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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문화유산 답사기] 정조 효행사찰 용주사와 김홍도 정조의 곁에 머물다 간 ‘바람의 화원’
[문화유산 답사기] 정조 효행사찰 용주사와 김홍도 정조의 곁에 머물다 간 ‘바람의 화원’
  • 손수원 기자
  • 승인 2008.12.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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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8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대웅전 아래 정조가 사도세자를 기리며 심은 회양목. 2008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여행스케치=화성] 얼마 전 드라마로 방영된 조선시대 두 화원의 이야기가 화제였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풍속화가인 김홍도와 신윤복이 바로 그들인데, 지난해 정조에 이어 가히 신드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경기도 화성의 용주사는 김홍도의 흔적과 그의 행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다. 

익히 알려진 대로 용주사는 1790년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세운 절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역할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도세자의 무덤인 융릉을 지키는 능사(陵寺)로서 지은 것이다. 

이러한 역사만 봐서는 과연 이 절이 화원인 김홍도와 무슨 관련이 있나 싶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김홍도와 정조는 임금과 신하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용주사에서도 김홍도의 흔적을 발견할 수가 있다. 

부녀자와 어린아이도 한 번 화권을 펼치면 모두 턱이 빠지게 웃으니 고금의 화가 중에 없던 일이다. 도화원에서 일컫던 진씨, 박씨, 변씨, 장씨는 거의 김홍도만 못하였다. 

2008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용주사 내에 있는 효행박물관. 2008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정조에게 김홍도는 또 다른 눈과 같았다. 정조는 김홍도의 풍속화를 즐겨 보며 바깥세상을 보았고, 1788년에는 금강산의 산수화를, 1789년에는 일본 지도를 그려오라 명하기도 했다. 이러한 연유로 한 학자는 세계 3대 초상화가로 불리는 일본의 도슈사이 사라쿠가 김홍도라는 가설을 내기도 했다. 

1794년 통신사 두절로 일본 내 사정이 궁금해진 정조가 당시 연풍현감이던 김홍도를 밀사로 일본에 파견했고, 그렇게 일본으로 간 김홍도가 사라쿠(寫樂 : 그림을 그림으로써 행복하다)란 별명으로 활동했다는 것인데, 이 역시 하나의 ‘설’일 뿐이다. 이에 대한 반론도 명확하므로 정조와 김홍도의 관계에 대한 ‘에피소드’ 정도라 여기면 되겠다. 

여하튼 이러한 일례에서 보듯 김홍도와 정조는 일생 동안 긴밀한 관계를 맺은 것은 사실이다. 일설에 의하면 정조는 ‘그림에  속하는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주관하게 했다’고 할 만큼 그를 총애했다. 이러한 연유로 정조가 세운 효행사찰인 용주사에도 김홍도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다.  

2008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삼세여래후불탱화가 있는 용주사 대웅전 전경. 2008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김홍도는 그림에 교묘한 자로 그 이름은 안 지 오래다. 30년 전 초상을 그렸는데 이로부터 무릇 회사에 속한 일은 모두 홍도로서 주장하게 하였다.”                   
-홍재전서(정조 24년)

용주사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건물은 효행박물관이다. 이곳엔 경내에 있는 유물들의 복사본 등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중에서 김홍도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은 대웅전에 걸려 있는 ‘삼세여래후불탱화’이고, 다른 하나는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이 그것이다. 물론 이것들이 김홍도의 작품이라는 것에는 의견이 분분하다. 

김홍도가 직접 그렸다는 설, 김홍도가 감독을 했다는 설, 김홍도와 관련이 없다는 설까지 아직도 정확하게 밝혀진 것 없이 단지 추측의 경중만 있을 뿐이다. 이 글에서는 다만 학계의 시시비비를 떠나 일반적으로 ‘김홍도의 흔적’이라 불리는 것들을 돌아보고자 함이니 객관적인 사실의 판단은 미뤄두기로 하자. 

2008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단원의 삽화가 실린 불설대보부모은중경 용주사 간 목판. 2008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대웅전으로 향한다. 덧칠을 하고 보수를 해 세월의 흔적을 덮어낸 겉모습과는 달리 대웅전의 안은 아직도 예전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역시나 ‘삼세여래후불탱화’이다. 

세로가 4m가 넘는 그림의 크기도 그렇거니와, 이제껏 보아오던 불화와는 확연히 다른 화풍으로 그려진 것이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그 ‘확연히 다른 화풍’이란 다름 아닌 서양풍의 음영법과 원근법이다. 

불화 안에는 제작 내역을 알려주는 내용이 없지만, 용주사에 전해 내려오는 ‘본사제반서화조작등제인방함(本寺諸般書畵造作等諸人芳啣)’에는 김홍도가 그렸다고 전해진다(최근 대웅보전 닫집에서 발견된 원문에는 민관(旻寬) 등 25인이 그렸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2008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음영법과 원근법을 사용해 그린 용주사 삼세여래후불탱화. 2008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용주사의 후불탱화를 그리기 몇 달 전 정조는 청나라로 가는 사신 일행에 김홍도를 별도직책까지 마련해 보냈다고 한다. 당시 청나라에는 천주교 신부들에 의해 서양문물이 대거 유입되고 화풍에서도 서양화법이 널리 퍼지고 있었다. 

정조는 용주사에 봉안하게 될 후불탱화를 최고의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김홍도를 미리 청나라에 보내서 서양화법을 익히게 한 것이었다. 이후 정조는 1790년 용주사의 일체의 조형예술 총감독까지 김홍도에게 맡긴다. 이렇게 그려진 용주사의 후불탱화는 평면의 이미지만 보이던 기존의 불화와는 달리 명암과 원근을 표현한 훈염기법(暈染技法)이 가미되어 입체감이 풍부하다. 

이 ‘용주사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김홍도는 불교에 깊이 몰입하게 되고, 정조의 신임을 얻은 김홍도는 1795년 중인 신분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 직책인 정6품 벼슬직인 연풍현감에 제수된다.

2008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용주사의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에 실린 김홍도의 삽화. 2008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2008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김홍도의 삽화를 사용해 만든 병풍. 2008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연풍현감 시절의 김홍도는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서 현청의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는 등 선정을 베풀지만, 불교에 깊이 빠져버린 나머지 현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이때 김홍도의 화풍에는 일대 변화가 나타나기도 하는데, 풍속화가였던 김홍도가 민속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현장감이 넘치던 풍속화가 그의 작품세계에서 사라지는 대신 격조 높은 문인화풍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어쩌면 김홍도 스스로 중인의 신분을 버리고 사대부가 되고자 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조의 ‘김홍도 사랑’을 질시한 세력들의 상소에 의해 부임한 지 3년째 되던 해에 불명예스럽게 현감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러나 정조는 다시 그를 궁으로 불러들여 그해 왕실 최대 행사를 기록하는 총책임을 맡게 한다. 1795년 음력 윤 2월 9일부터 8일에 걸쳐 이뤄진 정조의 화성 행차를 그린 ‘능행반차도’ 또한 김홍도의 손길이 미쳤음은 물론이다. 또한 정조 최대의 프로젝트로 불리던 화성건설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하는 것도 김홍도의 몫이었다. 

2008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정조가 하사한 부모은중경판을 복각하여 세운 은중경탑. 2008년 12월. 사진 / 손수원 기자

후불탱화에만 정신이 쏠리다 보니 그 옆의 중요한 것을 놓칠게 뻔했다. 바로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의 그림과 내용이 담긴 병풍이다. 그 생김새로 보아 옛날의 것은 아니고 요즘 만든 것이긴 하나 그 내용이 틀림없이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의 내용이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은 정조가 용주사를 세우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 보경스님이 들려준 부모은중경의 내용을 1796년에 목판과 석판에 새기고 김홍도에게 삽화를 그리게 한 것이다.

첫째, 아이를 배에서 지키고 보호해주신 은혜 
둘째, 해산함에 임하여 고통을 받으신 은혜 
셋째, 자식을 낳고서야 근심을 잊으신 은혜
(중략) 
열째, 임종 때도 자식 위해 근심하신 은혜

이렇듯 정조의 ‘용주사 프로젝트’와 ‘화성 프로젝트’를 함께 하며 화원으로서 임무를 다하던 김홍도는 1800년 정조가 49세의 나이로 승하한 후 날개가 꺾여버린다. 규장각의 개혁파들은 힘을 잃었고, 김홍도는 생계를 위해 자비대령화원으로 다시 들어가게 되지만 정조가 없는 화원은 더 이상 그의 자리가 아니었다. 

결국 1806년 62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그의 행적은 역사에도 기록되지 않을 만큼 초라한 것이었다. 오로지 1805년 구양수의 ‘추성부’를 인용해 쓸쓸한 가을밤의 고독과 적막감을 그린 ‘추성부도’만이 늙은 단원의 서글픈 애상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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