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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돌담길 따라 마을 한 바퀴, 고성 학동마을
돌담길 따라 마을 한 바퀴, 고성 학동마을
  • 유은비 기자
  • 승인 2016.10.04 17:5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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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작돌이 그린 반듯한 풍경
골목 골목 납작돌이 가득한 고성 학동마을. 사진 / 유은비 기자

[여행스케치=경남] 온통 납작 납작한 돌투성이인 학동마을 옛담장. 그 속엔 전주최씨들이 하나의 마을을 일군 역사가 담겨져 있다. 돌담길을 걸으며 마을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마을로 들어서기 전 궁금증을 유발하는 비석 하나, 서비 최선생의 비석이다. 사진 / 유은비 기자

경남 고성의 학동마을 찾았다. 마을로 진입하기 전부터 심상치 않은 돌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낮은 담장마저 납작한 돌로 쌓여 있어 묘한 통일감을 주는 마을.

그 앞에 외로이 서 있는 비석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서비 최선생 순의비라고 적혀있다. 서비 최선생은 대체 누구기에 마을 앞을 지키고 있는 걸까?

비 온 뒤 학동마을의 아침 풍경. 사진 / 유은비 기자

전주최씨의 집성촌
마을의 아침이 시작되는 풍경을 보기 위해 새벽 같이 달려왔건만, 마을의 아침은 이미 진행이 되도 한참은 된 상태. 마을 주민들은 하나 둘 트럭과 오토바이를 타고 들어오며 활기찬 아침을 알리고 있다.

과거엔 후문이었던 곳이 지금은 입구가 되어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사진 / 유은비 기자

학동마을 입구에 세워진 표석을 시작으로 마을의 돌담길이 펼쳐진다. 사실 마을의 입구는 반대편이다. 학동마을 입구로 표시되어 있는 이곳은 원래 후문이었다.

최씨들이 살아가는 마을, 최씨장 표지석. 사진 / 유은비 기자

옛날에는 학동재를 넘어야만 마을을 드나들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도로가 나서 더 이상 학동재를 넘나들지는 않지만 아직도 마을의 입구였다는 표지석이 남아있다. 풀숲에 뒤덮인 커다란 바위에 최씨장이라고 새겨져 있다. 최씨장(崔氏庄)은 최씨들이 살아가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학동마을 들어가는 길. 돌담과 어우러진 꽃들이 마을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사진 / 유은비 기자

학동마을의 명칭은 전주최씨 시조의 꿈속에 나타난 모습에서 비롯되었다. 꿈에 학이 마을 자리에서 알을 품고 있었고 이곳이야말로 최고의 명당이라 믿었다. 하여 ‘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는 의미에서 학동(鶴洞)마을이 되었다.

학동마을은 다른 양반촌처럼 왕에게 하사받아 만들어진 마을이 아니다. 전주최씨 후손들이 스스로 개척하여 이룬 마을인 것이다. 척박한 황무지였던 학동리 일대는 마을사람들에 의해 지금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갖게 되었다.

반듯 반듯한 돌담이 마을을 빙 둘러싸고 있다. 사진 / 유은비 기자

마을의 돌담길은 현재 등록문화재 제258호로 지정되어있을 정도다. 1900년대만 해도 집이 백여호 되는 커다란 마을이었다. 지금은 45세대가 거주하고 있다. 그중 전주최씨의 후손은 약 60%정도 남아 살아가고 있다.

학동마을 특유의 납작돌담 모습. 사진 / 유은비 기자

학동마을을 만들 당시에 돌이 지천에 널려 있었다고 한다. 골짜기마다 돌이 너무나 많아 돌을 끌어다가 담장을 쌓고 논밭 둑까지 쌓았다. 수태산에서 채취한 돌로 쌓았다고 알려져 있는 기존 정보는 잘못 등재된 것이라고 한다. 마을 전체가 납작돌로 가득했고 2~3cm의 납작돌을 가져다 황토와 함께 담장을 지었다.

마을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정자나무. 마을 사람들의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곳이기도 하다. 사진 / 유은비 기자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골목
학동마을을 안내해준 최씨 종가 11대손 최상석씨는 어릴 적 골목골목 담장길을 누비던 기억이 생생하다며 ‘골목에서 짚을 묶어 공차기도 하고 그믐밤에는 정자나무 밑에 모여 술래잡기를 하며 담장 위로 다람쥐처럼 날아다녔던 기억’을 풀어놓는다.

어린 시절 최고의 놀이터가 되어준 마을 골목. 사진 / 유은비 기자

농사일손이 부족해 어린이들까지 일을 해야 했던 시절, 돌담은 마을 어린이들에겐 최고의 놀이터였다. 농사를 짓지 않아도 되는 겨울에는 마을 전체가 아이들이 뛰어 노는 소리로 가득했다.

학동마을 돌담길은 일주일에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는다. 마을 전체가 납작돌로 담을 쌓아 놓은 모습은 한옥과 함께 정감 어린 풍경을 선사한다. 골목길은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한 넓이다. 담장은 평균 남성의 키를 훌쩍 넘는 높다란 담장부터, 까치발을 들면 마당이 보일 것 같은 아담한 담장까지 다양하다.

납작한 돌로만 담을 쌓고 개석을 올려 마무리한 학동마을 돌담. 사진 / 유은비 기자

학동마을의 돌담길이 조금 더 특별한 이유는 만드는 방식 때문이다. 땅을 파고 놓은 초석 위에 돌맹이로만 담을 쌓고 흙을 으깨어 한 켜 한 켜 토담을 다시 쌓는다. 그 다음 개석을 올려 마무리한다. 개석은 덮개돌을 일컫는 것이다. 돌담을 쌓을 때 개석을 얹는 것은 학동마을 돌담의 독특한 특징이다.

정자나무 앞에 있는 수로. 비 온 뒤, 물이 불어나 흐르는 물소리가 우렁차다. 사진 / 유은비 기자

고결한 선비의 정신을 기억하다
울창한 정자나무 평상에 앉아 마을의 여유를 느껴보자. 정자나무 앞을 세차게 훑고 지나가는 물소리가 여느 폭포소리 못지않게 우렁차게 들려온다. 정자나무 오른쪽에 있는 수로(水路) 건너편 돌담집은 서비 최우순 선생이 나고 자란 곳이다.

서비 선생은 조선의 유학자로 선비의 고결한 정신을 끝까지 지켜낸 의사(義士)이다. 그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 일본이 있는 동쪽은 바라보지도 않겠다 하여 동쪽을 향했던 대문까지 막고 서쪽에 사립문을 내었다고 한다.

서비 선생의 우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비정. 사진 / 유은비 기자

서비 선생은 일본의 왕이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 주었던 은사금을 끝까지 거부하다 일본의 헌병에게 끌려갈 위기에 처한다. 선생은 날이 밝으면 가겠다고 말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서비 선생의 우국충절을 기려 1924년 학동마을 안산 기슭에 사당을 건립했고 이를 서비정이라 하였다. 정자나무에서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걸어보자. 숭의문이라는 문이 보인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서비정이 모습을 드러낸다. 고매한 선비의 정신을 기리는 사당이지만, 무성한 풀들이 사람의 발길이 뜸함을 짐작케 한다.

학동마을의 기숙형 사립학교 육영재. 사진 / 유은비 기자

서책을 보다 느낀 바가 있어...
학동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서재 골에 육영재가 있다. 육영재는 학동마을 사람들이 후손의 교육을 위해 세운 사립학교다. 과거에 유치원 교육부터 대학 수준의 교육을 모두 담당했다. 1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육영재에서 공부를 했다.

육영재 본당에서 바라본 마당의 모습. 사진 / 유은비 기자

서비 최우순 선생도 육영재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보통 학당은 공자와 같은 성현들을 모시는 사당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육영재는 사당이 없이 순수한 학당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완전한 교육을 위한 기숙형 사립학교인 셈이다.

거대한 배가 터럭처럼 떠올랐네. 주희의 관서유감 중에서. 사진 / 유은비 기자

육영재를 이루는 여덟 개의 기둥을 자세히 살펴보라. 시구가 한자로 적혀 있다. 최상석씨는 “주희가 책을 읽고 나서 떠오르는 감상을 노래한 시”라며 한 소절씩 읊는다.

지난밤 강가에 봄물이 불어나니
거대한 배가 터럭처럼 떠올랐네
이전엔 힘을 들여 옮기려 애썼는데
오늘은 강 가운데 저절로 떠오르네

반 무(단위)의 연못물에 하늘이 개이니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 함께 떠다니는구나
어찌하여 이리도 맑을 수 있느냐 물으니
위로부터 맑은 물이 흐르기 때문이라네

반 무의 연못물에 하늘이 개이니. 주희의 관서유감 중에서. 사진 / 유은비 기자

그는 이 한시에 대해, “봄에 물이 생기듯 학문을 통해 내 몸에 이치를 담으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며 “위에서부터 물이 맑아야 계속해서 맑은 물이 흐르는 것처럼 학문으로 늘 마음을 갈고 닦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설명한다.

서비 최선생 순의비. 사진 / 유은비 기자

이야기를 들으며 마을을 한 바퀴 도니 어느덧 비가 그쳤다. 돌담길을 다시 한 번 눈에 담고 마을을 나선다. 들어올 때 보았던 낮은 돌담이 다시 보인다. 서비 최선생 순의비다. 깔끔하게 정돈된 잔디가 반듯한 선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Info 고성 학동마을
주소 경남 고성군 하일면 학동돌담길 11-5

고성 학림리 최씨 종가. 높은 위치에 있어 마을의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다. 사진 / 유은비 기자

Tip
고성 학림리 최씨 종가에 들어가면 학동마을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마을의 중심부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이 종가댁은 종손이 300년 종사를 이어온 곳이다. 이 집의 가장 높은 곳에 종가의 상징인 가묘도 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만큼 고택의 곳곳이 현재 보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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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o135 2016-11-03 18:19:31
꿀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