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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전설따라 삼천리] 헌 것이 주는 위안 서울 신촌 헌책방 여행
[전설따라 삼천리] 헌 것이 주는 위안 서울 신촌 헌책방 여행
  • 전설 기자
  • 승인 2015.09.0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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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5년 10월 사진 / 전설 기자
2015년 10월 사진 / 전설 기자

[여행스케치=서울] 헌것보다 새것이 좋은 건 당연하지만, 가끔은 낡고 닳은 묵은 것에 위로 받는 날이 있다. 이를테면 근사한 레스토랑 보다 낯익은 백반집, 새로 생긴 카페보다 오래된 찻집, 비닐을 덧씌운 신간이 가지런히 진열된 서점보다 빛바랜 헌책이 산처럼 쌓여 있는 헌책방 같은. 헌것이 주는 위안에 마음 놓이는 그런 날이 있다. 

찻길 양옆으로 고만고만한 건물이 줄을 서 있던 1990년대 고대 앞 사거리엔 세상의 모든 책을 쌓아둔 것 같은 ‘새한서점’이 있었다. 1층부터 2층까지 온통 책뿐인지라 빛바랜 고전문학, 벽돌보다 두꺼운 양장본 전집, 한질로 묶인 책 묶음을 지날 땐 늘 눅눅한 단내가 끼치곤 했다. 독후감 쓰기 숙제 할 책을 사러 헌책방에 가는 날에는 전공서를 옆구리에 낀 대학생 언니 오빠를 따라 이 책 저 책 뽑아들고 나는 언제 커서 저런 어른이 되나, 적잖이 고민했더랬다.

그렇게 등하굣길에 수시로 지나치던 헌책방이 임대료에 쫓겨 충북 단양으로 이사를 갔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대학생이 되고도 한참 후에 일. 새한서점은 떠났지만, 나는 헌책방이 있던 풍경을 기억한다. 퇴근길이나 일요일 오후 문득문득 그날의 풍경이나 냄새가 그리운 날엔 신촌으로 나선다. 기억 속 헌책방과 꼭 닮은 ‘공씨책방’, ‘글벗서점’, ‘숨어있는 책’, ‘정은서점’이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 사이사이 인디출판물을 판매하는 독립 서점과 쉬었다 가기 좋은 북카페도 여럿이라 가볍게 나선 신촌 산책은 늘 헌책방과 독립 서점을 들렀다가 북카페에 들어가 충동 구매한 책을 펼쳐보는 ‘책 여행’으로 끝을 맺는다.

2015년 10월 사진 / 전설 기자
 무너지지 않는 ‘책의 탑’이 쌓여 있는 ‘공씨책방’ 풍경. 2015년 10월 사진 / 전설 기자

치열하고 진지했던 나날, 공씨책방
신촌은 연대·서강대·이대·홍대가 밀집된 대학촌이다. 때문에 새 학기가 시작되면 자연스레 신촌 일대의 헌책방마다 책값을 아끼려는 후배와 헌 전공서를 내놓는 선배가 모여들었다. 그중 1972년 문을 연 ‘공씨책방’은 역사·경제·사회 등 인문학 관련 전문서적을 보유한 ‘헌책방의 전설’과도 같은 곳. 남재희 전 장관, 박상률 소설가 등 정?재계인사에게 ‘공씨 아저씨’로 통하던 故공진석 옹이 평생을 쓸고 닦은 고서점을 그의 조카 장화민 씨가 지키고 있다.

2015년 10월 사진 / 전설 기자
 리영희 <전환시대의 논리>. 깨알 같은 글씨 아래 밑줄이 촘촘하다. 2015년 10월 사진 / 전설 기자

“지금이야 책 읽는다고 나무라는 이 없지만, 예전에는 책 읽다 잡혀가기도 했어요. 칼 막스의 <자본론>이나 리영희 <전환시대의 논리> 같은 진보경제학 서적은 가지고만 있어도 불온분자로 몰리는 대표적인 금서(禁書)였죠. 그래도 그땐 학생들이 배우고자하는 열망이 강할 때라 외국 한 번 나가면 암파(岩波, 일본의 진보성향 출판사)의 뽀시(문고판, 포켓형 소형 서적)같은 것을 들여와 저들끼리 몰래 돌려 보곤 했어요. 참 진지하고 치열했던 시대죠.”

2015년 10월 사진 / 전설 기자
돌고 돌아 다시 헌책방으로 돌아오는 책과 LP판. 2015년 10월 사진 / 전설 기자
2015년 10월 사진 / 전설 기자
 손때 묻은 사다리, 덜덜덜 선풍기까지 옛 동네 헌책방 풍경과 똑 닮았다. 2015년 10월 사진 / 전설 기자

영화 <변호인>에서 삼삼모여 책을 읽던 독서동아리 학생들이 반정부단체로 몰려 모진 고문을 당했던 장면이 떠오른다. 영화 속 불온서적으로 분류되던 금서 중 한권을 꺼내 슬쩍 펼쳐보는데 한글이 반, 한문이 반. 그 아래 새까맣게 밑줄이 그어져 있다. 행여 끌려갈까봐 바지 뒤춤에 숨기고 다니면서도 책을 놓지 않았던 그 시대의 지성을 엿본다. 그 옆으로 한때 지식의 상징이었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비롯한 양장본 전집이 쌓여 있다. 또 뭐가 있나 훑어보다가 화들짝. 에이브 동화전집 시리즈 중 제12권 <어머니는 마녀가 아니에요>가 눈에 들어온다. 헌책방 갈 적마다 찾아 헤매던 책 중 하나를 건지다니 이런 횡재가! 혹시나 찾던 책이 더 나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본격적인 보물찾기에 나선다. 절판돼서 구하기 힘든 희귀본이나 초판본을 건졌을 때의 쾌감, 이게 바로 헌책방 찾는 재미 아니겠는가.

2015년 10월 사진 / 전설 기자
2015년 10월 사진 / 전설 기자

‘공씨책방’에서 산 책
에이브시리즈 <어머니는 마녀가 아니에요> 외 4권. 각 2000원.
오태환 시집 <복사꽃, 천지간의 우수리>. 3500원.
주소 서울시 서대문구 신촌로 51 

2015년 10월 사진 / 전설 기자
1·2층 까지 50만여 권의 책으로 가득한 ‘헌책방 끝판왕’ 글벗서점. 2015년 10월 사진 / 전설 기자

청계천 발 ‘헌책방 통신’
80년대부터 홍대 앞을 지키다 2000년 신촌으로 자리를 옮긴 ‘글벗서점’은 한마디로 ‘헌책방 의 끝판왕’이다. 널찍한 1·2층 건물에 고전, 예술, 문학, 사회, 역사는 물론이고 중고등 참고서부터 만화책까지 장르를 불문한 책이 약 50만권 쌓여 있다. 거의 모든 분야의 책을 만날 수 있어 학생부터 주부까지 직업도 연령도 다른 손님이 헌책방을 찾는다. 그중에는 동국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 재학 중인 이민영 씨처럼 특별한 추억을 남기는 이도 있다.

2015년 10월 사진 / 전설 기자
“99년 4월 17일 교보.” 전주인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도 중고책 고르는 재미. 2015년 10월 사진 / 전설 기자

“허연 시인의 <불온한 검은피>라는 시집을 여기서 찾았어요. ‘세계사’에서 1995년에 나온 시집인데 출판사가 사라져서 정말 구하기 힘들거든요. 저도, 같이 있던 친구도 깜짝 놀랐죠. 더 놀란 건 펼쳐보는데 시인의 자필이 남아 있는 거예요. ‘2006年 9月 허연 드림’이라고….”

2015년 10월 사진 / 전설 기자
 ‘글벗서점’으로 어른, 아이, 학생, 주부의 발걸음이 이어진다. 2015년 10월 사진 / 전설 기자

시인의 자필이 적힌 시집이 무슨 사연으로 헌책방에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건 책을 오래 아끼고 읽어줄 새 주인을 만났다는 것. “헌책방에 오면 왜 손에 책을 들고도 자꾸 다른 책을 찾아보게 되는지 모르겠어요.” 눈이 아플 정도로 많은 시집 중 자기가 찾는 시집을 딱 딱 골라내는 눈썰미가 신통하다. 손님이 이 정도라면, 평생을 책과 함께 살아온 김현숙 사장이야 오죽하랴. “예전에는 형사가 불시에 금서 검문을 나왔어요. 일단 책방 많은 청계천부터 쭉 돌기 시작하는데 그럼 아는 책방에서 전화가 와요. ‘너네 무슨 무슨 책 있냐, 빨리 숨겨라. 형사 떴다.’ 그럼 후다닥 감추는 거예요. 그러니 자기 책방에 무슨 책이 있는지 알아야 살아남죠. 지금은 컴퓨터에 등록을 해서 그나마 쉬워졌지만 예전에는 일일이 기록하고 외우고 그랬어요.” 검문 나오는 날 울리던 ‘헌책방 통신’은 1980년대 5공화국 금서들이 해금되면서 점차 울리는 일이 없어지다가, 오늘날엔 서로의 안위를 묻는 안부전화로 바뀌었다. 이젠 읽지 마라 책 빼앗는 이도, 금서라고 숨어서 읽을 필요도 없는데, 어째 금지할 적보다 더 책을 팔리지 않아 문을 닫는 헌책방이 부쩍 늘었기 때문이다.

2015년 10월 사진 / 전설 기자
2015년 10월 사진 / 전설 기자

‘글벗서점’에서 산 책
우미노 치카 만화책 <스피카> 3000원.
장정일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 3000원.
주소 서울시 서대문구 신촌로 17 

2015년 10월 사진 / 전설 기자
 입구까지 책들이 마중을 나온 ‘숨어있는 책’ 입구. 2015년 10월 사진 / 전설 기자

책장에 숨어 있는 나를 만나다, ‘숨어 있는 책’
‘숨책’이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한 ‘숨어 있는 책’은 눈에 안 띄는 곳에 꽁꽁 숨겨 놓고 혼자만 드나들고 싶은 헌책방이다. 출판사 열화당·눈빛의 편집자 출신 노동환 대표가 그의 아내 이미경 씨와 함께 좋아하는 책 마음껏 읽고 싶어 만든 곳이라니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책방 구석구석에서 애서가의 마음을 홀랑 빼앗는 소소한 배려가 녹아 있다. <현대문학>, <문학사상>, <창작과 비평> 문집이 정리된 계단을 따라 문을 열면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들린다. 음량은 딱 독서에 방해되지 않을 정도. “가방은 문 옆 탁자나 가방장에 놓아 주십시오. 귀중품은 빼시고요.” 친절한 안내문대로 가방을 벗고 가벼운 몸으로 나선다. 노 대표가 매일같이 청계천이나 고물상을 직접 돌며 찾아낸 금쪽같은 책 4만 여권이 책장별로 분류돼 있다. 책장 과 책장 사이는 옆 사람 눈치 볼 필요 없을 만큼 널찍하고, 통로에는 아무 책이나 뽑아 들고 느긋하게 읽어 볼 수 있는 간이 의자가 놓여 있다. 단골손님은 이미 익숙한 듯 벽면에 비치된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을 뽑아들고 책장 사이로 사라진다.

2015년 10월 사진 / 전설 기자
 통로에는 오래 앉아 있다 갈 수 있는 간이 의자가 여러 개 놓여 있다. 2015년 10월 사진 / 전설 기자

“책방을 취미처럼 찾는 분들이 계세요.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올 때마다 몇 권씩 들여가는 분도 있죠. 그럼에도 책에 대한 애정이나 욕심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걸 느껴요. 책을 읽고 또 보여주는 사람으로서 속상한 건 여러 가지 이유로 수익이 줄어든다는 것보다, 사람들이 완독의 즐거움을 잊는다는 거죠. 책을 읽는 다는 게 첫 장부터 어떤 장면을 찾아가는 과정인데, 그 과정이 평생의 취미로 삼을 만큼 즐겁다는 걸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2015년 10월 사진 / 전설 기자
출판사 편집자 출신의 노동환 대표. 2015년 10월 사진 / 전설 기자

노 대표의 당부대로 오래 읽고 오래 간직하고 싶은 책을 찾아 책장 앞에 선다. 무작정 손가락 끝으로 책제목을 훑다가 이 책 저 책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읽고 있자니 어릴 적 동네 헌책방에서 어설피 흉내내던 어른이 됐다는 것이 새삼스러워 실실 웃음이 난다. 애초에 헌책을 들춰 본 다는 것은, 낱장 사이사이 켜켜이 묻어둔 추억을 들춰본다는 것 아니겠는가.

2015년 10월 사진 / 전설 기자
2015년 10월 사진 / 전설 기자

‘숨어있는 책’에서 산 책
김충원 <김충원의 아프리카에서의 30일> 3000원.
토베 케이코 만화책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2500원.
배창환 시선집 <서문시장 돼지고기 선술집> 3000원.
주소 서울시 마포구 신촌로 12길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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