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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특집 마을을 찾아 ①] 아시아 최초로 선정된 슬로시티, 담양 삼지내마을  “뭣이 그리 급해부러, 왓응께 놀다 가제”
[특집 마을을 찾아 ①] 아시아 최초로 선정된 슬로시티, 담양 삼지내마을  “뭣이 그리 급해부러, 왓응께 놀다 가제”
  • 송수영 기자
  • 승인 2008.02.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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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8년 3월. 사진 / 송수영 기자
삼지내마을의 명물인 돌담. 2008년 3월. 사진 / 송수영 기자

[여행스케치=담양] 트위치 스피드(Twitch Speed), 조급증(Hurry Sickness), 타임 디프닝(Time Deepening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일을 하고,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하며, 보다 정밀하게 시간을 측정한다는 의미), 인터넷 타임, 디지털 타임, 타임 기근(Time Famine 시간 부족보다 더 심화된 표현)…. 오늘날 수백만 인구가 시간의 압박에 시달리고 스트레스를 받으며 미래 쇼크에 휩싸이고 있다.
앨빈 토플러의 <부의 미래> 중

2008년 3월. 사진 / 송수영 기자
고재선 가옥에서 오래전 사진을 보고 잇는 고오순 문화관광해설사. 2008년 3월. 사진 / 송수영 기자

천천히 만나는 삼지내마을 
창평면은 담양군에 소속되지만, 거리상으로 보면 담양과 광주의 중간 정도 지점이다. 슬로시티로 가는 여행이니 모처럼 자동차를 버리고 대중교통이 좋겠다 싶었다. 서울에서 광주까지 가서 거기서 또 창평면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들어간다. 

종점 정류장에서 내려 오늘의 목적지 삼지내마을로 들어가는 길, 때마침 새로 푸줏간을 개업했는지 잔치가 요란하다. 요즘은 시골장에서도 흔치 않은 각설이가 둘이나 초대되어 노래방 기계음에 맞춰 디스코풍이 가미된 ‘뽕짝’을 신나게 불러 제낀다. 이를 보겠다고 둥그렇게 반원을 그리며 둘러싼 동네 어르신들도 신나기는 마찬가지. 벌써 몇몇 분은 앞줄로 나와 벌건 대낮부터 둥실둥실 흥이 올랐다. ‘앗싸’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틈에 끼어 나도 오랜만에 어깨 좀 흔들어볼까? 

2008년 3월. 사진 / 송수영 기자
손글씨로 쓴 나무 푯말이 정감있다. 2008년 3월. 사진 / 송수영 기자

마을을 휘이 둘러보니 좀처럼 높은 건물을 찾아볼 수 없다. 성황나무 근처의 붉은 벽돌의 교회가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로 크고 높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정미소, 농약 판매점, 이발관 등 가게들도 모두 허리 굽은 시골 할머니들의 키에 맞춘 듯 고만고만하다. 

요 전방들의 안쪽에 오늘의 목적지인 삼지내마을이 있다. 낡은 벙거지 모자를 쓴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골목 안으로 들어가는데 그 길 안으로 따라가니 사진에서 보던 낯익은 골목이다. 바로 삼지내마을의 ‘트레이드마크’이자 명물인 돌담길이다. 돌담은 심금을 쥐락펴락하는 남도 육자배기 가락처럼 꼬불꼬불 이어져 있다. 나뭇잎이 다 떨어진 앙상한 가지가 돌담 위로 훤칠한데, 개 짖는 소리도 없이 마을이 고즈넉하다. 

삼지내마을은 예전부터 쌀엿으로 유명하여, 담벼락과 집 대문에 ‘쌀엿’이라는 간판이 군데군데 붙어 있다. 쌀엿은 쌀과 엿기름만으로 만드는데 방부제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웰빙 식품이다. 한입에 넣고 슬슬 녹여 먹기는 좋지만 하나 만들자면 삭히고 달이고 치대는 일이 보통이 아니다. 아무리 적은 양을 해도 꼬박 3일은 걸린다. 게다가 작업 과정엔 어느 것 하나 기계의 힘을 빌릴 데가 없다. 일일이 사람 손이 들어가야 제 맛이 나는 것이다. 그렇게 공이 들어간 엿을 잘라보면 공깃구멍이 크게 숭숭 뚫려 있고 입에 넣으면 신기하게도 치아에 붙지 않는다. 

이 동네 출신으로 지금은 담양에 사는 고오순 문화관광해설사는 “엿 고는 게 워낙 힘들어서 예전에 엄마가 쌀엿 곤다고 하면 꼭 잠자는 척하고 그랬지요” 하며 웃는다. 길게 직사각형으로 자른 나무 푯말에 또박또박 ‘쌀엿 보성댁’이란 글자를 써서 대문 앞에 걸어놓은 보성댁 할머니는 며칠 전에도 쌀엿을 고아 오늘 박스 포장을 하고 있다. “긍께, 요놈 할라믄 팍팍하제” 하는데, 벌써 손등에 큰 파스가 붙어 있다.

2008년 3월. 사진 / 송수영 기자
보성에서 시집와 오늘날까지 쌀엿을 만들어옸다는 보성댁 할머니. 2008년 3월. 사진 / 송수영 기자

새로운 변화의 전조    
시간도, 정신없는 세상과도 담을 쌓고 살 것만 같은 삼지내마을에 조용한 변화가 생겼다. 이곳을 포함한 전라남도 네 지역이 지난해 말 슬로시티로 지정된 것이다. 아시아에서는 최초 사례다. 일찍이 일본에서 열 곳의 지자체가 한꺼번에 신청했지만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은 전례가 있단다. 

본디 슬로시티의 발상지는 이탈리아다. 슬로시티라는 뜻의 치타슬로(Cittaslow)가 원 슬로건으로, 오래된 전통을 보전하고 생태주의를 따르며 느림의 미학을 기반으로 하는 도시를 표방한다. 몇 년 전 우리나라에 몰아쳤던 슬로푸드 운동을 지역 개념으로 확대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찍이 헬레나 호지 여사가 <오래된 미래>를 통해 아름다운 전통의 라다크가 현대화의 물결에 어떻게 휩쓸려 나가는지를 생생히 보여주었지만, 비단 그녀의 경고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지방 도시 역시 이미 멋없는 콘크리트 아파트와 대형 쇼핑센터로 개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이렇듯 ‘인스턴트화’되어가는 삶의 공간에 대한 우려가 널리 공감을 얻어 현재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독일, 영국, 노르웨이 등 10개국 100여 개 도시가 이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다만 어디나 인증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먼저 조정위원회 대표들이 현장을 방문하여 가입 요건이 50% 이상 충족된다는 확인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그 가입 요건이 또 까다롭다. 

2008년 3월. 사진 / 송수영 기자
창평시계점. 벽시계의 시간이 모두 제각각이다. 2008년 3월. 사진 / 송수영 기자

우선 인구 5만 명 이하여야 하고, 전통 수공업과 전통 조리법을 장려하고, 자전거 도로와 나무가 많아야 한다. 여기에 글로벌 브랜드의 대형 체인점이 없을 것, 외지인 부동산 거래 금지 사항 등도 포함되어 있다. 

2002년 처음 슬로시티를 주창한 이탈리아의 그레베 인 키안티 마을은 처음엔 반발도 많았지만, 운동이 정착되면서 점차 외부 자금 유입 없이 자생력이 강해져 지역 상공업이 살아나고 외지로 나가지 않고 가업을 잇는 이들도 급속히 늘었다. 마을의 전통이 되살아나자 이를 보려는 관광객들이 덩달아 줄을 이어 소득수준이 높아지는 등의 좋은 전례를 보여주었다. 

담양군 역시 삼지내마을이 슬로시티로 지정된 이후 한껏 고무된 분위기다. 마을 주민과 공무원 등 600여 명이 참석한 주민 설명회를 갖고, 돌담길 복원 사업, 환경 정비 등 총 50억원을 투입하여 관광명소로 육성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가장 큰 걸림돌은 마을 전체에 걸친 노령화이다. 이 문제를 앞으로 어떻게 해결하여 노화로 인한 ‘슬로’가 아니라 능동적인 ‘슬로’ 마을로 되살아날지 자못 기대와 우려가 교차한다.  

그럼에도 똑같은 일상
마을 입구에서 고향을 떠나지 않고 한 자리에서 시계점과 도장 파는 일을 겸하고 있는 ‘창평시계점’ 주인장 할아버지는 오늘도 열심히 시계 부속품을 만지고 있다. 30년 전만 해도 누구네가 이사를 가면 벽걸이 시계를 선물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또 까까머리 중학생이 되면 입학 선물은 당연 손목시계였다. 한창 잘나가던 시절의 영화는 이제 묻히고 그저 시간이나 때우러 나온다는 주인 할아버지.

가게 안을 둘러보니 20여 년 전에 유행하던 뻐꾸기시계가 여기저기서 째깍째깍 돌아가고 있다. 90년대 초 한창 잘나가던 뻐꾸기시계는, 뻐꾸기가 남의 둥지에 알을 낳는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남편의 바람기를 우려한 아내들이 멀리하기 시작하였다. 갑작스런 찬바람에 재고가 쌓이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 좋지 않은 루머에, 유행마저 지났으니 언제 팔릴지 기약이 없는 놈들이다.

2008년 3월. 사진 / 송수영 기자
문을 열고 살아도 걱정이 없는 마을. 2008년 3월. 사진 / 송수영 기자

뻐꾸기시계만이 아니다. 언제 들여놨는지도 잊어버렸다는 낡은 탁상시계는 반짝이던 금속 장식이 빛을 바래 노년의 기색마저 역력하다. 그 지친 모습이 은근히 눈길을 끄는지라 얼마에 팔겠냐고 물었더니 ‘거시기, 째까 시간이 안 맞을 것인디…’하며 주저한다. 매일 태엽을 감아 시계밥을 주어야 하는데다 초침 소리도 너무 크고, 결정적으로 매일 조금씩 시간이 늦어진단다. 그런 주제에 간드러진 새 소리나 노랫소리가 흘러나오는 요즘의 알람과 달리 이놈은 마을 전체를 다 깨우려는 듯 화통을 삶아먹은 소리다. 당신이야 정이 들어 늙은 마누라인 양 내치지 못하고 있지만, 젊은이가 굳이 돈 내고 사서 뭣하겠냐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겠다는 임자가 나섰는데 시계는 영 맥을 못 추고 있다. 이래저래 참 세월에 처진다. 

결국 양심상 계속 주저하는 주인장을 간신히 설득해 결국 손에 넣었다. 째깍째깍째깍… 모처럼 밥을 먹어 신이 난 ‘낡은 새시계’를 검정 비닐봉지에 싸들었다. 이제 요놈 소리에 발맞춰 타임캡슐 속 삼지내마을이나 천천히 더 돌아볼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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