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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세계 유일 여행지 03] 뿌리 깊은 나무 바람에 아니 흔들리니… 대구 옻골마을 경주 최씨 종가 백불고택
[세계 유일 여행지 03] 뿌리 깊은 나무 바람에 아니 흔들리니… 대구 옻골마을 경주 최씨 종가 백불고택
  • 송보배 기자
  • 승인 2012.11.0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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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2년 12월 사진 / 송보배 기자
2012년 12월 사진 / 송보배 기자

[여행스케치=대구]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고택인 경주 최씨 종가. 무려 400년간 조상의 충효 사상을 본받아 몸소 실천하며 그 맥을 잇고 있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새롭게 주목받는 유교 문화의 정수를 엿보았다.

취재를 시작하기에 앞서 종가 문화에 대해서 우리 것, 유일한 것이라 말할 수 있는지 한참을 고민하고 검토했다. 우리나라 종가 문화가 중국에서 시작한 종법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원류는 중국이다. 우리 외에 중국, 일본 등 유교 문화권에서는 희미하게나마 이런 문화를 공유하고 있어 사실 두부 자르듯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하지만 종가 문화를 연구하는 대가들에게 자문하니 다른 나라와 비교되는 우리만의 종가 문화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2012년 12월 사진 / 송보배 기자
다례 체험. 2012년 12월 사진 / 송보배 기자

영남문화연구원 백운용 선생은 “한 마을에 같은 성씨가 모여 살며 300~ 400년씩 집안 대표 조상을 모시고, 수백 년간 장자가 조상의 제사를 모시는 경우는 세계적으로 우리나라밖에 없을 것”이라며 우리 종가 문화만의 특별함을 언급하였고, 한국문중문화연구원의 한기범 교수도 “장손이 수백 년간 종택을 지켜오는 종가  문화는 우리나라가 출중하다”며 우리 종가 문화의 의미에 힘을 실어주었다. 


중국의 경우 문화혁명으로 인해 종가문화의 대가 끊겼고, 일본의 경우 성씨만 10만 개에 달하며 순수 유교 문화보다 불교나 민속신앙이 더 강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전에 있는 은진 송씨 묘역만 보더라도 한 문중이 1499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1070기의 묘를 한 장소에 세우면서 그 안에 석물과 당대 석학들이 써낸 비문을 집안 대대로 지켜왔을 정도로 종가 문화가 중요시되었다. 

이 때문에 한기범 교수는 종가로 이어 내려온 한국의 문중 문화야말로 세계 어느 문화와도 차별되는 우리 전통문화의 핵심이라 강조한다. 

2012년 12월 사진 / 송보배 기자
백불고택 안채. 양반가 주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2012년 12월 사진 / 송보배 기자

대구 옻골마을 경주 최씨 종가는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가옥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하며 나라를 지킨 최계 선생의 둘째 아들 최동집이 정착하면서 1630년 지은 것으로, 그 역사가 벌써 380여 년에 달한다. 현재 경주 최씨 대암공 14대 종손 최진돈 선생이 주거하며 종택을 지키고 있다. 

본래 종가는 종손을 기준으로 4대조를 봉양하는 것이 기본이다. 여기에 특별히 공을 세운 조상이나 가문을 빛낸 조상은 국가나 지방 유림의 추대를 받아 불천위로 대대손손 제사를 모신다. 조상의 훌륭한 뜻을 기리는 의미다. 경주 최씨 종가에서는 입향조 외에 특별히 백불암 최흥원 선생을 불천위로 모시고 있다. 

2012년 12월 사진 / 송보배 기자
말끔하게 정렬된 장독에서 종부의 야무진 살림 솜씨가 엿보인다. 2012년 12월 사진 / 송보배 기자

“지금 부인사 밑에 본래 큰 고을이 있었어. 땅이 좋아 농사도 잘되고 복 받은 곳이었는데 관리들의 수탈이 얼마나 심한지 세금을 면화로 내라면서 백성을 하도 괴롭혀서 이에 못 견딘 백성들이 고을을 떠나 유랑을 했단 말이야. 백불암 선생이 이곳을 보시고 마을 대표들을 모아 계를 만들어 백성들의 세금을 대신 내주시지 않았겠나. 또 땅을 개간해 논밭 없는 사람에게 그 땅을 부치도록 하셨지. 세금 문제가 해결되니 고을이 10여 년 만에 태평성대를 맞이했단 말이야. 굶는 이들이 없었고 노인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일도 사라졌어. 그러자 이 어른이 그때부터 강당을 지어 백성들을 가르치셨어. 정조께서 이 일에 감명을 받아 직접 전교(傳敎)를 내려 전국에서 이 사례를 본받게 하셨지.”

백불암은 이처럼 어려운 백성을 외면하지 않고 이들의 어려움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선비의 의무로 생각했다. 공자께서 가장 기본적으로 삼았던 인(仁)의 정신은 가정의 효나 우애에 그 근본이 기인하니, 백불암은 그 표본이었다. 

2012년 12월 사진 / 송보배 기자
제사상에 올리는 제기. 2012년 12월 사진 / 송보배 기자

“백불암 선생이 효자로 유명한 분이셨어. 부친이 병환 중에 있자 매일 건강을 체크한다고 변도 맛보시고 부모님 병구완을 위해 의학을 공부하셨다 안 하나. 모친이 돌아가시고 3년 동안 팔공산에서 시묘살이를 하셨는데 추운 곳에서 고생하느라 사람이 삐쩍 말라 있으니까 그냥 봐준 건지 몰라도 전설에는 범이 내려와서 묘를 같이 지켜줬다고 해. 특이한 게 이분이 서른여섯에 상처한 뒤 평생을 홀로 사셨어. 주변에서 재혼하라고 권유하니까 하신 말씀이 첫날밤 평생 백년해로하자고 부인과 약속을 했는데 어찌 약속을 깨겠느냐고…. 요샛말로 하자면 정절남 아니겠나.”

2012년 12월 사진 / 송보배 기자
동계정 뒤뜰에서 전통놀이를 즐길 수 있다. 2012년 12월 사진 / 송보배 기자

흔히 종가라 하면 가문의 안위나 부흥을 최고로 여겼을 것 같지만 사실은 꼭 그렇지 않다. 나라에 어려운 일이 생길 때 가문의 안위도 뒤로하고 가장 먼저 나선 이들이 바로 종가의 선비들이었다. 

고성 이씨 17대 종손 이상룡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나라를 잃었는데 사당이 무슨 소용이냐며 조상의 위패를 땅에 묻고 서간도로 떠났다. 이후 이상룡은 물론 일가족이 만석 재산에 집까지 팔아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그중 일제의 동남아 함락 소식을 들은 이상룡의 아들은 “하루를 사는 것은 하루의 치욕을 보태는 일”이라며 자결까지 하고 말았단다. 옻골마을 경주 최씨 가문 역시 마찬가지이다. 현 종손 최진돈 선생의 고조부인 최시교 선생은 국채보상운동에 대구 유림 대표로 앞장섰고, 최시교 선생의 조카인 최종응도 독립운동의 모금책으로 일했다. 당시 가산을 털어 독립운동을 하느라 재물이 많이 축이 났단다. 최진돈 선생은 윗대 어르신들은 그리 훌륭했는데 본인은 평범하게 집을 지키고 있노라며 이내 겸허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2012년 12월 사진 / 송보배 기자
최씨 종가 자손들이 공부하던 동계정. 2012년 12월 사진 / 송보배 기자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내가 네 살이었는데 그때 팔공산 전투가 일어나면서 피란을 가야 했거든? 할아버지께서 조상님의 신주를 싸서 한 손에 챙기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손을 딱 잡고 그렇게 피란 가뿌리신기라.”


종손은 조상의 제사를 지내고 손님을 접대하는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의 막중한 임무를 맡는 만큼 그 존재 의미도 특별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경황이 없는 와중에 최진돈 선생의 조부가 챙긴 것은 단 두 가지, 바로 조상의 신주와 대를 이을 종손이었다. 종손은 어릴 때부터 따로 선생을 두어 가르치고 이름난 학자의 문하생으로 보내는 등 교육에도 남달랐다.  

2012년 12월 사진 / 송보배 기자
경주 최씨 대암공 14대 종손이자 백불암의 9대 종손인 최진돈 씨와 종부 이동희 씨. 2012년 12월 사진 / 송보배 기자

“옛 어르신들이 벽장 속에 먹을 것을 꼭 두시거든. 삼촌들이 어릴 때 그것을 몰래 꺼내 먹고 혼나기 싫으니까 내가 먹었다고 글카더란 말이야.” 사사롭게 혼날 일도 종손에게는 관대하거나 반대로 남에겐 사사롭게 넘어갈 잘못도 종손에게는 엄격하였다. 최진돈 선생께 종손으로서 어려운 점은 없는지 여쭙자 의외로 소탈한 대답이 되돌아왔다. 

“뭐 있겠나. 1년에 13번 제사 지내는 기는 가족끼리 회식한다고 생각하고, 묘사는 일가친척끼리 모여 야외 나간다 생각하면 그만큼 재미 아이가. 어렵게 생각할 것 하나 없는 기라. 제사 모시고 문중 어른들 대접하고 딱 움직이기 좋을 만큼 일이 있는 기라. 나도 젊어서 직장 생활하다 가문을 이었는데 우리 아들도 그래 않겠나?” 

<명문 종가 이야기>를 펴낸 이연자 씨는 “종가 사람들은  전통의 법도를 가장 잘 지키고 따르는 ‘모범 집안’의 상징”이라 했다. 종가란, 단순히 대를 잇는 것뿐 아니라 전통과 미덕을 켜켜이 쌓아 내려오는 것이기도 하다. 조상의 뜻을 이어받아 나랏일에 솔선수범하고, 조상의 글과 물건을 소중히 간직해 오늘날에 와서 소중한 문화재로 남기고, 우리가 잊었던 공동체의 가치를 되새길 수 있도록 한 정신이 있어 오늘날 다시 종가가 주목받는 것이 아닐까. 자자손손 켜켜이 쌓아온 덕과 내공이야말로 거친 바람에도 무너지지 않는 깊은 뿌리일 것이다.  

INFO.
주소
대구시 동구 둔산동 386 

Tip. 옻골마을 체험
옻골마을에서는 경주 최씨 자손들의 강학 장소로 이용되어온 동계정, 입향조인 대암 선생의 제사를 모시는 보본당에서 한복 입기, 서당 체험, 전통 놀이 체험, 다도 체험, 마을 탐방 체험을 운영한다. 단체 위주이지만 한복 입기 체험과 다도 체험은 개인도 이용할 수 있다. 단체 체험의 경우 1인당 1만원(서당 체험+전통 놀이 체험+한복 입기), 다도 체험(개인) 1인당 3000원.  

옻골마을 탐방
마을 입구 관광안내소에서 문화관광해설사가 마을을 안내하고 있다.
시간 10:00~17:00(설·추석 연휴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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