 이렇게 노래했다. “통 큰 남정네 같은, / 동해, 동명항에 가면 / 웬만한 일엔 꿈쩍도 않을, / 오지랖 넓어 이 세상 다 품을 것 같은, / 커다란 바위 줄지어 있는데 / 가끔 우리 세상살이에 / 그만 진력이 날 때나 / 딱, 그만 살고 싶어질 때, / 동명항 큰 바위 뒤에 숨어들면/ 속 깊은 남정네 같은, / 그 바위 알고도 모른 척 / 눈 감아 준다할까?”
세상살이에 지친 사람들이 령을 넘어 항구로 스며들면 누구에게나 등대가 되어 줄 것 같은 동명항이다. 날마다 밝은 햇살을 바다에 수장시키고 시를 쓰는 동명항에도 복병은 있다. 지난 가을, 너울성 해일이 덮쳐 바닷가 횟집들이 날벼락을 맞았다. 속초 사람들은, 해일이 발생한 겨울에는 눈이 많이 온다는 속설을 믿고 산다. 게다가 10년에 한 번 내리는 폭설 주기와 맞아 떨어져, 관광객들 발길이 끊어질까 봐 걱정이다. 동명항 활어 난전 사람들 마음 속에는 벌써 겨울 한파가 들이 닥쳤다.
찬바람이 불어 닥치면 호빵의 계절이 아니라 양미리의 계절이다. 과메기의 고장이 구룡포라면 양미리의 고장은 속초 동명항이다. 부둣가 난전에서 연탄불에 구워먹는 양미리 맛은 또 다른 겨울여행이 된다. 바닷가 사람들은 이런 겨울 추억 하나쯤 지니고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반찬하려고 사다가 처마 밑에 달아놓은 양미리를 새끼줄에서 한 마리 두 마리 빼다가 구워 먹다보면 어느새 반찬거리는 오간 데 없고 어머니 얼굴이 달덩이처럼 부어 떠오르던 기억 말이다. 내게도 그런 추억이 있어서인지, 나는 겨울 간식으로 양미리가 최고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무뚝뚝한 사람이 한마디씩 던지는 말이 더 웃음을 자아내듯, 빼어난 맛도 그다지 거스르는 맛도 없는 ‘앵미리’는 밤을 새우면서도 끝날 줄 모르는 수다같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들과 ‘앵미리’ 부둣가 포장마차에 깃들어 세월을 낚는 것은 어떨까.
유난히 죽겠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던 지난 한 해였다. 몸도 마음도 얼어붙는 계절에 따뜻한 사람들과 불판을 끼고 둘러 앉아 양미리가 노릇하게 구워질 때까지 마음에 담아두었던 것들을 풀어 놓아도 좋을 듯하다.
나는 지난 주말 지인들과 함께 속초의 밤 바닷가를 거닐다가 부둣가 포장마차에 들러 양미리와 노가리 맛을 입에 달고 왔다. 양미리는 등에 뿌려둔 소금이 타닥타닥 타들어 가면 이야기 화제를 바꾸듯 뒤집어야 더 고소한 맛을 낸다.
서민적인 포장마차 분위기에 흠뻑 젖을 때쯤 첫사랑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재치 있는 매너다. 내 등 뒤에서 50대 아저씨 서너 명이 등산을 마치고 내려와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추억 속에 그녀 이야기로 흘러가는 듯하더니 한껏 오른 취기 때문이었을까. 익살스럽게 “있을 때 잘혀 그러니께 잘혀”를 합창하며 집에 두고 온 아내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역시 누구나 돌아갈 항구는 분명히 있다.
11월 20일부터 12월 20일까지 동명항 양미리 부두에서 축제가 열리고 있다. 양미리 젓갈과 김장 속배기로 넣는 노가리 명태 아가미도 판매하고 있다. 공연행사와 체험행사도 곁들이고 있어 항구의 하루해가 너무 짧을 듯하다. 바닷가에서는 바람이 시간의 무게를 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