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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10월호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 "여행이라는 게 결국 시의 행간을 걷는 거죠." 고두현 시인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 "여행이라는 게 결국 시의 행간을 걷는 거죠." 고두현 시인
  • 김샛별 객원기자
  • 승인 2020.08.17 14: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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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를 노래한 시선집 ...'남해, 바다를 걷다' 펴내
고두현, "남해는 고향이자 문학적 모성의 원천"
최근 '남해, 바다를 걷다'를 펴낸 고두현 시인은 "남해를 아름답다고 하는데,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끼려면 느긋하게 앉아 시의 주인공처럼 느껴볼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겠죠"라고 말했다. 사진 / 김샛별 객원기자

[여행스케치=서울·남해] 우리가 아는 남해의 장면은 늘 같다. 다랭이논, 독일마을, 금산 보리암. 누군가는 바래길을 걸었을 테고, 누군가는 원예예술촌을 찾았을지 모르지만, 그나마도 별다르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남해, 바다를 걷다>를 펼쳐 보는 남해는 어떨까.
 
“저 바다 단풍 드는 거 보세요. (…) 남도에서 가장 빨리 가을이 닿는 삼십 리 해안 길”
“층층계단 다랭이논길 따라 앵강만 달빛이 흥건하게 우릴 적시던 그날 밤의 긴 여로처럼.”
“남해 독일마을에 가거든 (…) 탄가루에 박힌 별 같은 사연도 보고 오세요.”
“남해 금산 보리암 절벽에 빗금 치며 꽂히는 별빛” 
- 고두현 시인 <남해, 바다를 걷다> 중에서 

보리암에서 바라본 남해의 모습. 사진 / 조용식 기자

아무리 멋진 풍경도 ‘좋다’라는 단 두 글자의 감탄사로 대신하지 않고, 세심한 관찰력과 애정을 담은 상상력으로 남해를 보다 특별하게 만드는 사람, 고두현 시인을 만났다.

 그 사람의 이야기에 가만히 귀 기울이고 있노라면 어느새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의 눈으로 그곳을 바라보고 싶어서, 그곳의 풍경을 그처럼 담아내고 싶어서.

‘남해’라는 문학적 등기부 등본

Q. <유배시첩-남해 가는 길>로 등단해 남해에 관해 쓴 시를 묶은 시선집 <남해, 바다를 걷다>를 최근 내셨는데요.
남해는 제 고향이자 제 문학적 모성의 원천입니다. 하지만 서울에 나와보니까 그 맛을 더 잘 알았다고 할까요? 한 발 나와서 보니 더 잘 보이더군요. 어릴 땐 몰랐죠. 이렇게 웅숭깊은 맛을 지닌 곳일 줄.

Q. 남해가 웅숭깊다고 하셨는데, 그 맛을 좀 더 말해주신다면요.
제 두 번째 시집 제목이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 첫 시작이 이렇습니다. “저 바다 단풍 드는 거 보세요.” 굽이굽이 흔들리는 도로에 따라 펼쳐진 물미해안이야 국토부에서 선정한 ‘남해안 해안경관도로 15선’로 선정될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바다에 단풍이 들었다고 하면 다들 과장이 심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말 가을이 완연할 때 물미해안에 가보면 압니다. 반영이 비쳐서 단풍이 바다에 든 모습을 보면 비로소 몸으로 느끼죠. 

Q. 여행자로 그런 깊은 남해의 얼굴을 보기란 사실 어렵잖아요.
어렵죠. 사실 예전엔 내려간 김에 여수, 남해, 통영, 거제를 한 번에 훑으러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아주 짧게 머무는 거죠. 하지만 이제는 남해만 2박 3일로 가는 사람들도 많이 늘었습니다.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해를 아름답다고 하는데,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끼려면 느긋하게 앉아 시의 주인공처럼 느껴볼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겠죠. 물미해안의 경우 이전엔 마땅히 그럴 곳이 없었지만, 이제는 전망대도 생기고 데크도 생겼으니까 가서 가만히 앉아 노을 지는 것도 보면 저절로 그 깊숙한 곳에 가닿게 되는 거죠. 

남해 농가섬과 죽방렴, 그리고 섬과 섬을 잇는 창선교(빨간색의 다리)가 보인다. 사진 / 조용식 기자
남해 바래길을 걷는 바래꾼들.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죽방렴과 일몰이 연출하는 풍경. 사진 / 조용식 기자

Q. 자세히 보아야 더 예쁘다는 말이 생각나네요.
원래 그 사람을 좋아하면, 그 사람에게 더 가까이 가고 싶고, 손을 잡고 싶고, 안고 싶어지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동안 몰랐던 살결을 느끼게 되고, 그제야 그 향기롭고 사랑에 가득 찬 달큰한 느낌이 나는 체취도 느껴집니다. 그게 제가 생각하는 여행입니다. 그리고 특히 남해가 그렇죠. 시를 읽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여행이라는 게 결국 시의 행간을 걷는 거죠.

Q. 시의 행간이라는 말이 와닿는데요. 가이드북 대신 시집을 품고 떠나는 여행자라면 시인님처럼 여행하고 싶으실 것 같은데요. 그렇게 남해를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해진 일정에 따라 여행지만을 보고 오는 것과는 다르죠. 남해를 단지 여행지라고 생각하지 말고, 시공간을 걷는다고 생각해보세요. 제 시집을 예로 들자면, 제가 마치 서포 김만중 선생이 된 것처럼 쓴 시가 <유배시첩> 시리즈입니다. 과거의 시공간과 현재의 시공간이 입체적으로 만나 남해를 공감각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게 남해의 또 다른 매력입니다. 남해에서는 과거와 현재,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귀와 눈으로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매력이 많죠.

또 시집을 읽고 떠났다면 현장에서 그 시를 쓸 때의 느낌과 분위기, 무엇 때문에 그 문장에 끌렸는지 텍스트만 봤을 때랑은 완전히 다르게 그 느낌을 몸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게 시의 행간을 제대로 걸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남해 상주 은모래비치의 겨울 풍경. 사진 / 조용식 기자

Q. 어린 시절 추억이 묻어나는 남해의 이야기도 궁금한데요.
아무래도 시집은 제 몸에 새겨진 기억과 경험이 묻어나는 만큼 여행자가 보는 남해와는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상주은모래비치만 해도 고운 은가루를 뿌려 놓은 듯 부드러운 백사장과 맑은 바닷물이 매력적인 곳인데요, 제가 나온 상주 중학교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학교의 낮은 담과 백사장 사이에 선착장으로 가는 좁은 길 하나만 있어요. 운동장에서 조금만 세게 공을 차도 백사장으로 갈 정도죠. 중학교 1학년 땐 공 주우러 다니는 게 일이었습니다. (웃음) 여름방학 전 사흘 동안엔 ‘해양수업’이라는 이름으로 전교생이 해수욕장에서 놀곤 했었죠. 제겐 그런 기억이 남아 있는 곳입니다.

이뿐 아니라 금산에 있는 작은 암자에 얹혀살았던 기억, 20리(8km)나 되는 길을 매일같이 학교로 오갔던 기억도 제겐 모두 문학적 양분이 됐고, 고스란히 시에 나타나죠. 

Q. 남해로 떠나는 문학 기행도 많이 다녀오셨잖아요.
문학 기행은 신기하게도 떠났던 이들이 또다시 찾아오곤 합니다. 볼수록 안 보였던 것들이 보인다고 하대요. 저도 갈 때마다 그때그때 생각나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런 것도 같습니다. 지금은 코로나19로 문학기행을 멈췄지만, <이등병의 편지>를 작사‧작곡한 김현성씨와 함께한 ‘어머니와 시(詩)와 남해’ 콘서트도 기억이 남습니다.

그분이 고맙게도 제 시를 노래로 만들어 공연을 하는데요. 시와 노래를 남해의 풍경 속에서 같이 들으니 또 맛이 다르더라고요. 요즘은 여행도 테마로 하지 않습니까? 시면 시, 노래면 노래, 그렇게 함께한다면 이전에 남해에 왔더라도 새롭게 남해를 바라볼 수 있을 겁니다.

남해 섬이정원의 하늘연못정원의 모습. 사진 / 조용식 기자
남해 파독전시관과 광장. 사진 / 조용식 기자

Q. 남해에서 이곳은 꼭 보고 가면 좋겠다, 하는 곳도 있을까요?
남해야 다 아름답죠. 여름엔 아까 말한 것처럼 고운 은모래 펼쳐진 상주은모래비치나 송정, 설리해수욕장이 좋겠고, 10월의 물미해변은 단풍이 피어 있고요. 가을 풍경을 걸음걸음 곱씹을 수 있는 바래길을 걷는 맛도 있겠죠. 저는 창선면의 고사리밭도 참 좋아하는데요. 여기가 남해 바래길 7코스입니다. 고사리밭길을 걸을 때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따라 흔들리는 고사리들이 그렇게 또 아름답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숨은 여행지를 좋아하죠?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남해의 보석 같은 정원이 하나 있습니다. 섬이정원이에요. 다랭이논을 조금씩 조금씩 정원으로 가꾼 곳인데요, 다양한 꽃과 나무를 구경하는 것도 좋고 또 인생샷을 찍을 수 있는 곳도 있습니다. 남해(南海)와 산이 한꺼번에 보이는 곳에 연못 하나가 있는데, 연못에 하늘이 비치는 반영을 이용해 사진을 찍으러 요즘은 알음알음 많이들 찾는다고 하더군요. 

세계 최초 ‘문학의 섬’인 노도에 가보는 것도 좋고, 또 유명한 곳이라 해도 보기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죠. 가을엔 옥토버페스트를 여는 독일마을도 빼놓을 수 없을 텐데요. 축제도 좋지만, 그 안에 사무친 사연들을 하나하나 읽어보면 다를 겁니다.

제 시 중 <독일마을에 가거든>에도 적었지만(“새로 생긴 파독전시관서 앳된 처녀 여권 사진과 고국에 보낸 송금 영수증, 월급 명세서 손때 묻은 흑백 영상 보고 나면 눈물 쏟게 되지요”) 전 매번 가도 그 하나하나에 담긴 사연들을 보면 또 눈물이 시큰거립니다.

시집을 들고 떠나야 비로소 보이는 남해의 얼굴
시집 한 권을 들고 떠나는 여행은 우리가 해오던 여행과는 완벽하게 다르다. 한 군데라도 어딘가에 더 가는 대신 가만히 앉아 문장을 읽고, 풍경에서 문장을 캐올리는 일이다.

돌담을 쌓아 밀물과 썰물을 이용하여 고기를 잡는 남해의 석방렴. 사진 / 조용식 기자
고두현 시인은 "시집을 읽고 여행을 떠났다면 텍스트만 봤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을 몸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게 시의 행간을 제대로 걸었다고 할 수 있지요"라고 말했다. 사진 / 김샛별 객원기자

그저 문자로 적혀 있던 시 구절이 활자로 변하는 순간. 내비게이션이 아닌 영혼의 나침반을 들고 떠나는 여행이랄까. 아마 이전에 몇 번이나 남해에 갔더라도 고두현 시인의 시집과 함께 떠난 남해의 장면은 이전엔 본 적 없던 첫 번째 장면일 것이다.

시구절이 아니면 끝내 보이지 않았을 문장들. ‘저 바다 단풍 드는 거 보세요. 낮은 파도에도 멀미하는 노을’ 같은 문장들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시집을 읽기 전이라면 절대 상상할 수 없던 ‘바다가 품은 가을’이 말이다. 

 

INFO 남해, 바다를 걷다

고두현 시인의 시집에 수록된 작품 가운데 남해를 테마로 삼은 작품을 선별해 엮은 시 선으로 물결 낮은 은점마을, 남해 치자, 다랭이마을, 물미해안 등 남해가 쓰고 시인이 받아 적은 이 아름다운 시편들을 읽는 것만으로 남해 여행을 떠난 듯하다.
지은이 고두현
펴냄 민음사
가격 1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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