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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박물관 기행] 조선 르네상스를 오늘에 되살리는 곳, 실학박물관
[박물관 기행] 조선 르네상스를 오늘에 되살리는 곳, 실학박물관
  • 최보기 객원기자(북칼럼니스트)
  • 승인 2024.02.1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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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의 고향인 남양주시에 실학박물관이 있다. 사진 / 황일민 사진작가
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의 고향인 남양주시에 실학박물관이 있다. 사진 / 황일민 사진작가

[여행스케치=남양주] 조선의 대표적인 천재이자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의 고향마을,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남양주시 두물머리에 실학박물관이 있다.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죽을 쑬 때마다 지성인들이 다시 거론하는 실학박물관에 다녀왔다.

두물머리에 놓인 실학의 다리
시대 흐름에 따라 제도가 변화되어야 함은 세상의 도리이자 이치이다. 임진왜란 이후 온갖 법도가 무너지고, 모든 일이 어수선하여 털끝 하나 문제 아닌 것이 없으니 지금이라도 법과 제도를 바꾸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하고야 말 것이다.” -다산 정약용

남양주시 다산기념관 옆에 있는 실학박물관 전경. 사진 / 황일민 사진작가
남양주시 다산기념관 옆에 있는 실학박물관 전경. 사진 / 황일민 사진작가
실학박물관 전시관 내부. 사진 / 황일민 사진작가
실학박물관 전시관 내부. 사진 / 황일민 사진작가

궁즉변 변즉통(窮則變 變則通)길이 막혔을 때 스스로 변화를 도모해야 길을 찾을 수 있다는 뜻으로 <주역>의 핵심 원리이다. 역사적으로도 위대한 지도자는 미래를 내다보며 변화를 주도해 민생을 유복하게 했다. 1853년 일본이 미국 페리 함대의 무력에 눌려 개항을 당했다. 1876년 조선 역시 일본 함대의 무력에 눌려 개항을 당했다. 비록 개항에서 23년 뒤지기는 했지만 1910년 한일병합까지 34년이라는 긴 시간이 있었는데 조선은 끝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두 나라는 대체 무엇이 달랐길래 그런 결과를 빚었을까?

2층 전시관 입구에 비치되어 있는 실학의 상징 수레와 벽돌. 사진 / 황일민 사진작가
2층 전시관 입구에 비치되어 있는 실학의 상징 수레와 벽돌. 사진 / 황일민 사진작가
실감콘텐츠 체험 영상. 1787 스페이스 오디세이 조선의 밤하늘 여행. 사진 / 황일민 사진작가
실감콘텐츠 체험 영상. 1787 스페이스 오디세이 조선의 밤하늘 여행. 사진 / 황일민 사진작가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한강을 이루는 남양주 두물머리(양수리) 마재마을의 실학박물관에서 어렴풋이나마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에 성공했고, 조선은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의 좌절이 있었던 것이었다. 조선의 임금과 관리들, 지방의 선비와 유지들이 강력하게 개혁을 요구하는 다산의 저 경고만 유념했더라도 1910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INFO 실학박물관
주소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 747번길 16
개관시간 10:00-18:00(입장 마감 17:30)
관람료 무료
문의 031-579-6000~1

수레와 벽돌이 박물관 전시실 앞에 놓인 까닭은?
실학(實學)은 조선 후기 서구문물이 청나라와 일본을 통해 점차 조선에 전파되면서 그 경이로움에 놀란 일부 지식인들이 개혁을 시대적 과제로 각성하면서 시작됐다. 18세기 전반부터 19세기 전반까지 약 100년 동안 사회 전 분야에 변화를 수용하거나 요구하는 학풍이 일어나면서 농업생산력 증대(토지개혁), 상공업과 유통산업 장려(이용후생 利用厚生), 사실에 근거한 학문/예술의 탐구(실사구시 實事求是) 등이 신성장 동력으로 부상했다.

18세기 후반 조선 사신의 청나라 연행도. 북경 거리의 유리창 묘사가 눈에 띈다. 숭실대박물관 소장. 사진 / 황일민 사진작가
18세기 후반 조선 사신의 청나라 연행도. 북경 거리의 유리창 묘사가 눈에 띈다. 숭실대박물관 소장. 사진 / 황일민 사진작가
19세기 최한기가 그린 인체 해부도. 사진 / 황일민 사진작가
19세기 최한기가 그린 인체 해부도. 사진 / 황일민 사진작가

실학박물관은 법고창신(法古創新)’, 옛것을 바탕으로 새로움을 창조하라는 실학정신을 담아 당대 인물과 역사를 누구나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응축해놓았다. 전시장 문 앞을 점령한 수레와 벽돌이 그 100년의 정신과 역사를 웅변한다. “1543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세요?”라며 다소 엉뚱한 질문을 던지는 손원일 박물관 전시해설사는 실학은 전통농업사회에서 상공업이 발전하기 시작한, 1543년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같은 사건이다. 실학의 바탕은 조선 최고 개혁이자 상공업 발전의 근간으로 100년에 걸쳐 완성된 대동법이었다17세기 초반 이수광, 김육, 유형원 등 학자들이 실학의 뿌리였음을 강조했다.

두강승유첩.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되는 두물머리를 그린 풍경화와 문인 여럿이 시로 묘사한 작품. 사진 / 황일민 사진작가
두강승유첩.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되는 두물머리를 그린 풍경화와 문인 여럿이 시로 묘사한 작품. 사진 / 황일민 사진작가
도산서원 혼상 재현품. 혼상은 천체를 구형에 그린 것으로 국내 유일하다. 사진 / 황일민 사진작가
도산서원 혼상 재현품. 혼상은 천체를 구형에 그린 것으로 국내 유일하다. 사진 / 황일민 사진작가

수없는 외침에 시달렸던 선조들은 방어 전략(?)상 수레가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지 않았다. 말 한 마리, 지게꾼 한 사람 다닐 정도로 길이 좁다 보니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실학자들은 중국에서는 험한 길에도 수레로 짐을 나르는데 조선이라 해서 사용하지 못할 리 없다(김육). 백성의 산업이 이처럼 가난한 까닭은 수레가 나라 안에 운행되지 않기 때문(박지원)”이라면서 길을 넓히고 수레를 이용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벽돌 역시 토목과 건축의 소재로서 돌과 흙보다 제작과 활용에 훨씬 장점이 많았다. 청나라를 방문했던 지식인들은 수레와 벽돌이 인류의 물질문명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각성했다.

보물 혼개동헌의. 서양의 천문시계 아스트로라브를 실학자 유금(1741~1788)이 조선식으로 해석해 1787년(정조 11)에 만든 천문 도구. 사진 / 황일민 사진작가
보물 혼개동헌의. 서양의 천문시계 아스트로라브를 실학자 유금(1741~1788)이 조선식으로 해석해 1787년(정조 11)에 만든 천문 도구. 사진 / 황일민 사진작가

디지털시대를 꿈꾼 조선의 실학자들
실학박물관은 제1전시실(실학의 태동과 형성), 2전시실(실학의 전개), 3전시실(실학과 과학)을 주제로 나뉜다. 이수광 <지봉유설>, 김육과 대동법, 유형원 <반계수록>, 이익 <성호사설>, 박지원 <열하일기>, 정약용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추사 김정희 <금석과안록> 등 우리 귀에 익숙하거나 낯선 학자와 저술부터 상평통보, 일본 초기 조총, 청나라 망원경, 혼천시계, 신곤여만국전도 등 그들이 개척했던 신학문과 문물들이 실학의 역사와 실체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1전시실 초입에 영조(재위 1724~1776)와 정조(재위 1776~1800)의 어진(초상화)이 배치된 까닭은 이 두 임금이 기득권을 누리려는 만조백관의 저항을 누르며 실학자들의 요구를 받아 변화와 개혁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서울 한신초등학교 5학년 학생과 가족들이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 / 황일민 사진작가
서울 한신초등학교 5학년 학생과 가족들이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 / 황일민 사진작가
손원일 전시해설사. 사진 / 황일민 사진작가
손원일 전시해설사. 사진 / 황일민 사진작가

실학자들의 치열했던 삶을 대하며 존경과 감회에 젖어 전시실을 돌다가 북경에서 구한 망원경을 들고 밤하늘을 관찰하며 지동설을 주장했던 조선의 코페르니쿠스 홍대용, 글로벌 문장가이자 간서치(책벌레)인 이덕무와 박지원, 발해를 되살린 역사학자 유득공 등 실학자들이 한양을 빙 두른 성곽의 중앙에 탑이 있는 원각사 옛터에 모여 백탑청연집 서문(박제가)”을 합창하는 대목에 이르면 관람객의 마음은 기어이 뜨거워진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3D입체 실감콘텐츠 영상실, 애니메이션 영화관, AR증강현실 모니터 등 풍부한 디지털 시설과 조선의 장신구를 모은 기획전시회 조선비쥬얼을 개최할 능력까지 갖춘, 작지만 강한 박물관이 두물머리 마재마을에 있었다.

실학의 비조 유형원의 저술 '반계수록'. 토지개혁 노비제도 폐지, 상업의 진흥 등 국가 개혁안을 제시했다. 사진 / 황일민 사진작가
실학의 비조 유형원의 저술 '반계수록'. 토지개혁 노비제도 폐지, 상업의 진흥 등 국가 개혁안을 제시했다. 사진 / 황일민 사진작가
조선판 브리태니커. '임원경제지'와 저자 서유구의 초상. 사진 / 황일민 사진작가
조선판 브리태니커. '임원경제지'와 저자 서유구의 초상. 사진 / 황일민 사진작가

여유당, 물을 건너듯 조심하여 사방을 살펴라
실학박물관 바로 옆에는 조선 실학의 중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적지가 조성돼있다. 다산이 살았던 집과 묘소를 중심으로 기념관, 사당이 아담한 정원과 함께 있는 또 하나의 지붕 없는 실학박물관이다.

실학의 비조(鼻祖)는 반계(磻溪) 유형원(1622~1673)이다. 비조는 태아의 얼굴 중 코가 가장 먼저 생기는 것처럼 뭔가를 처음 시작한 사람이다. 국가 개혁을 향한 다산의 의지는 반계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았는데 비록 현직에 있는 관리가 아니더라도 충신과 지사라면 현실의 문제를 수수방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다산의 확고한 가치관이었다.

송하한유도. 1637년 김육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 있을 때 명나라 화가 호병이 그렸다. 사진 / 황일민 사진작가
송하한유도. 1637년 김육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 있을 때 명나라 화가 호병이 그렸다. 사진 / 황일민 사진작가
특별전시 조선비주얼. 조선시대 선비의 의관정제에 필요한 다양한 장신구를 소개하는 전시. 사진 / 황일민 사진작가
특별전시 조선비주얼. 조선시대 선비의 의관정제에 필요한 다양한 장신구를 소개하는 전시. 사진 / 황일민 사진작가

양수리와 북한강을 사이에 둔 마재마을은 다산이 태어나고 생을 마쳤던 곳이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모하는 화성 건축을 도맡았을 만큼 정조의 지극한 신임 아래 다방면으로 국가 개혁을 추진했던 다산은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1801(순조 1) 신유박해 때 조카사위 황사영의 백서사건에 연루돼 멸문지화를 입으면서 강진으로 유배됐다. 18년 유배생활을 마치고 귀향한 다산은 노자 도덕경의 문장을 빌어 겨울에 시내를 건너듯, 사방을 두려워하듯처신을 조심스럽게 하겠다는 뜻을 담아 여유당(與猶堂)이라 집 이름을 붙인 후 학문과 수백 권의 저술을 지속하다 생을 마감, 뒤편 언덕에 묻혔다.

연행사 길과 통신사 길. 사진 / 황일민 사진작가
연행사 길과 통신사 길. 사진 / 황일민 사진작가
실학박물관 맞은편에 있는 정약용 유적지와 생가 여유당. 사진 / 황일민 사진작가
실학박물관 맞은편에 있는 정약용 유적지와 생가 여유당. 사진 / 황일민 사진작가

본래의 여유당은 1925년 대홍수 때 물에 휩쓸려 사라졌는데 다행히 일제 강점기에 신문기자가 찍은 생가 사진이 남아있어 1986년 원형대로 복원됐다. 이 홍수로 여유당에 있던 5,320권의 책이 모조리 유실됐는데 다산의 고손자 정규영이 아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물길을 헤쳐 상자 속에 단 한 벌 보관 중이던 여유당집필사본 183책을 구해낸 덕에 다산 정약용 선생의 넓고 높은 사상체계가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여유당 뒤에는 차()의 성지이자 두물머리 장관을 조망하는 최고 포인트 운길산 수종사가 자리를 잡고 있다.

INFO 정약용 유적지
주소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 747번길 11
운영시간 09:00-18:00(입장마감 17:30)
입장료 무료
문의 031-590-4242, 2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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