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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왕릉기행] 조선왕조의 목락으로 더 한이 맺힌, 서삼릉(西三陵)
[왕릉기행] 조선왕조의 목락으로 더 한이 맺힌, 서삼릉(西三陵)
  • 여행스케치
  • 승인 2003.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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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서삼릉 입구. 주차장이 협소하므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2003년 10월. 사진 / 정대일 기자
서삼릉 입구. 주차장이 협소하므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2003년 10월. 사진 / 정대일 기자

[여행스케치=고양] 경기도 고양시 원당에 서삼릉이 있다. 중종 제1계비 장경왕후의 희릉, 인종과 인성왕후의 효릉, 철종과 철인왕후의 예릉인 3릉을 합하여 서삼릉이라고 한다. 서삼릉 경역내에는 3원과 46묘에 조선 임금과 왕자들의 태실 54기가 있다.    

고양시 원당동 야트막한 산속에 서삼릉이 있다. 인근에 골프장과 종마목장이 있고, 크고 작은 농장들이 많이 있다. 얼핏 보기에 한적하고 평화로운 동네다. 그러나 서삼릉에 묻혀 있는 왕과 왕비들은 조선왕조가 몰락하고 가장 혹독한 슬픔을 삼켜야 했는지도 모른다.

전국 각지의 명당에 흩어져 있던 왕자들의 태실을 일본 사람들이 관리하기 용이하게 한다면서 모두 서삼릉으로 이전해서 안치했기 때문이다. 왕실에서는 왕위를 이을 왕세자를 비롯하여 왕자, 세손, 공주, 옹주가 출산하면 태를 석실에 담아 전국의 길지를 가려 봉안했다.

서삼릉에는 가족들이 산책할 수 있는 산책로가 잘 꾸며져 있다. 2003년 10월. 사진 / 정대일 기자
서삼릉에는 가족들이 산책할 수 있는 산책로가 잘 꾸며져 있다. 2003년 10월. 사진 / 정대일 기자
서삼릉은 인종과 철종, 그리고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가 잠들어 있다. 2003년 10월. 사진 / 정대일 기자
서삼릉은 인종과 철종, 그리고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가 잠들어 있다. 2003년 10월. 사진 / 정대일 기자

그 산을 태봉이라 하여 그 주변에서는 방목, 벌채, 개간을 금하는 등 각별히 보존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태실의 집중관리라는 미명하에 태조를 비롯한 임금 태실 22기와 왕자 32기의 태실을 1930년대를 전후하여 서삼릉 경역내로 이설한 것이다. 참으로 수치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서삼릉은 중종 제1계비 윤씨(장경왕후)의 능이 자리하면서 왕릉 이름을 갖게 된다. 장경왕후는 당초에 경기도 광주의 대모산 아래 묻혔으나 20여년 후인 중종 32년에 권력 투쟁을 벌인 끝에 서삼릉 경역내로 억지로 천릉하였다. 이것이 희릉이다.

인종의 맏아들 소현세자가 잠들어 있는 소경원과 영조의 세살짜리 왕세손 의소가 안장된 의령원. 두 봉분이 앞뒤로 있다. 2003년 10월. 사진 / 정대일 기자
인종의 맏아들 소현세자가 잠들어 있는 소경원과 영조의 세살짜리 왕세손 의소가 안장된 의령원. 두 봉분이 앞뒤로 있다. 2003년 10월. 사진 / 정대일 기자

중종의 아들 인종이 원년(1545년)에 승하하여 서삼릉 경역에 효릉이 봉릉되고, 이후 3백 년만에 철종의 예릉이 설릉되어 3릉을 아울러서 서삼릉으로 호칭하게 되었다. 서삼릉 경역 내에는 3원이 있다. 3원중 가장 처음 설원된 소경원은 인조의 장자 소현세자의 원으로서 인조 23년(1645년) 세자가 춘추 34세로 급서하여 이곳에 장사지내고 소현묘로 하였으나 고종대에 이르러 소경원으로 승격시켰다.

의령원은 정조의 맏이이며 영조의 손자인 의소 세손의 원으로서 영조 27년(1751년) 왕세손으로 책봉되었으나 이듬해 3월 춘추 3세로 훙거하니 양주군에 초장하고 의령원이라 하였으며 1949년 6월 이곳에 옮겼다.

효창원은 정조의 원자 문효세자의 원으로서 정조 8년(1784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춘추 5세 되던 해인 정조 10년(1786년) 5월에 훙서함에 현 서울 용산구 효창동에 장사지내고 효창원이라 하였으며 1944년 10월 이곳으로 천장되었다.

왕릉에는 대부분 음지 식물이나 넝쿨식물들이 있어 세월의 더께를 느끼게 한다. 2003년 10월. 사진 / 정대일 기자
왕릉에는 대부분 음지 식물이나 넝쿨식물들이 있어 세월의 더께를 느끼게 한다. 2003년 10월. 사진 / 정대일 기자

서삼릉 경역 내에는 후궁, 왕자, 공주 등의 묘 46기가 있다. 이중 회묘와 경선군 묘 이외의 묘는 후궁과 왕자와 공주 묘로 구분되어 집장되어 있다. 조선왕조 예법에 왕릉 경역내에는 후궁이나 왕자, 공주 등의 묘를 설묘할 수 없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한일합방으로 조선왕조가 멸망하던 1910년 11월에 일본은 멸망한 왕실을 관리하기 위하여 이왕직을 설치하였다. 이왕직에서는 서울, 경기 일원에 산재한 후궁, 왕자, 공주 등의 분묘를 한꺼번에 관리한다는 명목 아래 서삼릉 경역을 집장지로 선정하고 이장을 한다.

숙종의 후궁인 소의 유씨 묘 외 15기와 세종대왕 1녀 정소공주 묘외 18기를 천묘 집장한 것이다. 천장묘 중 회묘는 성종의 폐비이자 연산군의 사친 윤씨의 묘로서 경기 양주 천장산에 민묘로서 있었던 것이나 연산군이 군주로 등극한 후 비릉으로서 조영하고 회릉이라 하였던 것이다.

서삼릉에는 가족이나 학교, 유치원에서 단체로 견학을 오는 사람들이 많다. 2003년 10월. 사진 / 정대일 기자
서삼릉에는 가족이나 학교, 유치원에서 단체로 견학을 오는 사람들이 많다. 2003년 10월. 사진 / 정대일 기자

그러나 연산군이 폐출된 후 회묘로 강위되었고 1969년 10월 25일 서삼릉 경내로 천묘하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묘의 규모가 비릉과 같은 것은 이후 다시 손질하지 않은 탓이라고 한다. 서삼릉에 후궁과 왕자, 공주 묘 및 태실의 집장은 능역 일원을 공동묘역으로 변형케 하여 왕릉으로서의 존엄과 품격을 비하시키고자 한 일제의 의도적 책략에 따른 것이었다.

그래도 하나의 왕릉으로서 경역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1960년대 말에 이르러 시범낙농단지 조성을 시행함으로써 경역의 대부분이 낙농방목초지로 바뀌었다고 한다. 서삼릉은 현재 예릉·희릉 구역, 효릉 구역, 후궁·왕자·공주묘, 태실집단 구역, 소경원 구역 등으로 분할되어 있다.

이 가운데 왕자 공주들의 묘나 태실은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는다. 같은 서삼릉 경역에 있지만 통행이 자유롭지 못하다. 서로 고립된 상태다. 다시 하나의 경역으로 통합하여 울창한 원래의 숲과 위용을 보이도록 하자는 주장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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