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광주] 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자연은 황폐해지기 시작했다. 인간이 문명의 혜택을 받을수록 기이한 자연현상들이 자주 출현하기 시작했다. 뒤늦게 자연의 소중함을 깨달은 인간은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보지만 자연의 분노는 극에 달한 듯하다.
침묵은 이름할 수 없는 천 가지의 형상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소리 없이 열리는 아침 속에, 소리 없이
하늘로 뻗어 있는 나무들 속에, 남몰래 이루어지는 밤의 하강 속에,
말 없는 계절들의 변화 속에, 침묵의 비처럼 밤 속으로
떨어져내리는 달빛 속에, 그러나 무엇보다도 마음 속의 침묵 속에…
침묵의 자연 세계보다 더 큰 자연 세계는 없다.
-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중 일부 -
경기도 광주 퇴촌으로 가다 보면 눈에 띄는 간판이 하나 있다. ‘천진암’, 어떤 암자이기에 밤색 관광안내표지판이 붙었을까? 대웅전이 없는 절을 암자라고 한다는데…. 천진암은 절이 아니라 천주교 성지다. 2백년 전 조선 땅 최초로 천주교 신앙이 이 곳에서 싹텄다.
1779년 겨울 주어사 천진암에서 당대의 석학 권철신이 주재해 유학을 강학하고 있었다. 권일신,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등 당대의 수재들이 다 모여 있었다. 이 때 백여 리의 눈길을 뚫고 이벽이 찾아온다.
이벽은 7세부터 경서를 읽던 영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천주교 서적을 읽고 기도와 묵상을 통해서 천주교 교리를 스스로 깨우친 자이다. 이벽을 통해서 이 모임에 모인 선비들은 새로운 학문인 서학에 눈을 뜬다. 유학과 전혀 다른 서학과 교리가 얼마나 새로웠을까?
이곳에서 그들은 조선 천주교 토대를 만들고 역경 속으로 걸어갔다. 마치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죽음으로 가듯…. 그래서 천진암터에는 정약종,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 이벽의 묘소가 나란히 모셔져있다.
천진암은 1백년 계획으로 천진암 대성당을 건립 중이다. 총 넓이만 30만평, 성당터 기단만 5만평. 1979년부터 시작해서 2079년 완공 목표로 공사중이다. 벌써 25년 터를 닦았으며 앞으로도 75년이 남았다.
파리의 노틀담 대성당 2백20년 동안 완공 목표로 1163년에 공사를 시작했지만 아직 미완성이다. 독일 퀼른 대성당도 7백50년 후에 완공될 계획으로 1248년에 공사를 시작해서 현재까지 건축 중이다. ‘몇 백년 된 건물’이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의 건물이다.
천진암 대성당은 터를 닦는 기초공사가 끝난 상태다. 검은 성역로 3백m를 천천히 걸어가면 십자가 뒤로 텅 빈 성당터 현장이 나온다. 성당터는 주위 산 봉오리에 둘러싸여 있다. 정면으로 애자봉 산자락에 성모님이 살포시 보인다. 덩그러니 철문만 세워졌고 토끼풀과 잡풀이 자라고 있다.
제단 앞에 교황이 직접 쓴 강복 머릿돌이 있다. 제단 옆 왼쪽에는 성모경당이 있고, 오른쪽 강학로를 따라서 7백m 올라가면 다섯 분 묘역이 보인다. 신앙인이 아니라도 마음 속 기도를 드리고 싶을 때, 침묵하고 싶을 때, 천진암을 찾으면 좋을 듯 하다.
Tip. 가는 길
서울에서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경안인터체인지를 나와 우회전 -> 45번 국도 타고 팔당호 방향 -> 도마리 삼거리에서 88번 지방도 -> 광동교 -> 도수초등학교 지나 사거리에서 직진하면 천진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