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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10월호
정지용·김윤식 첫시집 내 준 시문학파 시인, 송정리 박용철 생가
정지용·김윤식 첫시집 내 준 시문학파 시인, 송정리 박용철 생가
  • 박상대 기자
  • 승인 2021.05.27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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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여행지] 송정리 박용철 생가
광주송정역 뒤쪽에 있는 박용철 시인 생가. 사진 / 박상대 기자

[여행스케치=광주] 광주송정역 근처, 택시로 10분 거리에 있는 박용철 시인의 생가. 정지용ㆍ김윤식의 서정시들을 세상에 알린 편집자이자 셰익스피어 희곡, 괴테의 시를 번역해서 세상에 알린 번역가의 향기가 스며 있는 집…. 

용아(龍兒) 박용철 시인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학창시절 국어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이 아니라면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한글로 시를 쓰고, 시를 통해 민족 언어를 지키고 민족정신을 고취 시켜야 한다고 생각한 젊은 시인 박용철(1904년생). 

박용철 시인의 생가에는 끊임없이 여행객이 찾아온다고 한다. 사진 / 박상대 기자

그는 일본 유학 중 시인 김윤식(1903년생)과 친해졌고, 다시 귀국하여 1930년 문예지 <시문학>을 창간했다. 1931년 <월간문학>, 1934년 <문학> 등의 창간을 주도했다.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기 전에 친구들의 시를 먼저 챙겼던 시인은 정지용(1902년생)과 김윤식의 시집을 자비로 출간해 주기도 했다. 선한 부잣집 아들답게 베풀기를 좋아했던 시인은 문우들의 시집을 펴내고, 외국 문학작품들을 번역해서 세상에 내놓던 중 1938년 결핵을 앓다 사망하면서 문단에서 사라졌다.

용아 시인의 이름이 교과서 밖으로 튀어나온 것은 1980년대 중반, 영화 <고래사냥>을 통해서였다. 가수 김수철이 부른 노래 <나두야 간다>는 ‘봄이 오는 캠퍼스 잔디밭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 편지를 쓰네…’로 시작한다. 이 노래에서 차용한 용아의 시 <떠나가는 배>는 ‘나 두 야 간다/나의 이 젊은 나이를/눈물로야 보낼 거냐/나 두 야 가련다...’로 시작한다.

시인의 대표작인 <떠나가는 배>는 지금 시인의 생가 앞마당 정원 시비 속에 살아 있다.

박용철은 1904년 광주 송정리에서 부잣집 도련님으로 태어났다. 시인이 태어난 광산구 소촌동의 또 다른 이름은 ‘솔머리마을’이다. 먼 옛날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솥뚜껑같이 생긴 지형이라고 말했다. 솥뚜껑이 있으면 그 아래는 솥이 있을 터. 그래서 그 마을에 터를 잡은 시인의 선조들은 부유했고, 학자로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광산구에 사는 노인들은 지금도 이 집안이 천석궁 소리를 들은 부유한 집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시인은 광주보통학교를 다닐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집안의 큰 기대를 안고, 서울로 유학을 갔다. 

시인은 배재고보와 연희전문을 다니는 동안에도 벗들과 어울려 문학과 예술을 이야기하며 청춘을 불태웠다. 시를 언어의 예술로 자각한 순수문학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틈틈이 박용철 시인의 생가를 찾아온다는 용아박용철기념사업회 김보곤 이사장. 사진 / 박상대 기자
시인의 생가에는 마을 주민들도 자주 찾아와서 쉬었다 간다. 사진 / 박상대 기자
박용철 시인의 생가 대문. 사진 / 박상대 기자

흙마당에 자리한 부잣집 정원과 장독대
이 마을은 도시화가 진행되기 전에는 충추 박씨 집성촌이었다. 

시인의 16대조인 박상(1474~1530)이 가장 오래된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눌재 박상은 호남선비의 계보, 호남의 성리학을 말할 때 맨 앞줄에 거론되는 인물이다. 박상 선생은 광주시 남구 서창 한옥마을을 지나는 도로의 이름인 ‘눌재로’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광주경찰청에서 광주여자대학교를 거쳐 첨단산업단지를 잇는 도로의 이름은 시인의 호에서 빌려온 ‘용아로’이다. 박상과 박용철 즉, 선조와 후손의 이름으로 지어진 도로명이 두 개 있는 셈이다. 

광주시 광산구 소촌로 46번길 24. 금호타이어 공장에서 큰길을 건너면 주변에 현대식 건축물들이 몇 채 있고, 단아한 외형의 초가집이 한 채 있다. 대문과 행랑채와 안채, 변소까지 모두 초가지붕을 머리에 이고 있다. 

대문을 들어가기 전에 오른쪽에 있는 안내판을 읽고, 대문을 들어서려는데 시인의 철제조각상이 시선을 당긴다. 조각상에 카메라를 들이대자 시인의 얼굴이 드러난다. 조각 작품에 새겨진 시인의 얼굴이 햇빛 그림자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기와를 올린 솟을대문은 아니지만 적잖은 위엄을 느낄 수 있는 나무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사랑채와 마당이 있다. 마당에는 방문객들이 잠시 앉아서 쉴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이 집은 시인의 고조부가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실제 건립연대는 19세기 후반으로 추정한다. 마당을 건너 사랑채를 지나면 안채가 있다. 남향으로 앉아 있는데 마당에는 정원과 장독대가 있다. 정원에는 오래된 소나무와 동백나무가 자리를 잡고, 철쭉과 수선화가 활짝 피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 2자 높이로 자연석을 쌓고, 기단 위에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원통형 기둥과 사각형 기둥을 세웠다. 서까래 위에 부연을 얹은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널빤지로 만든 마루에 따사로운 봄 햇살이 내려앉아 있다. 이웃에 사는 여인들이 놀러 와서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평화롭다. 

생가 대문 옆에 있는 조각상과 그림자. 사진 / 박상대 기자
송정공원에 있는 용아 박용철 시인의 시비. 사진 / 박상대 기자

너무나 짧은 생애를 살다간 순수문학인
이 집은 1970년대 새마을사업으로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기와와 슬레이트로 개량했었는데 최근에 다시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우리나라 현대문학의 기수 가운데 한 사람이자 순수문학의 뿌리 역할을 한 시인을 기리기 위하여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3호로 지정하였다. 광주시 문화관광해설사가 당번을 정해 여행객을 맞이한다.

“그동안 시인의 역할에 비해 문단에서 저평가를 받았고, 광주 사람들도 소홀히 여겼음을 감출 수가 없어요. 굳이 관광객을 유입하기 위한 전략이 아니라, 후세 사람들이 먼저 살다간 위대한 사람들에 대한 업적을 망각하고 살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시인이 어떤 삶을 살다 갔는지 보면서 교훈을 얻고, 그분의 시를 읽으면서 위로를 받기도 하고, 마음을 다잡기도 하잖아요. 살아 있는 사람만 소중한 것이 아니고, 살아 있는 사람한테만 그늘이 있는 것은 아니지요.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보면 이미 죽은 사람들 덕분에 유명 관광지가 된 곳도 있고, 그 덕분에 많은 사람이 먹고사는 고장도 있잖아요.”

지난해 취임한 김보곤 용아박용철기념사업회 이사장(디케이 대표)은 틈틈이 생가를 방문하여 이런 저런 구상을 하고 있다. 광산구청, 광주시청과 협의하여 용아기념관도 짓고, 시인을 기리기 위한 다양한 이벤트도 기획하고 있다. 

시인의 생가를 나서는데 어디선가 시인의 낭낭한 목소리로 <밤 기차에 그대를 보내고>가 들리는 듯하다. 

“온전한 어둠 가운데 사라져버리는/한낱 촛불이여.
이 눈보라 속에 그대 보내고 돌아서 오는/나의 가슴이여.
쓰린 듯 비인 듯한데 뿌리는 눈은/들어 안겨서/발마다 미끄러지기 쉬운 걸음은/
자취 남겨서/머지도 않은 앞이 그저 아득하여라.“(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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