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인천] 100년이라는 세월 동안 인천 앞바다를 지나는 배들의 길잡이가 되어준 팔미도 등대. 지금은 퇴역해 새로운 등대에 그 임무를 넘겨주고 한가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자그마한 체구엔 여전히 이런저런 이야기가 남아 있다.
인천상륙작전의 주역
섬은 그런 곳이란다. 내가 가고 싶다고 갈 수도, 돌아오고 싶을 때 올 수도 없는 그런 곳이란다. 아무리 가까운 곳이라도 자연의 허락 없이는 접근이 불가능한 곳이 바로 섬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취재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겨우 세 번 일정이 변경되었을 뿐이니 그 정도면 양반이란다. 팔미도까지는 여객선이 다니지 않아 항로표지선을 타고 들어가야만 한다. 다행히 팔미도는 인천항으로 연결되는 항로 초입에 있어 3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다. 협수로임에도 불구하고 들고나는 배가 많아 2주에 2~3회 정도는 항로표지 관리를 위한 선박이 다녀야 한단다.
인성1호에서 보는 팔미도는 정말 그림 같다. 섬 자체로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그곳에 새하얀 등대까지 어우러져 있으니 왜 그토록 사람들이 팔미도를 칭찬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아름다운 경치 너머에는 별로 내세우고 싶지 않은 아픈 과거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자랑스러운 일화 등 여러 가지 모습이 교차한다.
먼저 100여 년 전에 우리나라에 등대가 처음 세워진 배경부터 얘기해보자. 19세기 후반 조선을 넘보던 열강들은 인천항의 개항을 요구했는데 그중에서도 일본의 요구가 가장 거셌다. 진작부터 조선 침탈 준비를 해오던 일본은 1901년 우리 정부와 체결한 ‘통상장정’ 중 ‘조선은 통상 체결 이후 각 항구를 수리하고 등대와 초표(물에 잠긴 바위에 설치하는 등표)를 설치한다’는 조항을 들어 등대를 세울 것을 강력히 요구했고, 결국 조선은 이에 못 이겨 1902년 인천에 해관등대국을 설치, 그해 5월부터 팔미도와 소월미도에 등대를 건설했다. 이듬해인 1903년 6월 1일 팔미도와 소월미도 등대에 불이 밝혀졌고, 이중 소월미도 등대는 1963년 12월 23일까지만 운영이 되어 현재 남아 있는 최초의 등대는 팔미도뿐이다.
일제시대를 거쳐 광복 후 팔미도 등대는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사건을 맞게 된다. 한국전쟁 당시 이 일대는 인천상륙작전의 중요 거점이었으나 극심한 간만의 차 등 여러 악조건 탓에 작전이 성공할 확률이 거의 없어 보였다. 그런데 영흥도를 중심으로 첩보활동을 하던 특공대원들이 1950년 9월 10일 밤 팔미도로 몰래 들어가 등대를 조사해보니 어찌된 영문인지 북한군이 등대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더라는 것이다. 반사경의 전선만 끊어졌을 뿐 사용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고 도쿄에 주둔해 있던 유엔군 총사령부에 ‘필요하다면 등대를 켜놓겠다’는 연락을 취했다.
9월 14일 19시, 맥아더 장군의 “9월 15일 0시 팔미도 등대 불을 밝히라”는 명령이 떨어졌는데 때마침 점등장치의 나사못이 빠져버려 점화불능 상태. 대장 최규봉이 어둠 속에서 바닥에 엎드려 찾다가 천우신조로 나사못을 발견하게 되었고 극적으로 팔미도 등대를 밝힐 수 있었다. 이로써 맥아더 장군은 인근에서 기다리고 있던 연합국 함대 261척에 진격 명령을 내렸고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끌면서 역사 속 한 페이지를 당당히 장식하게 되었다.
100주년 기념 사업으로 퇴역
팔미도(八尾島)는 위에서 내려다볼 때 여덟 팔(八)자처럼 보인다고 해 붙여진 이름. 등대와 사택이 모여 있는 반대편 섬을 소팔미도라 부르는데 바닷물 수위에 따라 자취를 감췄다 드러냈다 한다. 현재 팔미도 내에는 신·구 등대를 비롯해 항로표지원들이 거주하는 사택 그리고 해군 부대가 있다.
김종환 소장 부부를 비롯해 김은홍 차석과 이흥석 항로표지원이 팔미도 등대를 관리하고 있다. 이날은 이흥석 표지원의 안내로 팔미도 내에 남아 있는 옛 흔적을 둘러보았는데 아쉽게도 옛 등대와 사무실을 제외한 모든 유물은 포항의 등대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상태란다.
1호 등대와 새로 만든 등대는 붙어 있다시피 할 정도로 가까워 비교가 쉽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이 자그마한 등대를 사용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많은 선박이 들고나는 인천 앞바다를 비추는 등대치고는 너무 작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문이 닫혀 있지만 도움을 받아 등대 위까지 올라가볼 수 있었다. 사다리를 타고도 오를 수 있으니 사실 등대 꼭대기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높이다. 규모도 사람 둘이 겨우 서 있을 정도로 협소하다. 가장 중요한 등명기를 보여준다. 지금은 많이 희미해졌지만 ‘PARIS’라는 글자가 식별되어 프랑스제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몇 년간 거의 사용을 하지 않다 보니 빠르게 낡아가는 것 같단다. 게다가 이제는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로 등록이 되는 바람에 마음대로 다룰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흥석 표지원은 “현재 새 등대에서 사용하는 등명기는 700W 메탈전구로 30년 동안의 일출과 일몰 데이터가 모두 입력되어 자동으로 움직이는 반면, 퇴역 등대는 250W 할로겐 전구로 태엽을 감아 회전시켰을 정도로 두 등대는 나이만큼이나 기술력의 차이도 크다”고 전한다. 또 할로겐 전구인 까닭에 한낮에 너무 강한 빛을 받으면 화재가 날 수 있어 블라인드로 가려놓기도 하는 등 각별한 관리를 받았다고 한다.
새로운 등대가 불을 밝힌 것은 지난 2003년. 인천지방해양수산청이 한국 등대 100주년을 맞아 팔미도 등대를 퇴역시키고 첨단장비를 갖춘 ‘100주년 기념 등대’의 건립을 추진하면서부터이니 1903년 6월 1일부터 2003년 11월 30일까지가 1호 등대의 공식 활동 기간이다.
1호 등대와 함께 남아 있는 옛 건물은 구 등대사무소이다. 1962년까지 팔미도 등대사무소로 사용된 단층 건물로 1960년대 후반부터 해군 교회로 사용되어오다가 지난 2003년 새롭게 단장을 했다. 현재까지도 해군 교회로 사용되고 있다.
한국 등대 100주년 기념사업을 하며 팔미도의 모습이 다소 달라졌다고 한다. 길도 깨끗하게 정비되고 사택도 새롭게 지어졌고 또 몇 달 전에는 방파제를 만들어 보다 쉽게 배를 댈 수 있게 되었다. 머지않아 팔미도를 개방한다는 소리도 들린다. 교육적으로나 여행지로나 손색없는 곳이라는 생각은 해보지만 한편으로 걱정이 앞서는 것 또한 솔직한 심정. 지금까지 사람 손을 타지 않아 간신히 지켜오던 것들을 순식간에 잃지 않기를 하는 바람을 품어본다. 하루 동안이었지만 팔미도의 매력에 푹 빠져버린 한 사람의 기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