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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여전히 느릿하게 흘러가는 시간 담양 삼지내 마을
여전히 느릿하게 흘러가는 시간 담양 삼지내 마을
  • 정은주 여행작가
  • 승인 2022.07.14 08: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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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 삼지내 마을 산책.
담양 삼지내 마을 산책. 사진/ 김도형 사진작가

[여행스케치=담양]때 이른 무더위가 찾아든 날, 묵은 숙제와도 같았던 삼지내 마을을 다시 찾았다. 돌담이 이어진 골목과 맑은 물이 흐르는 도랑, 앞마당에 풀이 무성하게 자란 옛 가옥까지. 이곳은 여전히 달팽이처럼 느릿한 시간 속에 흘러가고 있었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슬로시티 포토존.
마을 입구에 세워진 슬로시티 포토존. 사진/ 김도형 사진작가

처음과 변함없는 삼지내 마을

주변이 너무 빠르게 흘러갈 때면 가끔씩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시간은 정말이지 ‘쏜살같이’ 흐른다. 그럴 때마다 담양의 삼지내 마을이 떠오른다. 옛 시간에 머물러 있던 오래된 고택 마을이 인상 깊게 남았기 때문이다. 문득 들여다본 달력의 날짜가 벌써 한 해의 절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언제 다시 가봐야지 하기를 몇 년, 더 미루다간 올해를 넘기겠다 싶어 주섬주섬 짐을 쌌다. 오랫동안 떠나 있던 고향을 찾아 나선 기분이 이러할까 싶다. 담양 창평면에 있는 삼지내 마을은 2007년에 완도 청산도, 신안 증도와 함께 아시아 최초로 슬로시티 인증을 받았다. 전국 곳곳에 슬로시티란 타이틀을 걸고 있는 지역들이 많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애초 취지에서 멀어진 곳들이 더러 있었기에 마음이 괜히 초조해졌다. 소위 여행지로 ‘떴다’하면 갖가지 관광시설이나 규모가 큰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 본래의 정취가 사라지기도 하던데 많이 달라져 있지는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마을 입구다. 휴우, 순간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마을 정경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이곳만큼은 여전히 ‘슬로시티’인 듯해서 말이다.

삼지내 마을로 이어진 길에 세워진 창평현문.
삼지내 마을로 이어진 길에 세워진 창평현문. 사진/ 김도형 사진작가

돌담길을 따라 느릿느릿 달팽이 산보

삼지내 마을은 멀리 보이는 월봉산과 국수봉이 감싸 안은 형태가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하다. 마을 형성의 역사는 백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조선 시대 사대부 양반가의 흔적이 남은 것이다. 마을 어귀에 펼쳐진 너른 논과 넉넉한 마당을 갖춘 기와집들은 이곳이 부농 마을이었음을 알려준다. 예부터 창평면은 담양의 곡창지대 역할을 해 온 곳으로 ‘삼지내(三支川)’라는 이름도 세 곳의 물길이 모인다는 뜻을 담고 있다. 논을 경작하기 위해서는 물이 필수인데, 비옥한 토지에 물까지 풍부하니 옛적에 이 고장이 얼마나 풍요로웠을지 짐작이 된다.

한가로운 마을 풍경.
한가로운 마을 풍경. 사진/ 김도형 사진작가

굽이굽이 이어진 돌담길을 따라 느릿느릿 달팽이 산보에 나섰다. 더운 날씨 탓인지 마을 안길이 한적하다. 오후의 햇살 아래 옛 담장길은 황톳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돌과 흙을 이용해 만든 토석담은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마을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문화유산이다. 어떤 담장은 돌과 흙을 번갈아 쌓아 가지런한 반면, 되는대로 막 쌓아 보이는 부분도 있다. 그럼에도 아래쪽에는 큰 돌을 놓고 위로 갈수록 작아지는 걸 보니 절대 허투루 쌓은 것이 아니다. 담장은 사생활 공간을 침범하지 않도록 높게 쌓여 있다. 상부에 단정히 올린 기와가 마치 마을의 품격을 말해주는 듯해 괜스레 발걸음에 무게가 실린다. 마을에는 전라남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전통 가옥들도 있다. 고재선, 고재환 가옥, 춘강 고정주 고택은 남도의 양반 가옥 특징을 잘 담고 있는, 보존가치가 높은 집들이다. 안가를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대문이 굳건히 닫혀 있는 통에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과거에는 가옥을 개방했지만 관광객들이 집 안을 훼손하는 일이 잦아 후손들이 문을 걸어 잠근 것이다.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다.

전라남도 민속문화재인 고재선 가옥.
전라남도 민속문화재인 고재선 가옥. 사진/ 김도형 사진작가
한옥 건물이 인상적인 창평 면사무소.
한옥 건물이 인상적인 창평 면사무소. 사진/ 김도형 사진작가

마을을 흐르는 맑은 도랑과 한옥 건물인 면사무소

발길 닿는 대로 느긋하게 걷고 있자니 시간마저 느리게 흐르는 것 같다. 호젓한 분위기에 마음도 느슨해지고 번잡하던 머릿속 생각들이 점점 비워진다. 덕지덕지 붙어 있던 짐들을 덜어냈더니 덩달아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느림보 걸음 속에 ‘느림’과 ‘비움’의 미덕이 천천히 스며들고 있었다. 시끌벅적한 도시의 소음 대신 ‘자박자박’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담장길을 채운다. 어디선가 도란거리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담장 아래 작은 도랑에 물이 흐르고 있다. 어릴 적 방학 때마다 찾았던 시골 할머니 집이 생각나 반가운 마음이 일었다. 예전엔 농촌 마을마다 이런 도랑들이 많았는데 1970년대에 벌어진 새마을 운동 이후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 됐다. 삼지내 마을도 당시 실개울이 메워졌지만 슬로시티로 지정되면서 물길을 복원해 지금까지 지켜나가고 있다. 도랑 옆을 따라 걸으니 돌돌거리는 맑은 물소리가 경쾌한 음악처럼 들린다. 자박자박, 돌돌돌… 정겨운 이중주가 끝날 때 즈음 창평 면사무소에 닿았다.

우람한 자태로 선 오래된 거목.
우람한 자태로 선 오래된 거목. 사진/ 김도형 사진작가

아름드리 느티나무 뒤로 서 있는 멋진 한옥 건물 한 채. 이렇게 근사한 면사무소라니! 두꺼비 석상 아래 ‘창평 면사무소’라 쓰인 표식이 없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2014년 건립된 건물 정면에는 면사무소라는 현판 대신에 ‘昌平縣廳’(창평현청)‘이라 쓰인 편액이 걸려 있다. 건물 밖에는 잘 가꿔진 정원도 있다. 정원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어 푸른 나무 그늘 아래 잠시 쉬어가기 좋다. 슬로시티를 알리는 재미난 조형물과 옛 우물, 누각 등이 볼거리를 더한다.

면사무소에 꾸며진 야외 정원.
면사무소에 꾸며진 야외 정원. 사진/ 김도형 사진작가

직접 캔 약초로 만든 슬로푸드 밥상

슬로시티에 왔으니 슬로푸드를 먹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면사무소 뒤편에 있는 슬로시티 약초밥상은 주인장이 직접 약초들을 캐고 발효, 숙성시킨 약 30여 가지의 다양한 장아찌들을 맛보는 약선 식당이다. 뷔페식으로 차려진 장아찌들 중에는 오가피와 연근, 곰취 등 익숙한 나물도 있지만 방가지똥, 이엽우피소, 모로헤이야 등 낯선 약초들도 많다. 먼저 입에 맞는지 알아보기 위해 조금씩 가져다 맛보았다. 장아찌마다의 독특한 향과 맛에 입안이 짜릿해진다. 발아현미밥에 열무, 백야초, 느릅나무 등을 넣고 다래고추장에 비벼 먹는 비빔밥도 별미다. 맛도 좋지만 건강에도 유익하니 한 그릇이 뚝딱 넘어간다. 여느 식당들과 다른 것은 자신이 먹은 밥그릇은 직접 설거지해야 한다는 것. 한 끼 밥상이 차려지기까지 정성을 다해준 이들에 대한 예의라고나할까. 천연 재료들만으로 음식을 만들기에 세정제 없이 물로만 닦아도 깨끗하게 잘 씻긴다. 사소할지라도 슬로푸드는 물론 슬로 라이프를 체험하는 시간으로 제격이다.

수십 가지 약초로 담근 장아찌들.
수십 가지 약초로 담근 장아찌들. 사진/ 김도형 사진작가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나니 소소한 변화들이 눈에 띄었다. 몇 년 전 커다란 달팽이 조형물이 있던 곳에 액자식 포토존이 설치되어 있었고 한옥을 활용한 카페와 숙소들도 몇몇 새로 보였다. 마을 전경에 크게 위배되지 않는 것들이기에 잘 몰랐던 모양이다. 사실 이런 작은 변화들마저 없다면 그건 ‘느림’이 아닌 단순한 ‘정체’에 지나지 않겠지. 이정도의 속도로만 시간이 흘러가 주길. 언제 다시 찾아도 쉽게 따라잡을 수 있게 말이다.

옛 한옥으로 꾸민 카페.
옛 한옥으로 꾸민 카페. 사진/ 김도형 사진작가

 

INFO 담양 창평 삼지내 마을

주소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돌담길 9-22

TIP

삼지내 마을을 구석구석 둘러보는데 1~2시간 정도 소요된다. 문화해설사와 동행하면 좀 더 깊이 있는 관람 할 수 있다. 담양 싸목싸목 길은 삼지내 마을은 물론 인근을 두루 둘러보는 도보 코스다. 창평 면사무소에서 돌담길을 거쳐 남극루와 용운 저수지, 상월정, 포의사까지 약 7.2km 구간이 원형으로 이어져 있다.

INFO 슬로시티 약초밥상

영업시간 08:00~20:00

메뉴 약초밥상 성인 10,000원, 어린이 5,000원

주소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돌담길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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