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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이상재 박사의 차 여행 ④] 그 많던 진귤나무 어디로 갔을까? 제주도 귤차 여행
[이상재 박사의 차 여행 ④] 그 많던 진귤나무 어디로 갔을까? 제주도 귤차 여행
  • 이상재
  • 승인 2013.1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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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4년 1월 사진 / 이상재
2014년 1월 사진 / 이상재

[여행스케치=제주] 전 세계적으로 베리(Berry) 열풍에 이어 시트러스(Citrus)가 인기몰이 중이다. 오렌지, 레몬, 감귤, 유자, 라임 등 시트러스류는 새콤달콤한 과일로, 주스와 같은 다양한 음료로, 또 귤피, 오렌지필, 레몬필 등 약재나 허브로 사랑받고 있다. 특히나 스트레스가 많은 현대인에게 시트러스의 향은 그야말로 약이다. 

2014년 1월 사진 / 이상재
 제주도에선 민가마다 귤나무가 흔하다. 2014년 1월 사진 / 이상재

“한국인이 술을 좋아하는 첫 번째 원인은 아마 도시에서조차도 차를 사용하는 일이 거의 전무하다는 것과 사치스러운 청량음료들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인 듯하다. 아마도 식수로 쓰는 물이 훌륭해서 대부분 그냥 먹을 수 있는 탓일 것이다. 농부들은 식사 후에 뜨거운 숭늉을 마시며, 꿀물은 사치품으로 생각하고, 잔치 같은 경우에는 귤껍질이나 생강에서 우려낸 액체를 마신다. 귤껍질을 말리는 것은 한국 주부들의 큰 일 중의 하나이다. 모든 초가집 지붕에는 말린 귤껍질들이 고드름처럼 매달려 있다.”

영국인 여성 여행가 이사벨라 비숍이 1894년부터 1897년 사이 네 차례에 걸쳐서 한국을 답사하고 쓴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의 일부분이다. 한국 사람들이 술을 좋아하는 이유가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녹차를 거의 마시지 않기 때문이라면서 한국의 독특한 차를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에 귤껍질차가 등장한다. 귤껍질을 말리는 것이 한국 주부의 대단한 일(Quite a business)이라 하고, 귤껍질을 실에 꿰어 처마에 달아 놓은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가정에서 귤을 까먹고 껍질을 말려 차처럼 끓여서 마시는 습관이 이때에도 이미 유행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014년 1월 사진 / 이상재
귤의 종류에 대해 소개한 <동의보감> 페이지 . 2014년 1월 사진 / 이상재
2014년 1월 사진 / 이상재
어느 농가의 정원수 하귤. 2014년 1월 사진 / 이상재

<조선왕조실록>에도 귤에 대한 기록이 많다. 특히 귤로 만든 다양한 차가 등장한다. 강귤차, 삼귤차, 향귤차, 계귤차, 귤강차 등이 그것인데 주로 왕실의 질병치료와 건강관리의 목적으로 다양하게 활용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때의 귤과 지금의 귤이 같은 것일까? 당시에는 어떻게 귤차를 만들었을까? 궁금증을 가지고 제주도로 향했다. 제주를 찾은 날 마침 서귀포세계감귤박람회가 열리고 있었다. 제주도에 감귤박물관이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더불어 가기 전 사전조사를 해보니 비숍이 본 초가지붕에 매달린 귤껍질과 지금 우리 집 베란다에 널려있는 귤껍질이 다른 품종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1900년대 초부터 새로운 품종이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1960년대 이후 재배 면적의 증가와 함께 다양한 품종이 재배되면서 지금은 재래종 감귤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조선왕조실록>과 <동의보감>에 나오는 옛날 제주 귤은 어떤 모습일까? 

먼저 향한 곳은 제주에서 친환경 귤로 귤피를 만드는 곳을 찾았다. 귤피는 한방에서 특히 사용 빈도가 높은 약재 중 하나다. 예로부터 귤피는 오래될수록 좋다고 하여 ‘오래되다’, ‘묵다’의 의미를 가진 진(陳)자를 써서 진피(陳皮)라고도 부른다. 금방 말린 귤피는 싱그러운 귤 향이 나지만 3년 이상 묵힌 좋은 진피에선 싱그러운 향은 사라졌어도 한층 진하고 좋은 향이 난다. 가정에서도 말린 귤껍질이 오래되었다고 버릴 필요가 없다. 오히려 잘 말린 귤피를 종이봉투에 담아 바람 잘 통하는 곳에 보관하면 몇 년이 지나서 더 귀한 진피를 얻게 되는 것이다. 

2014년 1월 사진 / 이상재
 집에서도 쉽게 만들 수 있는 귤차. 2014년 1월 사진 / 이상재

제주도는 벌써 귤피를 만드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이곳에서는 귤 알맹이보다 귤껍질이 더 귀한 대접을 받는 듯하다. 무농약, 유기농 귤만을 수매하여 깨끗이 세척한 후, 동네 할머니들이 일일이 손으로 귤을 까고 계셨다. 제품의 질을 높이기 위해 귤 꼭지 부분을 일일이 도려내는 정성을 더한다. 한방 제약회사에 납품하고, 귤피차 재료로도 쓰이면서 수요가 늘고 있다고 했다. 

2014년 1월 사진 / 이상재
금귤과원의 진귤나무. 2014년 1월 사진 / 이상재
2014년 1월 사진 / 이상재
다양해진 제주의 시트러스. 2014년 1월 사진 / 이상재

이곳의 주인장이 운영하는 농장에는 귤만이 아니라 레몬도 자라고 있었다. 주인장 말로는 게으른 사람이 키우기에 적합한 것이 레몬이란다. 감귤은 키우는 정성에 따라 당도가 차이가 나 정성을 덜 들이면 제값을 받기 힘들단다. 그러나 레몬은 원래 시고 맛이 없으니 그냥 내버려 두면 알아서 열매를 맺고 12월이면 노랗게 익어준단다. 그야말로 자연 재배된 유기농 레몬이다. 꼭 이 집 레몬으로 차를 만들고 싶어 미리 주문을 해 두었다. 레몬을 직각으로 얇게 썰어 설탕이나 꿀에 재어 두면 새콤달콤한 레몬차가 된다. 레몬뿐 아니라 라임 재배를 시도하는 곳도 있단다. 제주의 시트러스가 더 다양해지고 있다.

2014년 1월 사진 / 이상재
 서귀포세계감귤박람회장. 2014년 1월 사진 / 이상재

 

옛날 제주 귤을 보기 위해 감귤박물관으로 향했다. ‘제주 향토 재래귤 보호수 사진전’이 열리고 있어서 제주의 오래된 재래 귤나무를 사진으로나마 구경할 수 있었다. 제주에는 100년이 넘은 재래 감귤나무가 12종 180여 그루가 있다고 한다. 재래귤이라고 하면 1911년 온주밀감이 들어오기 전에 제주에 있던 감귤을 말한다. 진귤, 병귤, 동정귤, 당유자, 빈귤, 사두감, 청귤, 감자, 지각, 편귤, 홍귤 등이 대표적이다. 박물관에서 제주 귤의 역사를 배우고 온실에서 재래 귤 실물을 볼 수가 있었다. 전시된 재래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귤피와 관한 여러 의문이 풀렸다. 

<동의보감>에는 귤피, 청귤피, 감자, 유자에 대한 효능이 기록되어 있고 제주도에서는 청귤, 유자, 감자 등이 난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태까지 청피가 귤이 노랗게 익기 전 푸른 귤껍질인 줄로만 알았더니 청귤이나 감자가 귤의 품종 이름이었던 것이다. 청귤의 껍질이 청피일 가능성이 높다.‘지각’은 당연히 중국에서만 나는 약재인줄 알았다. 제주도에 지각이라는 귤이 있을 줄이야. 그리고 옛날에는 주로 진귤(제주도에서는 산물이라고 해야 더 잘 안다)의 껍질을 진피로 사용하였다. 요즈음 우리가 가정에서 말리는 귤껍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향이 좋다. 요즘도 진귤의 껍질을 고집하는 한의원들이 있다. 효과 차이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진귤을 재배하는 곳이 줄면서 점점 구하기가 어렵고 가격은 무척 비싸다. 
그렇다면 제주도에서 재래귤이 외면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맛 때문이다. 단맛에 길들여진 현대인에게 재래귤의 신맛과 쓴맛은 받아들여지기 힘들어 보인다. 지금도 제주는 더 달달한 감귤을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다. 

현존하는 최고령 감귤나무는 제주시 애월읍 상가리에 있는 370년 된 진귤나무다. 지금도 귤이 열리고 있다. 이 나무 앞에서 묘한 상상을 해보았다. 1768년 7월 10일 영조는 궁 밖으로 나가 농민들의 농사를 살피고 돌아왔다. 일흔이 넘은 고령의 몸으로 더위에 무리를 한 탓인지 왕은 그날 앓아눕게 된다. 이때 의원에서 황급히 올린 것이 향귤차다. 향귤차를 마시고 새벽이 되어 안정을 찾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250년 전 이 진귤나무에 한창 귤이 열리고 있었을 터이니 어쩌면 그날 영조가 마신 향귤차에 이 나무의 귤이 쓰였을 수도 있지 않을까? 

뭉친 기운을 풀어주는 이기(理氣)작용은 스트레스 받아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고, 꽉 막혀 더부룩한 속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효과가 있다. 귤을 먹고 남은 껍질을 버리지 말고 깨끗이 씻어서 무채 썰 듯 썰어 잘 말리면 좋은 귤피차가 된다. 5조각 머그잔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으면 노랗게 우러날 것이다. 은은하게 퍼지는 귤 향과 차 맛을 음미하면서 즐기시기를. 지친 몸과 마음이 위로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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