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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슬로시티 & 리프레쉬 여행] 한 박자 천천히, 두 걸음 느리게 강원도 영월 슬로시티 김삿갓면 & 능말 생태환경의 숲
[슬로시티 & 리프레쉬 여행] 한 박자 천천히, 두 걸음 느리게 강원도 영월 슬로시티 김삿갓면 & 능말 생태환경의 숲
  • 전설 기자
  • 승인 2014.08.05 16: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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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4년 9월 사진 / 전설 기자
2014년 9월 사진 / 전설 기자

[여행스케치=영월] 시 한 수 읊으며 차 한 모금 마시고 세월아 네월아. 느림보를 흉보지 않는 마을과 걸음이 더디면 더딜수록 좋은 숲길을 걷는다. 터진 상처, 쓰린 속, 부디 내딛는 걸음만큼만 천천히 나아라. 까진 자리 딱정이 앉고 기어코 새살 오르듯 느리게 더디 낫거라.

강원도 영월에 단비가 내린 날. 찌뿌듯한 하늘빛에 입이 댓 발 나온다. 방랑시인 김삿갓의 자취를 되짚다 보면 절로 걸음이 느려진다는 슬로시티 김삿갓면을 둘러보고, 전나무가 빽빽한 능말 생태환경의 숲까지 단숨에 걸어 볼 계획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취재 당일날 비가 올게 무어람. 심보를 곱게 쓰려 해도 우산은 귀찮고 눅눅한 비옷도 영 짜증스럽다.


“영월이 왜 영월인지 알아요? 편안할 영(寧) 머물 월(越)자를 써서 편안히 머무는 고장이라는 뜻이지요.” 영월의 길잡이로 나선 김원식 시인이 속 타는 객을 위해 고향의 이름을 풀어준다. 말끝에 올해는 도통 비가 오질 않아 강도 계곡도 농부의 가슴도 쩍쩍 갈라졌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이기적인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뜨끔. 조금은 느슨해진 걸음으로 뒷짐 지고 걷는 시인을 따라 나선다. 서둘지 않았음에도 길 저편에 여정의 출발점이 보인다.

2014년 9월 사진 / 전설 기자
들꽃 따다 덖어서 만든 색색의 꽃차. 2014년 9월 사진 / 전설 기자

시 한 수에 차 한 모금
외씨버선 길 12코스 ‘김삿갓 문학길’은 난고 김삿갓문학관에서 출발해 김삿갓면사무소까지 이어진 총 12.3km의 걷기길이다. 여행길 내내 발걸음 늦춰 둘러볼 유적지와 박물관이 빼곡해 슬로시티에 어울리는 느림보 산책을 즐기기에 좋다. 마음과 달리 여태 도심의 ‘빨리빨리’ 시계에 맞춰진 몸의 긴장을 풀기 위해 엽서 한 장을 집어 든다. 김삿갓 문학관에는 엽서를 써서 우체통에 넣으면 1년 후 배달되는 느린 우체통이 있다. 미래의 나에게 무슨 말을 전할까, 고민하는 동안 체내시계가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한다. 이왕 늑장 부린 김에 문학관까지 둘러보기로 한다. “바람 치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대로 지나세.” 구름을 벗 삼아 전국을 유람한 김삿갓의 시 한 수를 따라 읊다가 대나무 숲에 드러누운 김삿갓 조각의 태평한 표정에 웃음이 터진다. 고삐 풀린 허파에 바람이 드나 보다.

2014년 9월 사진 / 전설 기자
 대지 위에 불쑥 얼굴을 내민 김삿갓 조형물. 갓 뒤에 ‘환갑잔치’ 시구가 적혀 있다. 2014년 9월 사진 / 전설 기자
2014년 9월 사진 / 전설 기자
 그림을 보면 한 번 재미있고, 뜻을 알면 두 번 재미있는 우리의 민화. 2014년 9월 사진 / 전설 기자

문학관에서 나와 맞은편의 김삿갓 묘소와 주거지를 둘러봤다면 2km 거리에 있는 조선민화박물관으로 향할 차례. 민화 한 장에 담긴 전래동화 수십 편을 전해 듣느라 느려진 발길은 김삿갓 계곡, 장군봉, 세종대왕 바위에 둘러싸인 묵산미술박물관에 한참을 묶여 있다가 호안다구박물관에 뿌리를 내린다. 시대와 나라를 초월한 다구를 둘러보는데도 한참이 걸렸는데, 먼 길 왔으니 숨 좀 돌리고가라며 차 한 잔을 내어주니 엉덩이가 더 무거워질밖에.

“옛 차인들은 찻물을 끓일 때도 보글보글 올라오는 방울이 물고기 눈 같다고 해서 어안(魚眼), 방울이 샘물처럼 솟는 것을 용천연주(龍泉連珠), 샘물이 이내 파도치듯 거세게 끓는 것을 등파고랑(騰波鼓浪)이라고 했지요. 물 끓는 과정 하나하나에 의미를 붙인 거예요. 마음의 여유가 있으면 세상 모든 일에 나만의 의미를 둘 수 있죠. 비가 와서 날은 궂지만 저기 나뭇가지 끝 좀 보세요. 물방울 알알이 맺힌 것이 꼭 구슬을 꿰어다 놓은 것 같지 않아요?”

2014년 9월 사진 / 전설 기자
호안다구박물관 마당의 몽골식 텐트 게르. 동그랗게 뚫린 천창으로 하늘이 보인다. 2014년 9월 사진 / 전설 기자

차영미 관장이 손가락 끝으로 창밖을 가리킨다. 그제야 뒤돌아 가랑비 내리는 풍경을 다시 들여다본다. 이 푸르고 싱싱한 풍경이 아침나절에는 왜 그리 짜증스럽게 보였던 것인지. “무수한 빗물, 연잎 위에 떨어져 또르르 진주알이 되었네.” 차 관장의 감상에 김 시인이 시 한 수를 척 읊는다. 시 한 수 곁들여 차 한 모금 들이켠다. 새가 물을 먹듯 천천히 천천히.

2014년 9월 사진 / 전설 기자
 숲 속에는 최소한의 시설만 설치해 눈에 거슬리는 데 없이 온통 초록빛이다. 2014년 9월 사진 / 전설 기자

숲이 낫고 사람도 낫는다
숲이 사람을 치유한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반대로 사람이 숲을 치유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영월의 수많은 숲 중 능말 생태환경의 숲이 특별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단종장릉 일대의 숲을 물이 모이는 골짜기라 그래서 물무리골이라고 불러요. 여기가 예전에는 아무것도 없는 밭이었어요. 군에서 식목일 같은 행사 때 묘목 분양을 위한 양묘장으로 활용하다가 나무를 심고 숲을 복원해서 6년에 걸쳐 두루두루 걷는 테마형 숲길로 복원하게 됐죠. 말하자면 사람의 손으로 살린 숲이에요. 이 나무 다 제가 심었다니까요?”

2014년 9월 사진 / 전설 기자
 습지 위로 뻗은 데크. 한밤 반딧불이 출몰 지역. 2014년 9월 사진 / 전설 기자

그간 얼마나 자주 숲을 오갔는지 영월군청 환경산림과 엄윤옥 씨가 눈 감고도 숲 이쪽에는 어떤 꽃이 피고 지는지 줄줄이 꾄다. 손바닥 보듯 숲을 들여다보는 조언대로 충의공기념관을 들머리 삼아 생태탐방로~건강의 숲~역사의 숲~환경의 숲 순으로 돌아보기로 했다. 물무리골의 생태탐방로는 물이 모이는 자리라는 이름 그대로 습지 위를 걷는 구간이다. 원시생태를 간직한 덕에 한밤에는 반딧불이도 볼 수 있다고. 눈 닿는 자리마다 호롱을 닮은 진퍼리잔대, 제비 꼬리처럼 생긴 큰제비고깔, ‘조선 바나나’라 불리는 으름덩굴 등 좀처럼 보기 힘든 멸종위기 야생화를 비롯해 덩굴식물과 수생식물이 앞다투어 피어 있다.

“어디 꽃뿐인가요. 고라니며 노루가 숲 사이를 폴짝폴짝 뛰어 다녀요. 얘네가 사람 무서운 줄을 몰라. 길에서 마주쳐도 빤히 쳐다보기만 하지 도망치지도 않는다니까요.”

일주일에 두어차례 여고시절 동무들과 능말 생태환경의 숲으로 산책한다는 유귀희 씨가 숲 속에서 야생동물과 마주쳐도 놀라지 말라고 귀띔한다. 뱀이 나오거든 소리치지 말고 발을 ‘쿵’ 굴리고 “어서 가!” 달래라는 조언을 곱씹으며 전나무가 빽빽한 건강의 숲으로 들어선다. 한여름에도 추운 바람이 불어 ‘한골’이라더니 전나무 그늘 아래가 퍽 사늘하다. 우드칩을 소복하게 깐 숲길을 걷고 있자니 또 늑장병이 도진다. 

2014년 9월 사진 / 전설 기자
 신계욱 숲해설가가 만든 배 한 척. 숲 탐방 시 사전에 예약하면 공예 체험도 즐길 수 있다. 2014년 9월 사진 / 전설 기자

“걸음을 멈추고 가까이 들여다보면 꽃 이름 하나도 그냥 붙인 게 없어요. 이건 ‘사위질빵’이라고 하는데 줄기가 약해서 조금만 힘을 줘도 툭 끊어져요. 장모가 무거운 지게를 지는 사위가 안타까워 금방 끊어지는 줄기로 질빵을 만들어 줬다고 하지요. 저건 ‘도둑놈의 갈고리’예요. 씨앗이 갈고리 모양으로 생겨서 스치기만 해도 바짓가랑이에 들러붙는데, 제대로 된 길로 다니지 못하고 엄한 곳을 다니는 도둑에게 잘 달라붙는다고 하죠. 아 그리고 저건…”

신계욱 숲 해설가가 한걸음 건너 한걸음마다 발치에 핀 무수히 많은 야생화의 이름과 유래를 알려준다.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서일까. 좀처럼 속도가 붙지 않는다. 발걸음은 차차 느려지고 시선은 발치의 들꽃에서 나무를 타고 오른 덩굴로, 덩굴 잎사귀 닿는 나뭇가지 끝으로, 그 너머 파랗게 갠 하늘로 향한다.

INFO.
슬로시티 김삿갓면

주소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김삿갓로 216-22 

능말 생태환경의 숲
주소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Tip. 김삿갓면 느린우체통
슬로시티 김삿갓면 내 김삿갓 문학관, 동굴생태 박물관, 조선민화 박물관, 묵산미술관, 아프리카 미술관에는 엽서를 써서 보내면 1년 후 배달되는 느린우체통이 설치돼 있다. 1년 뒤 나에게 가족과 친구에게 느린 엽서 한 장을 부쳐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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