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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전통시장 탐방] 호국의 역사와 식품산업이 어우러진 병천 오일장
[전통시장 탐방] 호국의 역사와 식품산업이 어우러진 병천 오일장
  • 김수남 여행작가
  • 승인 2023.08.16 10: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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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이 주도한 만세운동이 펼쳐졌던 아우내장터가 병천 오일장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사진 / 김수남 여행작가
유관순이 주도한 만세운동이 펼쳐졌던 아우내장터가 병천 오일장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사진 / 김수남 여행작가

[여행스케치=천안] 병천 오일장은 독립만세!’ 함성으로 가득한 아우내장터에서 열리는 전통 깊은 정기시장이다. 아우내는 두 물이 만나서 어우러진다는 뜻이 담겨있다. 정선의 아우라지나 양평의 두물머리와 비슷한 개념이다. 병천면이라는 이름이 나온 건 일제강점기 말엽인 1942년인데 역사적 의미가 담긴 지명 아우내를 이대로 잊게 되는 건 아닌지 아쉬움이 든다. 그러니 시장을 제대로 여행하려면 유관순 생가까지 둘러봐야 마무리가 될 것이다.

병천하면 순대가 워낙 유명하여 병천순대라는 조합이 먼저 머리에 떠오른다. 반면 아우내하면 아우내장터의 아우내만세운동이 머리에 떠오른다. 같은 지역을 말하는 같은 이름인데 한문식 이름으로 바뀌면서 아우내 정신은 잃어버리고 순대만 찾는 듯하여 아쉽기만 하다.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순대 속 같은 세상살이가 된 것인가. 그래도, 속은 어떨지언정 맛은 외면하기 어려운 게 순대다.

꼼꼼하게 옷을 고르고 있는 손님들. 사진 / 김수남 여행작가
꼼꼼하게 옷을 고르고 있는 손님들. 사진 / 김수남 여행작가
항아리째 가지고 와서 장을 파는 상인. 사진 / 김수남 여행작가
항아리째 가지고 와서 장을 파는 상인. 사진 / 김수남 여행작가

활력 넘치는 병천면의 오일장
천안은 인구 65만의 도농복합시이다. ‘천안삼거리라는 노래가 말해 주듯 예로부터 교통이 좋아 꾸준히 발전을 이룬 내륙도시다. 경기도와 접하고 있어서 서울에서의 접근성도 좋아 대학교도 12개나 되고 전철을 통해 왕래하는 인구도 많다. 행정구역을 보면 2개의 구, 4개의 읍, 8개의 면으로 되어 있는데 그중 병천면은 면 단위에서는 입장면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6,500명 가량 된다. 지역주민의 말도 그렇거니와 현장에 와서 보면 인구로는 입장면에 밀리지만 지역 경기나 활력 넘치는 모습에선 면 단위 중 최고라 할 만하다.

1일과 6일에는 병천면 소재지에서 정기시장이 열리는데 이때는 순대 맛집을 찾는 관광객들과 오일장을 찾는 사람들이 한데 몰리면서 축제장을 방불케 한다.

매 1일과 6일에 장이 서는 병천 오일장. 사진 / 김수남 여행작가
매 1일과 6일에 장이 서는 병천 오일장. 사진 / 김수남 여행작가
대형마트에서나 볼 법한 침구도 있다. 사진 / 김수남 여행작가
대형마트에서나 볼 법한 침구도 있다. 사진 / 김수남 여행작가
장식장에 두면 빛이 날 것 같은 동 장식품들. 사진 / 김수남 여행작가
장식장에 두면 빛이 날 것 같은 동 장식품들. 사진 / 김수남 여행작가

병천 오일장은 역사에 기록된 오일장이다. 아우내장으로 통했던 191941일 장날에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바로 유관순이 주도한 아우내만세운동이다. 아우내만세운동만 해도 백 년이 넘었는데 일부에서는 병천시장의 역사를 300년 정도로 잡고 있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시장의 물건들도 없는 것 빼곤 다 있다. 시장 중심에서 조금 외진 버스 정류장 쪽에 장식용 풍물을 펼쳐놓은 상인이 보인다. 한눈에도 값비싸 보이는 동제품들과 거실 장식장에 두면 빛이 날 것 같은 장식품들이 맨바닥에 놓여있다. 공급은 소비 따라 움직이니 주변에 큰 도시들이 있어서 장식품을 구입할 만한 여유 있는 손님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로변을 따라 걸으니 그 옆에는 농기구 좌판이 있다. 대규모 기계식 영농보다는 소규모 농사에 쓰이는 농기구들이다. 도시와 가깝거나 도시 속의 농업은 대체로 고부가가치 작물을 재배하거나 취미 수준의 소규모 농업이 많다. 땅값이 비싸서 경제성이 안 맞기 때문이다. 도농복합시의 특징을 오일장 좌판에서도 읽을 수 있다.

말하는 앵무새 앞에서 혼이 빠진 듯한 두 어린이. 사진 / 김수남 여행작가
말하는 앵무새 앞에서 혼이 빠진 듯한 두 어린이. 사진 / 김수남 여행작가
고소한 콩고물에 묻힌 인절미도 인기 간식이다. 사진 / 김수남 여행작가
고소한 콩고물에 묻힌 인절미도 인기 간식이다. 사진 / 김수남 여행작가
한번에 삼키기 어렵다는 맛있고 귀한 새조개를 건조해서 판다. 사진 / 김수남 여행작가
한번에 삼키기 어렵다는 맛있고 귀한 새조개를 건조해서 판다. 사진 / 김수남 여행작가

천안은 인구에 비해 대형 유통업체가 많다는 이야기가 있다. 역시 그만큼 소비력이 있다는 이야기다. 대형마트에서나 살 법한 침구류나 세련된 의류를 파는 가게도 여럿 보인다. 어느 천막 아래에서 옷을 고르는 50대 후반의 여성은 옷이 이뻐서 자주 구입한다며 영업사원으로 오해받을 만한 말을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장날 파는 저렴한 물건 같지 않아 보인다. 시장이 크고 소비자들의 안목이 높다 보니 상인들이 내놓는 상품들의 수준 또한 높다.

골목에서 반가운 상인을 만났다. 나이 지긋한 노인이 웅크리고 앉아 손으로 도장을 파고 있는 게 아닌가. 이제는 사라진 모습인 줄 알았는데! 도장을 업으로 삼아온 지 오십 년 가까이 되었다는 장봉순(75) 씨는 컴퓨터가 도장 파는 시대에도 아날로그 창작을 고집하는, 어쩌면 이 시대 마지막 도장 분야 아티스트일 것이다.

주거지는 청주이지만 병천장과 더불어 진천장, 조치원장, 신탄진장 등으로 영업을 나선다고 한다. 요즘 대세가 된 컴퓨터 도장은 프로그램과 장비만 있으면 누구나 똑같이 팔 수 있지만 손으로 파는 도장은 파는 사람에 따라, 같은 사람이 파더라도 팔 때마다 모양이 다르게 나오므로 모방이 어렵다.

병천은 오이도 유명하다. 사진 / 김수남 여행작가
병천은 오이도 유명하다. 사진 / 김수남 여행작가
능숙하게 도장을 파는 정봉순 씨. 사진 / 김수남 여행작가
능숙하게 도장을 파는 정봉순 씨. 사진 / 김수남 여행작가

처음 기술을 배운 건 20대 초반이었단다. 무작정 상경하여 노바위(노점상)가 많던 염춘교(염천교)에서 도장을 배우기 시작했다. 한때는 가게도 하고 전국의 행사장을 찾아다니기도 했는데 지금은 근처 오일장만 다니고 있단다.

어릴 적 한문을 좀 배웠으니 했지 한문 모르면 못해. 예전엔 다 한문으로 팠잖아. 세상에 하나뿐인 도장이지만 컴퓨터 도장보다 (품삯은) 싸게 받아!”

GPT 같은 인공지능이 나온 세상, 사람들의 일자리가 빠르게 없어지는 세상이다 보니 핸드메이드, 아날로그 감성이 더욱 그리워진다.

상전벽해가 된 병천 순대거리
병천의 명성답게 시장에서도 소박한 순대를 맛볼 수 있지만 그러기엔 소재지를 점령하고 있는 스무 곳 가까운 순대전문점들이 너무나 유혹적이다. 몇몇 집들은 화려하고 큼직한 건물을 갖고 있는데 그만큼 손님들의 차량이 많이 몰려있다. 또 어떤 집은 SNS에 맛집으로 소문났는지 작은 규모임에도 긴 대기줄이 늘어서 있다.

병천 오일장에서 순대의 인기는 대단하다. 사진 / 김수남 여행작가
병천 오일장에서 순대의 인기는 대단하다. 사진 / 김수남 여행작가
병천순대는 소창을 재료로 쓰며 양배추와 다양한 채소를 곱게 갈아 넣는다. 사진 / 김수남 여행작가
병천순대는 소창을 재료로 쓰며 양배추와 다양한 채소를 곱게 갈아 넣는다. 사진 / 김수남 여행작가

병천이 순대로 유명하게 된 건 1960년대 지역에 들어선 육가공업체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다. 북부지방의 순대와 달리 병천은 소창을 재료로 쓰는데 피순대를 기본으로 하고 양배추를 비롯한 다양한 채소를 곱게 갈아서 넣는다. 워낙 많은 업소가 있으니 집집마다 만드는 방법과 맛이 조금씩 다르다. 현지인들조차 손꼽는 맛집이 서로 다르다. 병천의 상권이 커지자 병천순대와 더불어 천안을 대표하는 맛인 호두과자를 취급하는 전문점도 병천에 앞다퉈 들어섰다.

오늘날 병천의 경기를 견인하고 있는 건 순대가 맞다. 하지만 오늘을 있게 만든, 이곳에서 스러져 간 많은 민초들의 피와 땀을 잊어선 안 될 일이다. 병천 순대거리에서 불과 1km 떨어진 매봉산 자락에 유관순열사유적지가 조성되어 있다. 당시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이었던 유관순은 191931일에 열린 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 학교휴교령이 떨어지자 고향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41일 아우내장터에서 열린 만세운동에 다시 참여하였는데 부모는 일본 경찰에 살해되고 유관순은 체포되어 고문 후유증 끝에 옥중에서 향년 17세로 생을 마치게 된다.

매봉산 뒤쪽에는 유관순열사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생가 옆에는 유관순이 다녔던 매봉교회가 함께 복원되어 있는데 찾는 이가 많지 않아 아쉬움이 든다.

유관순 열사 생가의 모습. 사진 / 김수남 여행작가
유관순 열사 생가의 모습. 사진 / 김수남 여행작가
유관순의 고장 병천. 사진 / 김수남 여행작가
유관순의 고장 병천. 사진 / 김수남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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