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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역사기행] 단종 유배지 영월 청령포 슬프도록 아름다운 강과 절벽을 거닐다
[역사기행] 단종 유배지 영월 청령포 슬프도록 아름다운 강과 절벽을 거닐다
  • 손수원 기자
  • 승인 2009.02.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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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9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영월 청령포의 전경. 2009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여행스케치=영월] 강원도 영월읍에서 남서쪽으로 약 2㎞ 떨어진 광천리의 청령포. 육지를 이리저리 휘감아 흐르는 강줄기와 험한 산줄기가 어우러져 기가 막힌 절경을 뽐낸다. 하지만 이런 절경을 두고 한때는 창살 없는 감옥으로 역사에 기록되기도 했으니, 그 사연 또한 기가 막히지 않은가. 

꼼짝없는 유배지였다. 깊은 강의 물줄기는 섬의 삼면을 가로막아 건너편으로 걸어 오가는 길을 모조리 막아버렸고, 섬의 뒤쪽은 육육봉(六六峰)이라고 불리는 험한 산줄기가 절벽을 만들어 나머지 한쪽마저 굳게 걸어 잠가버렸다.

마치 Ω자를 연상시키듯 감입곡류천을 따라 불쑥 튀어나온 강 너머의 작은 땅이 바로 ‘섬 아닌 섬’인 청령포다. 강을 건너는 나룻배가 없다면 꼼짝없이 발이 묶일 처지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으로 볼 때 창살 없는 감옥인 유배지로는 아주 적격인데, 경치 또한 기가 막히게 아름답다. 그래서 조선의 여섯 번째 임금인 단종의 유배지였던 이곳은 작년에 국가 명승지로 지정되었다.  

2009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단종과 함께 외로운 세월을 함께한 관음송. 2009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청령포 앞을 흐르는 강은 서강(西江)이다. 평창강이라고도 부르는 이 강은 청령포 바로 옆에서 동강과 어우러져 남한강의 상류를 이룬다. 청령포로 들어가려던 나룻배를 타야 하는데, 날씨가 얼마나 추운지 강이 꽁꽁 얼어버렸다. 설마 여기서 발길을 돌려야 하는 것은 아닌지 싶어 관리소에 물어보니 돌아오는 대답이 간단하다. “걸어가세요.”

햇볕이 들지 않는 곳을 골라 ‘도강’을 감행한다. 물이 워낙 깨끗한지라 얼음마저 투명하다. 그 두께가 족히 20cm는 되어 보이지만 시커멓게 강 아래까지 보이는 강을 건너려니 오금이 저리다. 17살의 어린 나이에 죽음의 그림자를 달고 청령포에 다다른 단종 또한 나룻배 위에서 이렇게 불안에 떨었을까. 

몇 십 미터의 강이 몇 백 미터는 되는 듯 간신히 청령포에 오른다. 자갈밭이 황량하게 펼쳐진 길을 걸어 올라가니 울창한 소나무 숲이 객을 맞이한다. 역사의 유배지라고 하기엔 너무나 상쾌한 공기가 정신을 맑게 한다. 

2009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책 읽는 단종의 모형. 2009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몇 백 년은 묵은 듯 소나무들이 하늘을 가린다. 잠시 발길을 멈추고 마음속으로 어린 단종에게 예를 표한다. 과연 이렇게 유유자적한 마음으로 이곳을 둘러봐도 되는지, 상쾌한 공기에 마냥 들떠 있어도 되는 것인지….

그때 소나무 숲 속에 기와집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저기가 단종의 거처이다. 문종(文宗)이 재위 3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12세의 어린 나이로 임금이 된 단종은 3년 만에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된 채 이곳 청령포로 유배당하였다. 

이 작은 기와집에서 어린 단종은 얼마나 두려움에 떨며 궁을 그리워했을까. 기와집에 설치된 단종의 모형은 표정 하나 없이 무심하게 책을 읽고 있지만, 이곳에 머문 두 달여 간의 그 한스러웠을 마음이야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어린 단종은 이 좁은 땅에서 무엇을 하며 지냈을까. 그가 지났으리라 생각되는 길을 따라 걸어본다. 얼마 걷지 않아 키가 30m도 넘는 범상치 않은 소나무 한 그루를 마주한다. 이 소나무는 600여 년 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관음송(觀音松)이다. 

단종이 청령포를 찾은 때가 1457년이니 그때쯤엔 이 관음송은 채 100년도 안 된 ‘청년’이었으리라. 실제로 단종은 유배생활을 하면서 이 소나무의 갈라진 가지 사이에 말을 타듯 올라가 시름을 달랬다고 한다. ‘관음송’이란 소나무 이름 역시 쫓겨온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이 늙은 소나무는 단종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며 시름을 나누던 친구였던 셈이다. 그러한 친구가 불과 1년도 안 되어 주검이 되어 강물에 떠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았으니, 그 이후 몇 백 년의 세월 동안 속에 쌓아온 노송의 애환 또한 가늠할 수 없다. 

단종은 관음송에 앉아 시름을 달래다 왕비인 정순왕후가 그리워지면 한양을 향하는 서북쪽의 절벽으로 올라갔다. 단종이 강봉될 때 왕비인 정순왕후 송씨도 ‘부인(夫人)’으로 강등되어 동대문 밖에서 시녀들이 구걸해온 양식과 염색일로 근근이 목숨을 부지하며 평생 영월 땅을 바라보며 한을 달래다가 세상을 떠났다. 절벽으로 올라가는 길에 가지런히 쌓아올려진 망향탑은 자신 때문에 일시에 고생길로 들어선 정순왕후를 그리워하며 쌓은 탑이다. 

2009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단종이 머물던 단종어가. 2000년에 새로 지었다. 2009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2009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정순왕후를 그리워하며 쌓았다는 망향탑. 2009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망향탑 위에 오르니 아득한 절벽이 펼쳐진다. 오른쪽으로는 단종이 한양을 바라보던 ‘노산대’가 서 있다. 80m 높이의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서강이 유유히 흐르는 광경은 지금은 누구에게나 절경이지만, 그 당시 단종에게는 절벽 같은 절망의 광경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단종은 한양을 그리워했고, 백성은 단종을 그리워했다. 그 대표적인 장소가 박달령이다. 백두대간의 길목이면서 봉화에서 영월로 넘어오는 길목인 박달령에서는 영남 사람들이 단종을 보기 위해 고개에 올라 영월 땅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지었다 한다. 

다시 얼어붙은 강을 건넌다. 시커먼 강 아래가 무서운 건 매한가지지만 이조차 건너지 못하고 마음을 졸였던 단종에 비하면 참으로 자유로운 입장이 아닌가. 아까보다 훨씬 빠른 걸음으로 강을 건너다 문득 뒤를 돌아본다.

단종이 청령포에 들어온 것이 6월이고 홍수로 인해 영월부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긴 것이 8월이니 아마도 그해 홍수가 들지 않았으면 겨울엔 얼어붙은 강 위를 걸어서 나올 수도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렇게 단종이 도망을 쳤더라면 역사가 바뀌었을까.

2009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일반인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세운 금표비. 2009년 1월. 사진 / 손수원 기자

강을 건너 왼편 소나무 숲에 ‘왕방연 시조비’에 마주선다. 금부도사 왕방연은 단종의 유배와 사형을 집행하였던 인물로, 사약을 가지고 와서 어명을 받들고 돌아가는 길에 이 언덕에서 청령포를 바라보며 다음과 같은 시조를 읊었다. 

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담길 예놋다 

그해 10월, 단종이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나서 아무도 그의 시신을 거두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때 영월의 호장(戶長)이었던 엄흥도가 한밤중에 몰래 시신을 거두어 산속으로 도망가다가 노루가 한 마리 앉아 있던 곳을 발견하였다. 마침 눈이 왔을 때였는데 노루가 앉아 있던 곳만 흙이 드러나, 그곳이 명당이라 생각하여 시신을 묻었다. 현재 영월읍내로 들어서는 입구 왼쪽에 자리 잡은 장릉이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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