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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권다현의 두발로 읽는 문학여행] 절망을 위로한 커피 한잔, 소설 '밀다원 시대'의 부산
[권다현의 두발로 읽는 문학여행] 절망을 위로한 커피 한잔, 소설 '밀다원 시대'의 부산
  • 권다현 여행작가
  • 승인 2022.01.14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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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수도기념관에 재현된 밀다원 다방. 사진/ 권다현 여행작가

[여행스케치= 부산] 전방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부산의 한 다방에서는 피난 온 예술가들이 모여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누군가에겐 전쟁을 망각한 달콤한 허영처럼 보였을 테지만, 이들 작품의 바닥에는 참담한 현실에 내던져진 인간의 절망과 허무가 저릿하게 담겨 있다. 광복동에 실제로 존재했던 다방을 배경으로 쓴 김동리의 소설 <밀다원 시대>는 피난수도 부산으로 떠나는 시간여행에 훌륭한 지도가 되어준다.

끝의 끝, 막다른 끝, 거기서는 한 걸음도 더 나갈 수 없는,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허무의 공간으로 떨어지고 마는, 그러한 최후의 점 같은작가 김동리는 그의 소설 <밀다원 시대>에서 한국전쟁 당시의 부산을 이렇게 표현했다. ‘원고료 몇 푼씩 받아서 그때그때 연명을 해 오던소설가인 주인공 이중구도 전쟁 통에 빈털터리가 되어 아내와 어린 딸은 평소 가깝지도 않았던 처남에게 딸려 보내고, 병든 노모는 위태로운 오두막에 남겨둔 채 홀로 부산행 열차에 올랐다. 1.4후퇴 하루 전인 195113일 오후 315, 부산행 마지막 열차였다.

소설 밀다원 시대가 실린 현대문학 표지. 사진/ 권다현 여행작가
소설 '밀다원 시대'가 실린 현대문학 1955년 4월호. 사진/ 권다현 여행작가

 

벼랑 끝에서 만난 달콤한 환상, 밀다원

아무런 연고도 없는 부산에 도착한 첫날 밤, 이중구는 천길 벼랑에 붙어 있는 것같은 막막함과 죽을 시간을 기다리고 늘어져 있을어머니 생각에 밤새 무서운 속력으로 달리는 기차를 타고 바다 속으로 뛰어드는 꿈을 반복한다. 이튿날 아침 서울서 온 문화인들은 모두 밀다원에 모인다라는 말 한마디에 광복동 로터리에 자리한 다방을 찾은 그는 평론가 조현식과 반갑게 조우한다. ‘막다른 끝이라고 생각했던 부산에서 옛 동료들을 만난 이중구는 악수란 것이 이렇게도 달고 향기로운 술과도 같이 전신에 퍼져 흐를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라며 벅찬 활기에 휩싸인다.

꿀물이 흐르는 찻집을 뜻하는 밀다원은 이중구에게 벼랑 끝에서 만난 달콤한 환상이었다. ‘김이 모롱모롱 오르는 노리끼리한 커피한 모금에 그는 가슴속에 쌓이고 맺혀 있던 모든 아픔을 한꺼번에 훅 쓸어내려주는기분을 느낀다.

이중구 뿐만 아니다. 밀다원에서 꿀벌들 처럼 왕왕거리는 예술가들은 앞뒤에 죽음과 이별을 두고 좌우에 유랑과 기한을 이끌며, 그래도 아는 얼굴, 커피 한잔이 있어서 즐겁다. 이중구는 범일동에 한결 아늑하고 편안한 잠자리를 얻게 되었음에도 밀다원에서 한 걸음만 더 멀어도 그만큼 불안하고 가슴이 따가워 죽겠다며 굳이 피난살이로 너저분한 다다미방에 몸을 누인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거처로 쓰였던 임시수도기념관. 사진/ 권다현 여행작가
밀다원의 위치를 가늠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던 외국 군인의 사진. 사진/ 권다현 여행작가

 

임시수도기념관에서 만나는 밀다원의 흔적

밀다원은 실제 부산에 존재했던 다방이다. 당시 광복동과 남포동 일대에 밀다원을 비롯해 금강, 스타, 춘추, 녹원 등의 다방이 밀집했다.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몰려든 예술가들이 드나들면서 다방은 단순히 차를 마시는 장소를 넘어 종합문화공간으로 활용됐다. 출판기념회와 그림전시회는 물론 각종 강습회와 송별회, 환영회 등이 수시로 열렸다. 이 시기 부산에서는 전쟁 전보다 훨씬 많은 전시회가 열렸다고 한다.

밀다원이 있던 자리는 대규모 상업시설이 밀려들어 그 정확한 위치를 가늠하기 어렵다. 몇몇 예술가의 기억을 토대로 부산 중구 광복로 68 부근일 것으로 추정됐다. 지난 2015년에는 다방 밀다원이란 글자가 선명한 간판을 배경으로 촬영된 외국 군인의 사진이 발견돼 큰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일부 지역 토박이들은 그 뒷 건물인 광복로 66-2가 실제 밀다원이 있던 위치라고 주장해 여전히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재현된 밀다원 다방. 사진/ 권다현 여행작가
임시수도기념관에 재현된 피난학교. 사진/ 권다현 여행작가

다행스럽게도 부민동에 자리한 임시수도기념관에 밀다원의 내부가 재현됐다. 소설에 묘사된 것처럼 한가운데는 커다란 드럼통 스토브가 열기를 뿜고’, ‘얼른 보아 한 20개나 됨 직한 테이블을 갖춘 다방의 모습은 아니지만, <밀다원 시대>가 실린 <현대문학> 19554월호를 비롯해 이곳을 드나들었던 예술가들의 작품 다수가 전시돼 있다. 야외전시장에서는 밀다원 위치를 추정하게 해줬던 외국 군인의 귀중한 사진과 함께 화가 전혁림의 회화소품전 등 당시 부산에서 열린 다양한 전시회의 리플릿을 확인할 수 있다.

임시수도기념관에서는 밀다원 외에도 피난민들이 임시로 지은 판잣집과 천막으로 만든 학교, 밀가루를 비롯한 각종 구호품 등 피난시절 부산의 다양한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부산이 대한민국의 임시 수도로 기능하던 때에 이승만 초대 대통령 내외가 거처했던 공간이었기에 집무실과 응접실 등도 당시 분위기 그대로 재현돼 더욱 눈길을 끈다.

피난시절 종합문화공간으로 활용됐던 다방. 사진/ 권다현 여행작가

<밀다원 시대>는 이중구 일행이 시인 박운삼의 자살로 유일한 안식 처였던 밀다원에서 쫓겨나 다른 다방으로 뿔뿔이 흩어지면서 끝난다. 이는 시인 전봉래의 죽음을 모티브로 한 것인데, 겨우 스물여덟살의 젊은 시인은 스타다방에서 치사량의 수면제를 먹은 뒤 바흐의 음악을 들으며 죽음에 이르는 순간을 시로 써서 남겼다. 이 사건이 아니더라도 다방에 모여 글을 쓰고 음악을 듣고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때문에 헌병대는 수시로 다방을 습격하여 전쟁 상황임을 일깨웠다고 한다.

 

밀다원을 거쳐 간 또 한명의 예술가, 이중섭

화가 이중섭 또한 밀다원을 오가며 동료 예술가들과 피난살이의 고단함을 나눴다. 시인 김춘수는 광복동에서 만난 이중섭은 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었다라며 동경에서 아내가 온다고 바다보다도 진한 빛깔 속으로 사라졌다고 회고했다. 한참 뒤 남포동의 어느 찻집에서 이중섭을 다시 만난 그는 결국 아내를 만나지 못한 슬픔에 빠진 가난한 화가가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진한 어둠이 깔린 바다를 한 뼘 한 뼘 지우고 있었다고 묘사했다.

이중섭이 피난생활을 했던 범일동에 마련된 전망대. 사진/ 권다현 여행작가
이중섭전망대에서 바라보이는 범일동 풍경. 사진/ 권다현 여행작가
이중섭전망대에 새겨진 가족과의 편지. 사진/ 권다현 여행작가

이중섭은 1.4후퇴 때 부산으로 내려왔지만 극심한 생활고 때문에 아내 마사코와 영양실조에 걸린 아들을 처가가 있는 일본으로 떠나보내야 했다. 가족과 이별하고 범일동 판잣집에 홀로 남은 그는 낮에는 부두노동자로 일하고 밤에는 술로 외로움을 달랬다. 그에게 유일한 희망은 다방 한 구석에서 담뱃갑 은박지에 끄적이는 그림뿐이었다. 간혹 작품을 완성해 끼니를 해결하기도 했는데, 임시수도기념관에는 이중섭이 표지 그림을 그린 구상의 시집 <초토의 시>를 비롯해 그의 작품을 목차 도안으로 사용한 <현대문학> 등을 만날 수 있다.

이중섭이 표지 그림을 그린 시인 구상의 시집. 사진/ 권다현 여행작가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에게 지급됐던 구호품. 사진/ 권다현 여행작가

이중섭이 잠시 살았던 범일동에는 이중섭거리가 조성됐다. 그의 대표작 <흰 소>를 입체적으로 구현한 조형물부터 골목 곳곳을 이중섭의 그림들로 꾸몄다. 이곳을 배경으로 그린 <범일동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위치에 전망대도 만들어졌다. 유리로 된 난간에는 사랑하는 가족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꾹꾹 눌러 담은 편지가 새겨져 그림 이상의 감동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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