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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신라천년의 힘] 하남 이성산성에 서린 긴장감
[신라천년의 힘] 하남 이성산성에 서린 긴장감
  • 황수현·우정아 인턴기자
  • 승인 2005.07.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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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한강을 굽어보며 천하를 다투다
[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12각 건물지. 출입구도 온돌도 없는 불가사의한 건물이다. 2005년 7월. 사진 / 황수현 인턴기자
12각 건물지. 출입구도 온돌도 없는 불가사의한 건물이다. 2005년 7월. 사진 / 황수현 인턴기자

[여행스케치=하남] 백제의 향내가 가득한 하남의 중심에서 요술 상자처럼 신라 유물만 연거푸 토해낸다. 11차에 걸친 기나긴 발굴 작업이 진행될 때마다 새로운 유물로 무장하면서 사람들을 바짝 긴장시키는 매력적인 산성, 푹 빠져들 것 같다.

하남 행 버스 안. 무수한 환희와 눈물의 사연들이 돌담마다 서려 있는 곳으로, 천년 전의 속삭임을 들으러 이성산성으로 향한다. 이성산성을 중심으로 5km 떨어진 지점에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그리고 남한산성이 버티고 서 있고 멀리 한강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예사롭지 않은 위치다. 지난 86년 한양대 박물관 팀과 하남시가 이성산성을 발굴하기 시작한 것은 백제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신라가 차려 놓은 진수성찬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토기와 철제마, 그리고 기와를 비롯한 3천여점의 신라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성산성에서 출토된 기와 조각들. 신라의 전성기를 그리워하듯 화려한 문양이다. 2005년 7월. 사진 / 황수현 인턴기자
이성산성에서 출토된 기와 조각들. 신라의 전성기를 그리워하듯 화려한 문양이다. 2005년 7월. 사진 / 황수현 인턴기자

이 때문에 현재 신라의 산성으로 소개되고 있다. 하지만 삼국 세력다툼의 정점이었던 한강 유역에서 발굴된 유적이라, 신라 산성이냐 백제 산성이냐를 놓고 이견이 분분하다. 해발 209m의 낮은 산이라 쉬이 여겼는데 산성은 산성이다.

숨이 헉헉 찬다. ‘이성산성 가는 길’이라는 푯말을 지나 10분 정도 오르니 먼발치 내리막길에 옥수수 알갱이를 박아 놓은 듯한 2차 성벽이 눈에 들어온다. 동글동글하게 다듬은 화강편마암이 고른 치아 가지런하게 줄맞춰 서서 낯선 손님에게 씩 웃는다.

이성산성 모습. 2005년 7월. 사진 / 우정아 인턴기자
이성산성 모습. 2005년 7월. 사진 / 우정아 인턴기자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지만 신라시대 전쟁 때 쓰인 강돌이다. 2005년 7월. 사진 / 황수현 인턴기자
그자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라고 지나갈 수도 있지만 신라시대 전쟁 때 쓰인 강돌이다. 2005년 7월. 사진 / 황수현 인턴기자

무너질까봐 잔디로 덮어놓은 성벽 위로 나지막한 1차 성벽과 A지구 저수지가 있다. 군사들의 용수로 쓰였다는 저수지는 바닥이 거의 보일 정도로 얕고 갈대가 무성하게 자라있다. 그 아래 개흙층에서 깊은 잠을 자던 팽이와 빗을 비롯한 목재유구가 출토되었다.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 하나도 동그랗게 깎인 것이 전쟁 때 쓰였던 강돌이고 산성의 파편이다. 이런 유물은 그 자리에 있음으로서 가치가 있다. C지구 저수지를 지나니 하남시가 한눈에 들어오는 이성산 정상. 70~80평 정도의 직사각형 건물터와 8·9각 건물터만 남아 있다.

하남역사박물관에 있는 이성산성 조형도. 2005년 7월. 사진 / 우정아 인턴기자
하남역사박물관에 있는 이성산성 조형도. 2005년 7월. 사진 / 우정아 인턴기자

 

사라진 건물 위에 실제로 오를 수 있다면 한강 저 멀리까지 보이리라. 삼국의 치열한 한강 유역 쟁탈전의 와중에 이성산 정상에서 한강을 내려다본 당시 사람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갈라진 나라를 하나로 합치고 마침내 외세인 당나라를 몰아낸 신라의 저력은 결국 삼국 통일을 염원하는 민족의 고요한 기도에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산 길. 성벽의 졸망졸망한 돌이 가슴 속에 꽉 들어찬 것 같다.

이 단아하면서 웅장한 산성은 묘하게 사람을 끄는 힘이 있어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한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백제의 유적이 가득한 곳에 우뚝 선 신라 산성의 모습. 1천 5백여년 전 한강 쟁탈전의 치열한 긴장감이 아직도 남아있는 듯 묘한 기분에 휩싸인다.

Info 가는 길
서울 지하철 2호선 잠실역 7번 출구 -> 하남행 시외버스 30-5번 -> 이성산성 입구 하차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2005년 7월. 사진 / 황수현 인턴기자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2005년 7월. 사진 / 황수현 인턴기자

Tip.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신라 제24대 진흥왕(540~576년)은 확장된 영토를 순행하면서 이를 기념하고 나라의 경계를 확정하기 위해 순수비를 세웠다. 현재 순수비는 경남 창녕척경비, 함경도 지방의 마운령순수비과 황초령순수비, 그리고 북한산순수비로 모두 4기가 남아있다.

북한산 비봉에 세워진 북한산순수비는 6세기 신라가 한강 유역으로 진출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 비봉의 큰 바위 정상부를 파내어 비석의 받침을 만들고, 화강암으로 비신을 세웠다. 비신에는 진흥왕의 민정 시찰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신라 멸망 이후 잊혀졌다가 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에 의해 신라시대 비석임이 밝혀졌다. 1972년 경복궁으로 옮겨졌고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었다. 현재 비봉 정상에 서있는 비석은 실물을 그대로 본떠 세운 유지비(遺址碑)이다. 신라시대의 실물을 만나려면 박물관이 개관하는 9월까지 기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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