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서울] 봉산산방(蓬蒜山房). 쑥(蓬)과 마늘(蒜)의 산 속 집. 시인이 직접 지은 이름이란다. 이곳에서 시인은 30년 동안 살면서 단군신화처럼 우리 겨레의 원형을 추구한 시를 지었다. 지금도 이곳에는 시인의 손때가 뭍은 지팡이 몇 개, 도자기 몇 점, 작은 탁자 위 난초를 볼 수 있다. 아침마다 거닐며 세계의 산 이름을 외웠다는 뜨락도 여전하다.
‘서정주’라는 이름 석자가 새겨진 문패 달린 대문을 지나니, 아담한 정원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미 져버린 꽃나무 뒤로 살아 생전 시인과 아내의 사진이 낯선 손님을 맞는다. 그 옆에는 ‘내 늙은 아내’라는 시 한 수.
“내 늙은 아내는 / 아침저녁으로 내 담배 재떨이를 / 부시어다 주는데, // 내가 / 야 이건 양귀비 얼굴보다 곱네, / 양귀비 얼굴엔 분때라도 묻었을 덴네? 하면, // 꼭 대여섯 살 먹은 계집아이처럼 / 좋아라고 소리쳐 웃는다. // 그래 나는 천국이나 극락에 가더라도 / 그녀와 함께 가볼 생각이다.”
이 집에서 시인은 1970년에서 2000년까지 살았다. 2000년 10월, 63년을 해로한 아내가 세상을 뜨자, 두 달 보름 뒤 눈이 많이 내린 성탄 전야에 미당도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86세 되는 해였다. 시인이 떠나고 11년이 되던 해, 그의 마지막 보금자리는 ‘미당 서정주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시인을 닮은 집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놨더니 / 동지 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창작의 산실’이란 작은 표지판을 달고 있는 시인의 방에는 평소 그가 사랑했다는 조선 백자 몇 점과, 작은 탁자 위 난초 화분 하나가 보였다. 미당 서정주의 집을 소개하는 안내 팸플릿 표지에는 미당의 ‘난초’라는 짧은 시가 인쇄되어 있다.
“하늘이 하도나 고요하시니 / 난초는 궁금해 꽃피는 거라.”
늙은 떠돌이의 여권
2층에 전시된 시인의 유품 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 중 하나는 그와 아내의 여권이다. 미당은 1970년대 중반부터 세계 여행을 다녔고, 이 집에서 <늙은 떠돌이의 시>라는 시집으로 묶어냈다. 여기에는 에베레스트에서부터 유럽과 남북아메리카, 아시아의 산까지 수십 편의 산 관련 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미당은 매일 아침 뜰에서 1,625개의 산 이름을 외웠단다. 기억력 감퇴를 막기 위해서였다는데, 세계 여행 중 만난 산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상기하는 시간도 되었을 터다.
“나 에베레스트를 비롯해서 / 히말라야 전산맥의 산들을 / 가는 떡가루처럼 두루 빻아 / 사억삼천이백만 년이 지날 때마다 / 그 가루 한 개씩을 헐고 가서 / 그걸 모다 뿌려 마신 시간의 길이도 / 그 역시 가한수(可限數)라 / 처음도 없고 끝도 없이 영원키만한 / 자기의 정신생명에 견줄 수는 없다고 / 또렷또렷 제자들을 타이르고 있던 / 네팔의 석가모니 / 그런 사내를 나는 아직도 더 본 일이 없다.” -‘어느 맑은 날에 에베레스트 산이 하신 이야기’ 중에서15분이면 휘리릭 둘러볼 수 있는 자그마한 이층집을 나오니 다시 정원이다. 미당 선생, 천국이나 극락에서도 아침마다 지상의 산 이름을 외우고 계시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