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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교과서 밖에서 만나는 백제①] 백마강 따라 떠나는 부여
[교과서 밖에서 만나는 백제①] 백마강 따라 떠나는 부여
  • 김연미 기자
  • 승인 2004.10.0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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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밤이 되면 의자왕이 용이되어 백마강을 지키기 위해 안개를 피운다는 전설이 내려오던 금강. 2004년 10월. 사진 / 김연미 기자
밤이 되면 의자왕이 용이되어 백마강을 지키기 위해 안개를 피운다는 전설이 내려오던 금강. 2004년 10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여행스케치=전북] 금강은 전북 장수군 신무산 뜬봉샘이 발원지다. 진안, 무주를 휘감고 돌아서 충북 금산을 들러 영동, 옥천을 지난다. 대청댐에서 쉬고 다시 공주 곰나루 지나 부여에 닿는다. 금강은 부여 낙화암에서 ‘백마강’이란 이름을 얻는다.

천오백년전, 별로 오랜 세월도 아니다. 그러나 백제는 없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 유적지 안내판이 붙어있는 곳이 부여다. 그때서야 주위를 유심히 살펴보면 기와 파편들이 널브러져있다. 아마 부여를 한 시간쯤 거닐어보면 느끼리라. 특별한 유적지도 없는데 백제의 왕도를 걷고 있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부여 땅 아무 곳을 파 보아도 뭔가 나올 것 같은 기운. 칡을 캐던 초등학생이 1천2백50년 동안 묻혀있던 검게 탄 보리 등을 발견하는 곳. 버려진 땅에서 뭔가 찾을 것 같은, 보물찾기를 위해서 보물을 숨겨놓은 왕국을 거니는 듯 하다.

부여는 백제가 공주에서 천도한 5백38년부터 나당연합군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전까지 6대 1백23년간 백제의 왕도였다. 부소산은 부여의 진산이다. 해발 1백m정도 밖에 안되는 구릉으로 낙화암, 부소산성, 고란사 등 백제를 가깝게 느낄 수 있는 유적지가 많이 있다. 보슬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부소산 단풍은 다른 단풍나무에 비해 늦게 물든다고 한다. 부소산은 비가 내리는 해질 무렵이 가장 좋다고 한다.

삼충사. 성충, 흥수, 계백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2004년 10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삼충사. 성충, 흥수, 계백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2004년 10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스러져간 백제의 비운을 가장 실감할 수 있어서 그럴까. 그리보면 착 달라붙는 백제 유적지는 없어도, 은근히 사람의 마음을 흔든다. 부소산성은 왕성의 방위시설이었다. 북으로 강을 두르고 있어서 북쪽에서 내려오는 고구려군사를 방어하기에 알맞다. 평소에는 궁궐의 후원으로 사용했다고 하니 일석이조인 셈이다. 길이 2.5㎞. 부소산을 거니는 내내 부소산성의 흔적을 보지 못했다. 흙을 다져서 나지막한 토성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찾기가 어렵다.

부소산성에는 4개의 문이 있었다고 한다. 구드래나룻터로 들어오는 문은 특수계층인 왕족이나 귀족이 사용했던 문이다. 삼충사 뒤편으로 문이 있었는데 백제시대 부소산성의 정문으로 추정하고 있다. 군창지에 있는 문은 가파르다. 나중에 군창지를 만들 때 만든 게 아닐까 생각된다. 북문은 궁녀사당 쪽에 수문이 있었다고 한다. 매표소 사비문을 지나서 삼충사로 들어섰다. 3충신인 성충, 흥수, 계백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각기 개성을 가진 초상화가 모셔져있다.  

성충과 흥수는 백제 의자왕 때 충신이다. 의자왕이 신라와의 싸움에서 연승을 하자 자만과 주색에 빠진다. 싸움에서 이겼지만 여전히 백제는 고구려와 신라 두 나라 사이에서 불안한 위치였다. 성충과 흥수는 왕에게 간곡하게 충언을 드린다. 하지만 의자왕의 귀는 총기를 잃었는지 성충은 투옥하고 흥수는 멀리 유배를 보낸다. 성충은 단식으로 죽음에 임박해서 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낙화암 백화정. 2004년 10월. 사진 / 김연미 기자
낙화암 백화정. 2004년 10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적군이 쳐들어오면 육로로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에 못 들어오게 막아야합니다. 험한 지형에 의지해서 싸워야합니다.’ 흥수 또한 비슷한 계책을 알려주었으나 이미 왕성은 아첨쟁이 귀족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결국 백제는 망했다. 삼천궁녀가 낙화암에 꽃잎처럼 떨어지듯 사라지고 만다.

삼충사에서 5분 정도 올라가면 영일루다. 백제왕과 귀족들이 멀리 계룡산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며 국정을 논했다고 전해지지만 이 누각은 1964년 조선시대 홍산관아를 옮겨온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영월대’로 기록되어 있으나 ‘달을 보내는 곳, 송월대’와 대비시켜서 ‘해를 맞는 곳, 영일루’라고 했단다.

부여를 여행하다보면 이런 곳이 참 많다. 분명 어느 문헌상에는 백제의 무엇이 있었을 터있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없어졌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와 비교해보면 참 허망하고 쓸쓸한 일이다.

금강 풍경. 2004년 10월. 사진 / 김연미 기자
금강 풍경. 2004년 10월. 사진 / 김연미 기자

‘백마강’이라는 이름도 생각해 보자. 낙화암 밑 유람선 선착장 상류쪽에 보면 바위섬 조룡대가 있다. 백제시대에는 용암, 임금 바위라고도 불렀다. 근데 백제가 망하고 나서 이 바위는 조룡대라고 부른다. 즉 용을 낚은 바위다. 신라와 손을 잡고 백제를 치러온 당나라 군사들이 금강을 건너려고 하면 맑았던 날씨가 갑자기 안개가 걷잡을 수 없이 자욱하게 낀다. 도무지 건널 수가 없는 날이 계속되자 지휘장군 소정방이 용한 도사를 잡아서 그 까닭을 물었다.

그랬더니 의자왕이 밤에는 용이 되어 백마강을 지키려고 안개를 피운다는 것이다. 이 말에 소정방은 바로 바위에 앉아 백마의 머리를 미끼로 삼아 낚시를 드리워서 용을 낚았다. 운무는 말끔히 걷히고 당나라 군사는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그래 그 바위는 조룡대라 하고 강은 백마강이라 부른다. 역사에 만약이란 있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만약에 백제가 망하지 않았다면 이런 이야기는 있을 수 없다. 조룡대는 왕의 바위로 불리고, 백마강은 용강이 되지 않았을까? 결국 역사는 승자의 것이다.

부소사 산책로. 2004년 10월. 사진 / 김연미 기자
부소사 산책로. 2004년 10월. 사진 / 김연미 기자

영일루에서 10여분 정도 걸어가면 잔디가 깔려있는 평지가 보인다. 군창지다. 이 곳에서 불에 탄 쌀이 발견되었다. 군대 곡식을 보관했던 창고다. 군량미를 뺏기지 않으려고 일부러 불을 지르지 않았나 추측한다. 군창지 앞 가게에서 유리병에 담아둔 탄 쌀을 볼 수가 있다. 꼭 곡식 모양을 한 까만 돌 같다. 군창지 옆으로 수혈병영지가 보인다. 백제 군인의 움집이라고 해서 그 자리에 복원을 해 놓았다. 부여관광 안내소 최미선 씨는 백제 군인의 움집이라기보다 산성을 축성할 때 만든 움집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부소산에서 역시 가장 인기 있는 곳은 낙화암이다. 백마강 줄기가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곳. 백마강 건너편이 아스라하게 피어오른다. 지금도 이리 멀어 보이니 그 당시는 얼마나 멀게 느껴졌을까? 이쯤의 거리면 ‘로미오와 줄리엣’ 비스무레한 이야기가 나올 것도 같은데…. <삼국유사>에는 김춘추 편에 남부여 이야기가 나오는데, 낙화암이 ‘타암사’로 적혀있다.

‘의자왕이 후궁들과 더불어 스스로 자결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로 이 곳에 몸을 던져 죽었다’하여 타암사. 현종 때부터 ‘낙화암’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의자왕은 중국 낙양에서 죽었다고 하는 설도 있다. 사실 낙화암의 위치를 보아서 여흥을 즐기는 곳이 아니었을까? 백마강을 조망하기 좋은 자리다. 술 한잔에 시 한 술이 절로 나온다. 아마 낙화암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아름다워서 그러리라.

관광객이 삼천궁녀의 죽음을 가볍게 생각하는 듯 보였는지, 최미선 씨가 덧붙인다. “삼천궁녀의 죽음은 바로 계백이 전쟁터로 가기 전 자식을 죽이고 나가는 심정과 같은 게 아닐까요?” 고개가 끄덕여진다.

고란 약숫물. 2004년 10월. 사진 / 김연미 기자
고란 약숫물. 2004년 10월. 사진 / 김연미 기자
고란사. 2004년 10월. 사진 / 김연미 기자
고란사. 2004년 10월. 사진 / 김연미 기자

백마강은 백화정에서 바라보는 것보다 백화정 아래 철조망 앞 바위에서 바라보는 백마강이 아름답다. 낙화암 아래 백마강가 절벽에 자리한 고란사로 내려갔다. 고란사는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은 백제 여인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 고려시대 지었다고 한다. 고란사는 약수가 유명하다. 한번 마시면 3년은 젊어진다고 한다. 절 뒤편으로 가서 우선 약수부터 마셨다. 고란초 잎은 없으니, 물에 띄울 수는 없고, 약을 먹듯이 천천히 마셨다. 3년이라?

절과 약수터 사이에 커다란 너럭바위가 있다. 사실 고란사는 백제 왕실의 연회장이였다고 한다. 지형 구조상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고 하니 백성들의 원망을 살 필요도 없다. 술을 많이 마셔도 위장병을 고쳐주는 약수가 바로 옆에 있으니 금상첨화가 따로 없다. 고란사는 ‘임금이 내려왔다’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한다. 전쟁에서 이기고 와서 왕과 신하를 구분하지 않고 먹고 놀았다 하여 고란사란다.

법당에는 특이하게 하얀 보살이 모셔져 있다. 죽은 원혼들을 달래듯…. 고란사 밑에는 유람선이 있다. 부소산을 돌아보고 유람선을 탔다. 여전히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낙화암이 젖는다. 백마강이 흙탕물이다. 백제의 역사를 싣고 다시 천년의 세월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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