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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특집 ②] 찻잔에 담긴 초록, 야생차의 고장 하동
[특집 ②] 찻잔에 담긴 초록, 야생차의 고장 하동
  • 황소영 객원기자
  • 승인 2023.03.13 12: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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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 만개한 하동의 차밭. 사진/ 하동_임효원

[여행스케치=경남 하동] “욕심부리지 않고, 게으르지 않으며, 흔적을 남기지 않는 무공(無空)의 아름다움으로 끝맺음을 하는 우리 자생 차나무는 인간으로 하여금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스스로 바라보게 하는 내면의 성찰을 통해 지혜를 증득케 한다.” <지허스님의 차> 중에서.

우리나라에 차(茶)가 처음 들어온 건 신라 흥덕왕 3년(828), 당나라 사신으로 갔던 대렴이 차씨를 가져온 게 시초다. 일제강점기 이후 이 땅에 대량으로 식재된 차나무는 일본산 야부기다종이지만 아직도 지리산자락 하동군 화개면 일대엔 야생차밭이 번성 중이다. 천년이 넘는 세월을 대대로 살아온 차나무는 봄볕 아래에서 유독 더 초록초록 빛을 발한다.

4월이 되면 찻잎을 따는 손길로 분주한 화개. 사진/ 황소영 객원기자
청초하고 예쁜 차꽃은 모든 꽃들이 지고 난 뒤에야 피어난다. 사진/ 황소영 객원기자

우리나라 첫 번째 차나무
기후의 영향을 많이 받는 차는 보성, 강진, 구례, 순천, 사천, 제주 등 주로 남쪽에서 자란다. 신라시대 차씨가 들어온 이래 왕명으로 심은 첫 번째 장소가 화개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겨울에도 칡꽃이 피어 ‘화개동천’이라 불리는 곳. 특히 쌍계사 주변은 섬진강과 합수하는 화개천 덕분에 안개가 많고 습하며, 밤낮의 기온 차가 커 차나무 재배에 최적의 환경을 갖춘 곳이다. 현재도 8,000여 평의 시배지 주변 차밭에선 덖음차 약 300kg, 발효차 250kg이 생산된다고 한다.

하동 야생차밭은 주로 거친 산비탈에 자리했다. 사진/ 황소영 객원기자

하동 야생차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왕실에 진상되었다. 조선 후기 문신 추사 김정희(1786~1856)는 하동차를 중국 최고의 차인 승설차보다 낫다고 했고, 다도를 정립한 초의선사(1786~1866)도 풍모와 자태가 신선 같고 고결하다고 극찬했다. 찌지 않고 덖는 하동 야생차는 맛과 품질이 우수해 2017년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됐다. 녹차 재배면적만 놓고 보면 전국 대비 23%가 하동에서 생산된다. 올해 5월 3일부터 6월 4일까진 ‘하동세계차엑스포’도 열린다.

차문화의 전통을 계승·발전시키고 우수성을 알리는 차문화센터에선 덖음차 만들기와 다례체험, 도자기 체험 등을 할 수 있다. 야생차축제의 주무대도 차문화센터 앞에 펼쳐진다. 하동녹차연구소는 이름처럼 과학적, 체계적 연구를 위한 곳으로 다양한 녹차 제품을 개발 중이다.

 

차 시배지 비석. 사진/ 황소영 객원기자

INFO 차나무 시배지

<삼국사기>에 따르면 당나라 사신으로 갔던 대렴이 신라 흥덕왕 3년 차나무 씨앗을 가지고 귀국하자 왕명에 따라 처음으로 심은 곳이다. 주변에 쌍계사와 차문화센터가 있다. 경상남도기념물 제61호이며 ‘대렴공차시배추원비’ 등이 세워져 있다. 시배지 일대의 차밭은 법향다원에서 관리 중이다.
주소 경남 하동군 화개면 차시배지길 4-5
문의 055-884-2609

산비탈 깊숙이 뿌리를 내린 야생차밭에선 다부진 화개 여인들의 삶이 느껴진다. 사진/ 황소영 객원기자
차밭은 사시사철 초록이지만 봄에 가장 예쁘다. 사진/ 황소영 객원기자

천년의 세월을 잇다
화개의 차밭이 시대의 흐름을 따라 예쁘게 변한 건 사실이지만 아직도 어른 키만큼 큰 나무들이 뿌리를 깊게 내린 채 산비탈 곳곳을 지키고 있다. 야생 차나무는 동글동글 귀엽게 깎은 평지보다 바위가 많은 산기슭을 더 좋아한다. 옆으로 뿌리를 뻗는 일본 차나무와는 달리 한곳에 뿌리를 곧게 내려 예전엔 새색시에게 차나무를 선물로 주었다. 시집가서도 오래오래 잘 살라는 뜻이었다.

일손을 구하는 게 부쩍 어려워졌지만 여전히 화개의 4월은 찻잎 따는 손길로 분주하다. 가장 먼저 수확해 고가에 팔리는 우전에서부터 세작, 중작, 대작까지 잎의 크기와 수확 시기에 따라 부르는 이름과 가격이 다르다. 여행자들은 작고 연한 우전에 열광하지만 화개 사람들은 또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오히려 맛이 깊은 세작이나 갈색의 발효차(황차)를 더 좋아한다. 그날 딴 찻잎은 그날 저녁 바로 뜨거운 가마솥에 덖어야 한다. 타지 않도록 재빨리 섞고, 섞은 후엔 꺼내 손으로 비비고 터는 작업을 몇 번씩 반복한다.

뜨거운 가마솥에서 빠르게 뒤섞어 만드는 덖음차. 사진/ 하동_임효원
갈색을 띈 차는 황차로도 불리는 발효차로 일반 녹차보다 맛과 향이 진하다. 사진/ 황소영 객원기자

“언제 차 한 번 하자.”라는 말이 화개에선 괜한 소리가 아니다. “녹차는 감기약이지. 산에서 돌배 옇고 댓잎파리 따다 옇고 인동 따다 옇고, 끓이가지고 대려 먹으면 그게 감기약이라.” 묻지 않아도 화개의 웬만한 집들은 손님이 오면 차를 내온다. 차는 음료가 되기도 하고, 약이 되기도 하고, 마을 주민들을 먹여 살리고 자식을 키운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하얀 차꽃은 모든 꽃이 지고난 늦가을에 핀다. 차씨도 초겨울에 껍질이 벌어져 나무 아래 떨어진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차나무는 10여 년 전 아쉽게 수명을 다했지만 매년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맺어 지금도 그 후계목들을 키워내고 있다. 돌 틈바구니 거친 차밭에선 뿌리를 땅속 깊숙이 내린 세월의 온기가 느껴진다. 손톱이 까매지도록 찻잎을 따고 허리와 손목이 아프도록 차를 덖어내 최상의 맛을 뽑아낸 하동의 다인들. 특히 돌 틈의 거친 환경을 이겨낸 산자락 야생차밭과 구수한 차의 목 넘김 속엔 차나무처럼 다부진 하동 여인들의 삶이 녹아 있다.

“언제 차 한 번 하자”라는 말이 화개에선 괜한 소리가 아니다. 사진/ 황소영 객원기자
화개에만 30여 개의 찻집이 있다. 사진/ 황소영 객원기자

커피 말고 녹차, 하동의 다원들
하동은 군내의 아름다운 다원 열 곳을 별도로 꼽고 있는데 고려다원, 도심다원, 명원다원, 매암제다원, 법향다원, 쌍계야생다원, 정금차밭, 청석골감로다원, 한밭다원, 혜림농원이 이에 속한다. 화개엔 약 30여 개의 찻집, 하동 전체로 범위를 넓히면 그보다 훨씬 많은 1천여 가구가 차를 만든다.

돈을 주고 차를 사 마시는, 그러니까 찻집이 처음 생긴 건 1981년쯤. 도자기로 만든 다구도 없이 주전자에 찻물을 끓여 마시던 시절이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제법 모양새를 갖춘 찻집들이 부쩍 늘었지만 그마저도 커피의 광풍에 밀려 오래가지 못했다. 20년 넘게 제자리에 남은 찻집도 있지만 근래엔 멋지게 재단장해 이른바 ‘인스타 핫플’로 꼽히는 집들이 다시 젊은 세대의 조명을 받고 있다.

화개 입구엔 밤파이 맛집 ‘밤톨’이 있고, 양보면으로 거리를 넓히면 양보제과가 있다. 사진/ 황소영 객원기자
차꽃과 차씨 등을 활용한 음식을 제공하는 쌍계사 입구 ‘찻잎마술’의 비빔밥. 사진/ 황소영 객원기자

대를 이어 운영하는 다원은 말할 것도 없고, 차가 좋아 하동에 내려온 사람도 많다. 화개에서 차를 배워 제주 등 기타 도시로 확장한 사람도 있다. 고시 공부차 들어왔다가 야생차와 인연을 맺은 이도 있고, 여름휴가 때 들린 화개에서 아는 스님의 권유로 자리를 잡은 이도 있다. 쌍계도예 김유열 씨는 그렇게 40년 가까이 도자기와 차를 만든 사람이다. 도예를 전공한 학생이기도 했지만 다례에 필요한 게 다구이니 차와 도예는 불가분의 관계인 셈이다.

손으로 덖는 야생차처럼 김유열 씨 또한 자기를 빚고 가마에 장작을 지피는 등 모든 일을 수작업으로 한다. 그렇게 해야만 다기가 숨을 쉴 수 있기 때문이다. 가스나 기름에 굽는 것과 같을 수는 없다. 경상남도기념물 제24호로 지정된 백련리 도요지가 있을 만큼 하동은 도예로도 유명하다.

하동 야생차밭 산책로는 제법 경사가 심하다. 사진/ 황소영 객원기자
벚꽃으로 화사한 화개의 봄. 벚꽃이 지면 찻잎을 따는 일이 시작된다. 사진/ 황소영 객원기자

화개의 봄은 벚꽃으로 절정을 이루지만 벚꽃이 진 후에야 진짜 봄을 맞는다. 몰려든 상춘객이 거짓말처럼 빠지면 그제야 스멀스멀 연둣빛 향연이 시작된다. 참새 혀처럼 앙증맞은 잎들이 이번엔 누구의 손을 거쳐 어떤 맛을 내어줄까. 지리산의 청정한 흙과 바람과 물이 만들어낸 하동 야생차! 찻잎을 따는 손도, 뜨거움을 잊은 채 그 잎을 덖는 다인들의 열정도, 짙어진 봄과 함께 향긋해질 일만 남았다. 

대한민국 전통 도자기 명장인 쌍계도예 김유열 씨의 작품. 사진/ 황소영 객원기자

 

INFO 쌍계도예

대한민국 전통도자기 명장 중 한 명인 김유열 씨가 운영한다. 가마터와 별도로 화개장터 안에 매장이 있으며 김씨가 직접 만든 도자기와 녹차, 발효차, 쑥차 등을 맛보거나 구입할 수 있다. 도자기 물레 체험도 가능하다. 1회 5,000원
주소 경남 하동군 화개면 화개장터(쌍계로 15)
문의 055-883-6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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