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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시골 장 나들이] 메밀묵처럼 담백한 정이 넘치는 봉평 오일장
[시골 장 나들이] 메밀묵처럼 담백한 정이 넘치는 봉평 오일장
  • 김선호 객원기자
  • 승인 2004.1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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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봉평 오일장이 열린 봉평재래장터. 2004년 11월. 사진 / 김선호 객원기자
봉평 오일장이 열린 봉평재래장터. 2004년 11월. 사진 / 김선호 객원기자

[여행스케치=평창] 가을 햇살이 내리는 한낮에 봉평장에 닿았다. 굽이굽이 산골길을 돌고 돌아 도착한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고향 봉평 땅이었다. 달빛에 푸르게 젖었을 메밀 꽃밭이 봉평 땅을 온통 도배 했으리라던 기대가 너무 컸나 보았다. 이미 계절이 깊어 정작 메밀꽃은 지고 장터 여기저기 메밀묵이며 메밀국수와 메밀전병이 꽃을 대신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봉평장은 읍을 가로지르는 대로를 따라 늘어선 건물 뒤쪽 골목과 그 다음 골목 이렇게 두 골목을 따라 펼쳐진다. 여기저기 ‘봉평’ 이란 상호가 많기도 하다. ‘봉평 꽃집’ ‘봉평 가스’ ‘봉평 메밀국수’‘봉평 세탁소’에 ‘봉평 영양탕’까지….

파란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봉평재래시장’ 이라 쓰인 입간판이 흔들린다. 지나가는 길손을 붙들어 어서 오라 손짓이라도 하는 듯 하다. 하얀 운동복 차림의 아이들 한 무리가 우르르 몰려와 장 입구 쪽의 포장마차로 몰려들었다.

운동회가 끝난 아이들에겐 장터 호떡집이 인기다. 2004년 11월. 사진 / 김선호 객원기자
운동회가 끝난 아이들에겐 장터 호떡집이 인기다. 2004년 11월. 사진 / 김선호 객원기자

“핫도그 주세요!” 아이들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다. “오늘이 운동회 날이니?” “예” 일제히 합창하듯 대답하는 아이들 얼굴에 생기가 가득하다. “달리기도 했겠구나?” “네, 저는 일등 했구요, 쟤는 삼등이요.” 당당하게 대답하는 여자아이들 뒤로 한 남자아이가 그냥 수줍게 웃는다.

개복숭아가 시장 구경을 나왔다. 벌레 먹고 못생긴 토종복숭아다. 포도 닮은 머루열매가 반갑다. 장을 한바퀴 돌고 나서 그걸 사야지 했는데 나중에 그 자리에 와 보니 그새 머루가 팔리고 하나도 안남아 있었다. 기관지 천식에 좋다는 산초열매도 포도를 닮았고, 포도와 머루가 사이좋게 합쳐진 머루포도가 둥글둥글, 가을햇살 닮은 얼굴을 내밀고 있다.

나물을 다듬는 손에 가을의 여유로움이 담겨있다. 2004년 11월. 사진 / 김선호 객원기자
나물을 다듬는 손에 가을의 여유로움이 담겨있다. 2004년 11월. 사진 / 김선호 객원기자

“냉이 좀 사가, 냉이.” 옆에 앉은 할머니가 앞에 놓인 바구니를 가리키며 손짓을 했다. 가을에 웬 냉이인가 싶었는데 배추밭에서 자란 냉이란다. 봄냉이 보다 더 맛있다고 자랑하는 할머니 옆에는 강냉이 (옥수수) 밭에서 난 고들빼기를 파는 할머니가 앉아있다. 할머니 앞에 쪼그려 앉아 고들빼기김치 담는 법에 대한 긴 설명을 들었다.

고물상에서 만난 옛 서적. 혹 보물급이라도 있지 않을까 뒤적여본다. 2004년 11월. 사진 / 김선호 객원기자
고물상에서 만난 옛 서적. 혹 보물급이라도 있지 않을까 뒤적여본다. 2004년 11월. 사진 / 김선호 객원기자

한산한 시골장에 활기가 넘치는 곳이 있었으니 그곳은 황학동 벼룩시장 한켠을 옮겨다 놓은 듯한 고물상이다. 옛날 물건들이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는 곳인데 사람들이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다리미, 인두, 화덕, 풍로에 손작두, 칼자루가 심상치 않은 오래된 칼에 옛날 동전과 엽전까지. 십년을 걸려 모은 고물(古物)속에는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놋쇠종에서 일제시대 화폐까지 다양한 물건들이 있었다.

구경꾼 중에 중년부부가 눈에 띈다. “아, 그래. 이런 게 있었지? 그때 말이야, 이걸루 다가….” 새삼스럽게 감회에 젖는 얼굴로 잃어버린 고향 풍경을 떠올려 보는 이들…. 누군가 기둥 한켠에 걸어둔 작은 망태기 같은 것을 만지작거린다. 지푸라기를 꼬아 만든 작은 그물 같았는데 물어보니 소를 끌고 쟁기질 할 때 밭둑에 있는 풀을 못 먹게 하려고 입에 씌우는 주둥망이란다.

고물상 아저씨도 없어서 못팔겠다는 소 주둥망. 2004년 11월. 사진 / 김선호 객원기자
고물상 아저씨도 없어서 못팔겠다는 소 주둥망. 2004년 11월. 사진 / 김선호 객원기자

가격을 물어봤더니 고물상 아저씨가 파는 물건이 아니란다. 그걸 만드는 이가 없어 구할 수조차 없으니 이제는 국보급 보물(?)이라는데, 그렇게 하나둘 없어지는 우리 것들을 한 십년쯤 흐른 후엔 글쎄 어디 가서 찾아야 할까? 다시 발길을 옮긴다.

백발의 할머니가 난뿌리를 소복이 올려놓고 손님을 부르고 있다. 난 옆에 요즘 한창 뜨는 ‘산세베리아’가 한 다발 놓여 있었다. 새집증후군을 제거하는데 효과가 좋다하여 아파트가 많은 도시 사람들 사이로 꾸준히 인기를 누린다는 기사를 보았는데 이 작은 시골장도 예외가 아닌가 보았다.

새집증후군을 예방한다는 산세베리아를 파는 할머니. 2004년 11월. 사진 / 김선호 객원기자
새집증후군을 예방한다는 산세베리아를 파는 할머니. 2004년 11월. 사진 / 김선호 객원기자

시골 할머니가 장바닥에서, 그 이름도 어려운 서양식물을 팔고 있었다. “할머니 , 이 식물 이름 아세요?” “글쎄, 산… 무슨 리아라고 하던데 자꾸 이름을 까먹어”라면서 옆에 있는 아저씨를 돌아본다. “할머니, 산세베리아요, 산세베리아” “내가 이래, 자꾸 잊어 먹는데 옆에서들 가르쳐 줘 알지. 또 잊어 묵것지만.” 할머니가 머쓱한 미소를 짓는다. 글쎄, 그 어려운 이름을 기억하는 게 용하겠다 싶다.

장터 한켠의 수수밭 사이로 가을 볕이 내려섰다. 2004년 11월. 사진 / 김선호 객원기자
장터 한켠의 수수밭 사이로 가을 볕이 내려섰다. 2004년 11월. 사진 / 김선호 객원기자

장이 열리는 포장도로엔 한낮의 열기가 뜨겁게 남아 있지만 도로 옆으로는 가을이 익어가는 농촌 풍경 그대로이다. 밭가로 콩포기를 두른 고추밭이 보이고 그 옆에 옥수수와 수수가 나란하게 서서 익어가는 모습이 정겹다. 고개가 꺾일 듯 잘 여문 수숫대가 사람을 대신하여 시장 안을 구경하듯 고개를 내밀고 있다. 그길 한켠에 시골민박집이 들어서 있었다. 장에 인접한 민박집이름도 소박하게 그냥 ‘시골 민박집’이다.

뻥튀기 아저씨는 어디 가시고 혼자 남은 기게만이 돌아간다. 2004년 11월. 사진 / 김선호 객원기자
뻥튀기 아저씨는 어디 가시고 혼자 남은 기게만이 돌아간다. 2004년 11월. 사진 / 김선호 객원기자

뻥튀기를 하다말고 어디를 가셨는지 뻥튀기 아저씨는 없고 기계만 저 홀로 가을햇살에 뒹굴고 있었다. 뻥이요~, 라고 소리를 치면 기꺼이 귀를 막고 구경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기다려도 뻥튀기 아저씨는 나타날 생각이 없나보다. 길가에 늘어선 수숫대 위로 오후 햇살이 비껴든다.

수수밭을 지나 나무로 만든 이쁜 그릇들을 파는 아저씨를 만났다. 물푸레나무를 여러 해 말린 다음 깎고 다듬어 만든 그릇들이 올망졸망 이쁘다. 가지를 물에 담그면 푸르게 물이 든다 하여 ‘물푸레나무’라 한다. 이 낭만적인 나무가 만들어 내는 그릇들이 다양하기도 하다. 찻통, 수저, 젓가락, 포크, 티스푼, 반기에 다기세트까지…. 물푸레 나무로 만든 티스푼으로 차를 타서 마시면 향기가 더욱 진하지 않을까 싶어 티스푼 몇 개를 사서 장을 돌아 나왔다.

여행잡지에서 왔다고 하니 딸이 서울의 여행사에서 근무한다며 반겨준 물푸레나무 그릇 아저씨. 2004년 11월. 사진 / 김선호 객원기자
여행잡지에서 왔다고 하니 딸이 서울의 여행사에서 근무한다며 반겨준 물푸레나무 그릇 아저씨. 2004년 11월. 사진 / 김선호 객원기자
메밀 부침개를 부치는 냄새가 고소하다. 2004년 11월. 사진 / 김선호 객원기자
메밀 부침개를 부치는 냄새가 고소하다. 2004년 11월. 사진 / 김선호 객원기자

봉평 오일장에 가면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설레임이 있었다. 하지만 재래시장의 쇠퇴는 봉평오일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봉평장은 이제 좀더 규모가 큰 할인마트에 그 자리를 내주고 한산한 풍경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효석문화제 때 만든 섶다리는 나들이 온 가족들의 촬영장소. 2004년 11월. 사진 / 김선호 객원기자
효석문화제 때 만든 섶다리는 나들이 온 가족들의 촬영장소. 2004년 11월. 사진 / 김선호 객원기자
이효석 문학관. 2004년 11월. 사진 / 김선호 객원기자
이효석 문학관. 2004년 11월. 사진 / 김선호 객원기자

봉평장을 지나 이효석문학관을 가기 위해 남안교를 건넜다. 남안교 안쪽으로 효석문화제 때 만들어 졌을 법한 섶다리가 놓여 있다. 봉평장에서 대화장으로 가기 위해 허생원이 조선달과 동이와 더불어 건너던 강이 저 강일까? 강을 건너던 장돌뱅이 위로 달빛이 쏟아져 내렸을 것이고 달빛에 못 이긴 척 허생원은 또 같은 얘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달밤이었으니,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는지 지금 생각해도 도무지 알수 없어. 첫날밤이 마지막 밤이었지. 그때부터 봉평이 마음에 든 것이 반평생을 두고 다니게 되었네. 평생인들 잊을 수 있겠나.”

평생을 잊을 수 없던 옛 여인을 만나러 제천으로 가야겠다던 허생원은 술이 곤드레가 되어 술병을 꿰차고 남안교를 바라보며 헤죽거리고 있고, 그 옆에 언제 봉평에 왔는지 충주댁이 다소곳이 앉아 있다. 효석문화제가 끝난 남안교 주변은 마치 연극이 끝난 뒤 텅 빈 무대 같다. 하지만 이효석과 메밀꽃이 있는 한 봉평은 ‘소금을 뿌린 듯 달빛에 흐뭇하게 젖은 메밀꽃밭’ 속으로 우리들을 기꺼이 초대할 것이고, 메밀묵의 그 담백하고 쌉싸름한 맛이 있는 한 봉평장도 오래 오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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