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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감성 여행] 가을 속살에 취하다 경북 영주
[감성 여행] 가을 속살에 취하다 경북 영주
  • 전설 기자
  • 승인 2013.10.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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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3년 11월 사진 / 전설 기자
2013년 11월 사진 / 전설 기자

[여행스케치=영주] 경상북도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영주는 이웃이 많은 내륙 교통의 요지다. 동쪽으로는 봉화, 서쪽으로는 단양, 남쪽으로는 안동과 예천, 북쪽으로는 영월과 접경을 이룬다. 팔 벌려 닿지 않은 이웃이 없으니 오가는 이도 많아 수많은 유교 · 불교 문화재와 고건축물을 꽃피웠다. 그 시절 만개한 한국 최초의 유교 서원 소수서원과 천년 고찰 부석사는 영주를 대표하는 보물이 되었다. 뽐낼 곳, 자랑할 곳이야 많고 많지만 영주는 그 땅에서 나고 자란 선비의 기풍을 닮아 번잡하지 않고 호젓하다. 어린 유생들이 낭랑한 목청으로 충 · 효 · 예 · 학을 읊었던 소수서원의 발치에는 옛 선비들의 생활공간을 그대로 재현한 선비촌이 새로운 명소로 자리 잡았다. 장원급제와 금의환향의 부푼 꿈을 안고 한양으로 향하던 죽령옛길을 포함한 소백산 12자락길은 울긋불긋 머릿물을 들이고 가을 단장에 한창이다. 가만가만 옛 멋을 따라가는 영주에서의 여정은 선현의 뒤를 좇는다.

2013년 11월 사진 / 전설 기자
가을비에 함빡 젖은 수도리 전통마을. 2013년 11월 사진 / 전설 기자

빗속에 핀 섬 수도리

영주의 첫 목적지는 수도리 전통마을이다. 여행의 운치를 더할 요량인지 가랑비가 좀처럼 그치지 않는다. 50여 채 고택의 푸른 기와가 빗물에 반들반들하다. 그중 16채는 100년 전 지어진 옛집이다.  마을이 통째로 박물관인 셈이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하회마을과 달리 밖으로 알려지지 않아 고즈넉한 옛 고을의 멋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수도리 전통마을은 다른 이름으로 ‘무섬마을’이라고도 부른다. 물섬마을이 그 시작이었다는데 어느 틈엔가 ‘ㄹ’이 빠져 무섬이 됐단다. 무섬이든 수도리든. 빗속에 보니 왜 이름에 물(水)이 빠지지 않는지 알겠다. 내성천이 마을의 3면을 휘감는 물동이 마을은 빗속에 핀 연꽃 모양을 닮았다.

섬과 육지를 잇는 외나무다리가 물 위를 가로지른다. 멀리서 볼 땐 사람이 올라서면 뚝, 허리가 끊어지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 아슬아슬하더니, 막상 가까이에서 보니 불어난 강물에도 끄떡없다. 나무를 두 쪽으로 쪼개 구불구불 물 위로 세운 외나무다리는 불과 30년 전까지 마을과 밖을 이어준 유일한 통로였다. 꽃가마 탄 새색시, 황천길 떠나는 상여, 책보를 멘 아이 가릴 것 없이 마을에서 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다리로 물을 건넜다. 한 사람이 겨우 설 수 있는 외나무다리에서 마주 오는 이가 없는지 멀리 반대편을 내다보는 미덕을 깨친다.

2013년 11월 사진 / 전설 기자
경북 민속자료 제93호 만죽재고택. 2013년 11월 사진 / 전설 기자
2013년 11월 사진 / 전설 기자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여행객들. 2013년 11월 사진 / 전설 기자

흙담을 따라 마을에 들어선다. 50여 채 전통가옥이 지붕을 맞대고 오순도순 젖어 들어간다.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라는 만죽재고택은 경북 민속자료 제93호로 지정된 문화재다. 열린 대문 안으로 성큼 들어서니 경북 반가 가옥의 ‘ㅁ’자형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불씨 꺼진 아궁이, 물방울 똑똑 떨어지는 수도꼭지, 그 옆 세숫대야, 빗자루…. 손때 묻은 살림살이가 한가득이다. 살림집인지 문화재인지 분간을 못하다가 안방에서 들리는 TV 소리에 퍼뜩 놀라 “실례합니다” 인기척을 냈다. 김시해 할머님이 허락도 없이 집에 들어선 불청객을 살갑게 맞아주신다. 생활하기에 불편하진 않으신지 미련한 질문을 던진다.

“안 불편하긴. 사방팔방 눈에 보이는 게 죄다 불편하지. 그래도 어쩌겠노. 내 집이라고 살고는 있어도 이게 나라 문화재로 지정돼 있어서 함부로 손대면 붙들려간다. 생각 같아서는 진작에 다 뜯어고쳤지.” 역정을 내시는가 싶더니 이내 “여 마을에 있는 집은 불편하다고 고치고 할 것이 아이라. 이 모습 그대로 보존해서 자손만대에 물려줄 유산이지” 하신다.

할머님은 수십여 년 타지 생활을 마치고 옛집으로 돌아오셨다고. 사람의 온기를 타지 않은 빈집은 싸늘했지만 마른걸레질 몇 번에 생기를 되찾았다. 마을 안에는 12채의 빈집이 떠나간 주인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다. 그러는 사이 먼 곳에서 온 이방인을 손님으로 받기도 한다. 마을 방문에 앞서 전통한옥 체험을 신청하면 하룻밤 묵어가기가 수월하다. 

흙빛 시골 정경에 취해 마을 안을 휘젓고 돌아다닌다. “다 큰 처녀가 왜 비를 맞고 돌아댕기노. 이거나 무라.” 마을 어귀에서 만난 어르신이 바닥에 떨어진 대추 몇 알을 빗물에 훑어 쥐어주신다. 우산을 내려놓고 주인 없는 빈집 마루에 걸터앉았다. 귓가를 후드득 때리던 빗소리가 이내 잦아든다. 딴딴하게 익은 대추알이 잘 익은 사과처럼 아삭아삭하다. 땡볕에 땀 쏟았던 여름은 가고 어느덧 대추가 붉어지는 계절이다. 장석주 시인이 노래했듯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 있으랴. 저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가 참 달다.

2013년 11월 사진 / 전설 기자
소백산 12자락길 구름다리. 2013년 11월 사진 / 전설 기자

소백산 자락을 걷다
소백산자락길은 소백산을 한 바퀴 감아 도는 총 길이 143km(360리)에 이르는 대장정이다. 영주, 봉화, 단양, 영월군에 걸쳐 총 12자락으로 나뉘는데, 구간마다 꺼내놓는 풍경과 이야깃거리가 다르다. 올망졸망한 촌락을 지나기도 하고, 색색의 과수원길을 가로지르는가 하면, 국립공원 구간을 통과하기도 한다. 영주에서의 2번째 여정은 소백산자락길의 마지막 종점이자 단종과 금성대군의 한이 서린 12자락을 선택했다. 자작자작 넘는다던 자재기길을 생략하고 두레골~성재~점마~덕현~성혈사를 잇는 7km 시골길을 더듬어간다.

2013년 11월 사진 / 전설 기자
소백산에 삼켜지다. 2013년 11월 사진 / 전설 기자

어린 조카 단종을 보호하려다 형 수양대군의 손에 목숨을 잃은 금성대군. 그 넋을 기리는 신당이 붉은 단풍에 덮여가는 산자락에 서 있다. 매년 정월 보름이면 소백산의 산신령이 된 금성대군의 의로움을 기리는 두레골 서낭제가 이곳에서 열린다. 아담한 신당과 서낭당에 얽힌 이야기를 머릿속에 꼭꼭 담아본다. 산자락 아래 소담스럽게 자리한 장안사에서 이방인을 경계하는 사찰견 해탈이의 배웅을 받는다. 멍멍 개 짖는 소리를 뒤로하고 서편 고개를 넘어 점마로 향하는 동안은 사람 손을 타지 않은 원시 숲을 가로지른다. 가는 길목마다 꽃잎 보드라운 야생화가 소담스럽다. 아기자기한 풍광과 달리 경사가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한 구름다리를 제외하고는 인공적인 포장을 하지 않았다. 탄탄한 임도와 나무 데크에 익숙한 발이 천근만근 무겁다. 숨이 턱까지 따라붙고 몸이 기우뚱기우뚱 힘을 못 쓴다. 진 땅에 발이 쑥쑥 빠진다. 앞서가는 사람들이 나무와 나뭇가지가 엉켜 만든 숲 터널에 삼켜진다. 다행인 것은 체력이 방전되기 전 완만한 평지와 낙엽 더미 따위가 폭신하게 깔린 융단길이 차례로 나타나 피곤을 덜어준다는 것.

2013년 11월 사진 / 전설 기자
라디오 음악이 흐르는 사과 과수원.  2013년 11월 사진 / 전설 기자

어느덧 12자락의 마지막 구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잣나무 숲으로 들어선다. 깊게 숨을 들이 내쉬면 고장 난 것처럼 덜컹거리던 폐와 심장이 한결 편안해진다. 잣나무 숲을 지나 알알이 발갛게 익어가는 사과 과수원이 펼쳐진다. 사과 과수원의 새를 쫓기 위해 틀어둔 라디오에서 잔잔한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배경음악을 곁들여 소백산 자락의 끝자락에 선다.

소백산 12자락 코스에서는 제외돼 있지만 영주의 숨은 보석을 지척에 두고 지나칠 수는 없는 법. 덕고개에서 서쪽으로 1km쯤 떨어진 성혈사를 들러보기로 한다. 그 규모가 작고 휑뎅그렁해 보여 지나치기 쉽지만 성혈사의 품 안에는 보물이 들어 있다. 나한전 정면에 6개의 창호를 수놓은 정교한 문살 조각이다. 그 어여쁨이 어찌나 유별난지 이름까지 ‘꽃살문’이란다. 가운데 칸의 연지수금(蓮池水禽, 연꽃이 핀 연못의 물새) 꽃살문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솟을 모란 꽃살문, 왼쪽에 솟을 꽃살문이 장식돼 있다.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연지수금 꽃살문에는 연꽃, 새, 물고기, 게, 개구리가 좁은 창호에 오밀조밀 자리 잡고 있다. 창호 안에서 용은 죽은 자를 극락정토로 안내하고 연잎을 탄 동자가 노를 젓는다.

2013년 11월 사진 / 전설 기자
하늘과 맞닿은 천년 고찰 부석사에서. 2013년 11월 사진 / 전설 기자

천년 고찰의 청개구리
영주 여행의 백미는 천년 고찰 부석사다. 이른 아침 채비를 마치고 입구에 내려선다. 천왕문 너머 봉황산 중턱, 봉황의 알이 놓인 자리까지 이어지는 돌계단이 가파르다.

“범종루와 안양루를 지나 무량수전까지 이어지는 계단이 108개입니다. 사람의 번뇌와도 같은 숫자의 계단을 오르면 극락세계로 들 수 있다고 해요. 극락으로 가는 길이 버거운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극락으로 들어서는 마지막 관문인 안양루에서는 일출과 일몰 때 황금빛 부처님을 만날 수도 있다는 건 모르셨죠?”

두 눈만 껌뻑이다가 김외숙 문화관광해설사의 손끝을 따라가본다. 안양루 누각의 지붕을 받치고 있는 중도리와 상도리 사이 공간이 있다. 눈에 힘을 주고 한동안 바라보는데, 팔작지붕 밑 처마 끝에 나무 쪽을 맞춰놓은 틈으로 아침 햇빛이 내리쬐면서 어떤 형상이 그려진다. 정좌하고 있는 부처님의 형상이다. 포와 포 사이의 공간에 나타나는 불상의 형상이라 하여 공포불(貢包佛)이라 부른단다.


경내 풍경의 신비에 취기가 오른다. 일찍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의 아름다움에 취한 최순우 선생은 “무량수전의 기둥을 만지기 전에는 뒤를 돌아보지 마라”고 일렀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기둥 사이로 비스듬하게 배치된 무량수전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나는데 이때 극적인 공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배흘림기둥이 눈앞에 있는데 청개구리 심보가 발동된다. 참지 못하고 휙 뒤를 돌아본다. 아침 이슬에 젖은 부석사 경내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무량수전, 안양루, 조사당, 응향각이 엷은 안개 베일에 덮여 있다. 더 멀리에는 소백의 연봉들이 나란하고 그 위로 새로 솜을 틀어다 덮어놓은 듯 운해의 장관이 펼쳐진다. 다시 돌면 정면에 무량수전이 있다. 1300년 세월 동안 색이 바랜 단청빛이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은 자연의 빛과 닮아 있다. 금기를 어기고 뒤를 돌아본 까닭일까. 그 유명하다는 배흘림기둥이 뒤늦게 눈에 들어온다. 사람으로 치자면 배꼽에 이르는 중앙이 적당하게 불룩하다. 하늘을 받치고 서 있는 폼이 믿음직스럽다. 

부석사에 오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랬듯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오색으로 물든 산천의 머리꼭지를 바라본다. 도심에서는 언제 왔다가 언제 가는지 모르는 계절의 옷깃이 소백산 자락에 걸려 있다.


INFO. 
수도리 전통마을 
주소 경북 영주시 문수면 무섬로 234길 41

소백산 12자락길 
코스 좌석(시거리)→자작재→두레골(장안사)→점마→덕현→배점→배점주차장

부석사 
주소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

맛집 
약선당
주소 경북 영주시 봉현면 오현리 240-9

황토골 인삼불고기
주소 경북 영주시 풍기읍 동부리 4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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