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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도심 속 숨은 문화 유적 ②] 스러진 왕실의 욕된 사랑방 운현궁 양관
[도심 속 숨은 문화 유적 ②] 스러진 왕실의 욕된 사랑방 운현궁 양관
  • 구완회 작가
  • 승인 2012.11.1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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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2년 12월 사진 / 구완회 작가
2012년 12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여행스케차=서울] 몇 년 전 화제를 모았던 드라마 <궁>에서 황태자 부부가 살았던 ‘동궁양관’을 기억하시는지. 푸른 숲에 둘러싸인 멋스러운 근대 서양식 건물에 많은 이들이 궁금증을 품었다. 그런데 실제로 이곳이 세트장이 아니라 서울, 그것도 도심 한복판에 있단다. 이 건물의 진짜 이름은 ‘운현궁 양관’. 하지만 이상하다. 지난번 운현궁을 찾았을 때는 이런 건물이 없었는데?

2012년 12월 사진 / 구완회 작가
명성왕후가 신부 수업을 받은 노락당 앞마당. 2012년 12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아시다시피 운현궁은 고종이 어린 시절 살았던 잠저(潛邸)이다. 잠저란 왕의 아들이 아니었던(그러니까 궁궐에서 살지 않았던) 왕이 즉위하기 전에 살던 집을 말한다. 어떻게 왕의 아들이 아닌데 왕이 될 수 있느냐고? 임금이 후사 없이 승하한다면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궁궐 밖 왕족 중 적당한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주어야 했으니까. 


고종의 전임이었던 철종 또한 왕이 되기 전에는 강화도에서 평범하게 살고 있었다(그래서 그의 별명이 ‘강화도령’이다). 하지만 철종의 강화도 잠저와 고종의 운현궁은 본질적으로 달랐다. 당시 세도가였던 안동 김씨 세력의 필요에 의해 ‘낙점’된 철종의 잠저는 곧 잊힌 반면,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철저한 ‘기획’으로 왕위에 오른 고종의 운현궁은 제2의 궁궐, 아니 모든 권력이 모이는 실질적인 궁궐의 역할을 했다. 고종이 등극한 후 흥선대원군은 이곳에 머물며 10년 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2012년 12월 사진 / 구완회 작가
고종의 잠저이자 조선 말 정치의 중심이었던 운현궁 정문. 2012년 12월 사진 / 구완회 작가

풍운아 대원군, 운현궁에서 눈을 감다
그런데 의아한 일이다. 명성에 비해 운현궁의 규모가 너무 작지 않은가. 하지만 의문은 곧 풀렸다. 이곳 역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헐리고, 잘리고, 팔려나간 조선의 다른 궁궐과 똑같은 운명을 겪었던 것이다. 원래 운현궁은 2만 평이 넘는 부지에 여러 건물이 빼곡하게 들어서 “궁궐에 버금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더랬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계속 줄어들어 지금은 노안당을 비롯한 4채의 건물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렇다면 양관은? 다행히 양관은 옛날 그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하지만 지금 양관이 있는 자리는 운현궁이 아니다. 그곳엔 현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이 들어서 있다. 심지어 운현궁 어디에도 양관에 대한 이야기가 없어서, 미리 알고 가지 않으면 운현궁 뒤로 보이는 멋진 서양식 건물이 원래 운현궁 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하기 어렵다.  

여기서 드는 또 하나의 의문. 흥선대원군 하면 같이 연상되는 것이 ‘쇄국정책’인데 어찌 운현궁에 서양식 건물이, 그것도 본채를 압도하는 높이와 자태로 서 있는 것일까? 여기에는 가슴 아픈 역사가 숨어 있다. 

2012년 12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운현궁 양관을 지키던 초소. 지금도 그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12년 12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시대의 풍운아 흥선대원군은 1898년 이곳 운현궁에서 눈을 감았다. 젊은 시절 ‘상갓집 개’라 불리는 수모를 참으며 가슴 깊이 한과 야심을 키우다 아들을 왕위에 올리면서 드디어 마음껏 뜻을 펼치려 했으나, 진짜 시련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외척 세력의 발호를 막기 위해 천애 고아를 며느리로 삼은 것이 그야말로 호랑이 새끼를 키운 셈. 아무리 권력 앞에서는 부모 자식도 없다지만 며느리를 죽여 달라고 일본 공사관에 수시로 부탁을 했던(유길준의 증언) 그였지만, 막상 비참하게 살해당한 며느리에 대한 마음은 필시 편치 않았으리라. 설상가상 자신이 죽은 후 고종이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것을 하늘에서 봤다면 그 심정은 또한 어떠했을까?
 

2012년 12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양관 지붕 앞쪽으로 일본 황실의 국화 문양이 선명하게 보인다. 2012년 12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운현궁 양관 주인들의 인생 유전
운현궁에 양관이 들어선 것은 흥선대원군이 세상을 뜨고 10여 년 후의 일이다. 당시 운현궁은 대원군의 손자였던 이준용이 소유하고 있었는데, 일제는 그에게 귀족 작위를 준 뒤 부상(?)으로 양관을 지어주었다. 이곳에서 이준용은 손님을 맞이하고 연회를 베풀었다. 할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손님을 맞이하고 국사를 논하던 노안당이 내려다보이는 최신식 건물에서. 

하지만 이준용이 처음부터 일본의 녹을 먹은 친일파는 아니었다. 그는 대원군이 가장 사랑한 손자였으며, 고종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그를 폐위하고 새로운 왕으로 추대할 후보 1순위였다. 스스로 정치적 야심이 있었던 이준용은 동학군과 연합하여 친일파 정부를 몰아낼 계획을 세우는 등 처음에는 반일 행보를 보였다. 이후 을미사변으로 명성왕후가 시해되자 풍전등화의 국가에서 왕이 된다는 것이 별 의미가 없음을 깨닫고 애국 계몽운동에 투신한다. 하지만 1910년 대한제국이 완전히 일제의 손에 넘어가자 그는 반일에서 친일로 완전히 방향을 돌린다. 자신이 왕이 될 나라가 없어진 상황에서 그에게 반일이란 별 의미가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끊임없는 권력 투쟁 과정에서 투옥과 고문, 망명 등으로 피폐해진 심신도 한몫했을 것이다. 

2012년 12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운현궁 안채이자 금남의 집, 이로당. 2012년 12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어쨌든 한일 강제 병합 이후에 그는 누구보다 먼저 작위를 받고, 많은 은사금을 챙겼다. 이때 함께 선물로 받은 것이 운현궁 양관이다. 그러나 이렇게 욕되지만 풍요로운 시절도 오래가지 않았다. 피폐한 심신을 결국 회복하지 못한 채, 이준용은 1917년 47세를 일기로 눈을 감는다. 그토록 원하던 왕도 되지 못했고, 마지막까지 소원하던 아들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소원대로 조선의 왕이 되었다 한들, 뭐가 크게 달라졌을까? 고종의 뒤를 이은 순종은 왕이어서 행복했을까? 아니면 그는 그나마 왕도 아니어서 불행했던 것일까. 

2012년 12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운현궁 양관이 있는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의 정문. 2012년 12월 사진 / 구완회 작가

그가 세상을 뜨고 운현궁은 여섯 살 난 양자에게 돌아갔다. 이후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군인이 된 이우는 1945년 일본의 나가사키에서 원자폭탄이 터지면서 숨졌다. 해방 이후 그의 장남은 운현궁 양관을 포함한 많은 부지와 건물을 덕성여대에 팔았고, 그래서 양관은 지금까지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사무처 건물로 쓰이고 있다. 

다음에 혹 운현궁에 갈 일이 있으시거든, 쪼그라든 궁만 보지 마시고 덕성여대 평생교육원도 함께 둘러보시길. 그곳에 무심히 자리 잡고 있는 양관을 둘러보면서 식민지 왕족의 운명도 되새겨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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