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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역사기행] 천년 세월을 넘어 오늘을 지키는 신라의 숨결, 경주
[역사기행] 천년 세월을 넘어 오늘을 지키는 신라의 숨결, 경주
  • 여행스케치
  • 승인 2003.09.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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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신라시대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입구, 천마총. 2003년 9월. 사진 / 김현득 객원 기자
신라시대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입구, 천마총. 2003년 9월. 사진 / 김현득 객원 기자

[여행스케치=경주] 아이들을 데리고 경주에 다녀왔습니다. 미국 문화에 익숙한 아이들에게 우리 민족의 찬란한 문화 유물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하연아, 민아야! 경주여행을 계획하면서 엄마는 많이 망설였어. 혹시 엄마만의 욕심을 채우려는 건 아닐까? 하지만 엄마는 예전부터 너희에게 경주를 꼭 소개하고 싶었어. 왜냐구? 너희에게 경주를 자랑하고 싶었으니까. 겨우 200년 남짓한 역사를 품고서도 그토록 오만한 미국에서 7년간이나 교육받아온 너희에게 2천년 역사를 가진 이 도시를 꼭 보여주고 마음껏 자랑하고 싶었으니까 말이야.

기원전 57년, 신라가 건국한 이래 서기 935년 경순왕이 폐위되기까지 천 년 동안 경주는 신라의 도읍지였어. 그 후로 다시 천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경주는 매혹적인 곳이야.

엄마는 경주 시내에 들어서자마자 만날 수 있는 거대한 고분군을 좋아해. 초기 신라시대엔 풍수지리가 발달하지 않아 무덤자리를 산 속이 아니고 이런 시내에 썼대. 저녁 무렵이면 굴뚝 위로 연기가 솟아나는 살림집 사이사이에 들어선 봉분들을 만날 수 있지. 엄만 그런 분위기가 얼마나 정감 있게 느껴지는지 몰라.

옛 신라 사람들과 오늘을 사는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렇듯 한 공간에서 함께 숨쉬고 있다는 게 얼마나 황홀한지 너희는 알까? 너희들이 그저 동산처럼 여기고 올라가고 싶어했던 봉분들 속에서 쏟아져 나온 보물들이라니... 엄마는 그보다 무덤 속에 묻혀 계신 옛 신라의 왕들이 나랏일을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했던 마음을 읽을 수 있어 좋았어.

천년 세월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논을 갈아 모를 심고 피를 뽑는 농부 곁에서 소박하게 쉬고 계신 진평왕릉부터 그의 딸 선덕여왕, 그리고 통일의 기틀을 세우고 이뤄낸 태종무열왕, 문무대왕까지 우리가 함께 돌아본 무덤의 주인들이 어떤 격동의 시대를 살아왔는지 상상할 수 있겠니?

엄마는 그들의 무덤 앞에서 ‘그때 통일의 주체가 신라가 아닌 고구려였다면?’ 이란 역사의 가설을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또 되뇌었어. 불국사와 석굴암에 대해선 정말 할 말이 많고, 자랑하고 싶은 것이 많아. 하지만 여기서는 석굴암이 왜 유리벽 속에 갇혀 있는지 물었던 민아의 궁금증에 대해만 짚고 넘어가자.

불국사 극락전 옆의 석축.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룬 우리나라 건축미를 한 눈에 느낄 수 있다. 2003년 9월. 사진 / 김현득 객원기자
불국사 극락전 옆의 석축.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룬 우리나라 건축미를 한 눈에 느낄 수 있다. 2003년 9월. 사진 / 김현득 객원기자
석굴암의 정면에 세워진 목조 전실. 이 목조 전실로 인해 석굴암 보존불은 동해로 향하던 시야를 잃었다. 2003년 9월. 사진 / 김현득 객원기자
석굴암의 정면에 세워진 목조 전실. 이 목조 전실로 인해 석굴암 보존불은 동해로 향하던 시야를 잃었다. 2003년 9월. 사진 / 김현득 객원기자

석굴암이 착공된 것이 신라 경덕왕 10년(751년)이라는 기록이 남아있으니 토함산 정상에 본존불이 자리 잡은 지도 벌써 1천2백 년이 지났구나. 석굴암은 1913년 일제에 의해 완전 해체, 보수되면서부터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서게 됐어. 바로 ‘시멘트 문화’로 대변되는 현대인들의 오만 때문이었지.

석굴암 둘레에 발라놓은 시멘트 탓에 더 이상 환기와 습도를 스스로 조절하지 못하게 된 거야. 석굴암 본존불은 언제까지 유리벽에 갇히고 목조전실로 시야까지 가린 채 컴컴한 굴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어야만 할까?

석굴암을 나와 감포로 가는 길에 만난 장항리 절터는 답답해진 엄마의 마음을 시원스레 풀어 주었지. 이름도 제대로 남기지 못한 이 쓸쓸한 절터에 올라 하늘을 바라보니 한 점, 흰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어.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무성해진 잡초 위를 간질이듯 미끄러지는데 저 돌탑들은 꿈쩍도 않고 그렇게 버티고 서 있는 거야. 1923년 도굴범에게 폭파되어 계곡을 뒹굴다가 1966년에야 간신히 다시 자리 잡게 되었다는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데도 말이야.

감은사 터와 감은사 터 쌍 탑. 용왕이 되어 바다를 지키고자 한 문무대왕이 쉬어갈 수 있도록 금당 터 밑을 비워 두었다고. 2003년 9월. 사진 / 김현득 객원기자
감은사 터와 감은사 터 쌍 탑. 용왕이 되어 바다를 지키고자 한 문무대왕이 쉬어갈 수 있도록 금당 터 밑을 비워 두었다고. 2003년 9월. 사진 / 김현득 객원기자
장항리 절터 오층석탑(국보 제 236호)에 새겨진 인왕상. 2003년 9월. 사진 / 김현득 객원기자
장항리 절터 오층석탑(국보 제 236호)에 새겨진 인왕상. 2003년 9월. 사진 / 김현득 객원기자

하연아, 민아야. 우리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하던 감은사 터와 문무대왕 수중릉인 대왕암은 어땠니? 엄마는 이상하게 감은사 터에 서면 두 주먹이 불끈 쥐어져. 문무대왕이 미처 완성을 보지 못하고 그의 아들 신문왕 2년에야 완공되었다는 이 감은사는 부처의 힘을 빌어 그 당시 우리 해안가를 침입하던 왜구를 무찌르기 위해 지은 거래.

3국 통일을 이룬 문무대왕은 화려한 왕릉을 마다하고 동해에 떠있는 한 점 섬에 자신의 뼈를 뿌린 것이고 말이야.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뒤로 하고, 엄마는 무엇보다 감은사 터의 쌍 탑을 너무 좋아해. 그 거대한 돌덩이 앞에 서면 내 자신이 작아지는 것 같지만 그 느낌이 과히 나쁘지 않거든.

문무대왕릉. 여기 문무대왕의 유골이 묻혔다고도 한다. 납골을 뿌린 산골처라는 주장도 있다. 2003년 9월. 사진 / 김현득 객원기자
문무대왕릉. 여기 문무대왕의 유골이 묻혔다고도 한다. 납골을 뿌린 산골처라는 주장도 있다. 2003년 9월. 사진 / 김현득 객원기자

문무대왕과 신문왕이라면 통일 전쟁을 마무리하고 신라의 문화가 가장 절정을 향해 치달릴 시기야. 바로 그 시기의 건강한 힘이 느껴져서 엄마는 이곳을 좋아하나 봐. 사람이나 역사나 차고 넘친다고 생각될 바로 그때 가장 조심해야 하는 건 아닐까? 절정에 다다르는 순간부터 내리막길이 시작되기 마련이니까 말이야.      

엄마는 첨단 무기와 자본에 유린당한 바그다드를 생각하며 ‘아무리 강한 바람이라도 바람은 그저 바람일 뿐 지나가버리고 죽은 자는 남아 계속 그 땅을 살아간다’는 영화 속 마지막 대사를 되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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