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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전통마을] 성주 한개마을, 태초의 자연풍광 등에 업고 사는 대쪽같은 선비의 고장
[전통마을] 성주 한개마을, 태초의 자연풍광 등에 업고 사는 대쪽같은 선비의 고장
  • 노서영 기자
  • 승인 2005.09.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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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성주 한개마을의 고즈넉한 풍경. 2005년 8월. 사진 / 노서영 기자
성주 한개마을의 고즈넉한 풍경. 2005년 9월. 사진 / 노서영 기자

[여행스케치=성주] 선비가 되어 보고 싶어, 특히 선비가 많았다는 전통마을 한개마을을 찾았다. 그간 조였던 허리띠를 느슨하게 풀고, 뒷짐을 지고 팔자걸음을 걷는다. 전통 가옥에 들어가 사랑채 거실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본다. 어둑어둑 해가 진다. 방에 들어가 호롱불을 훅 불고 잠자리를 폈더니 고개가 안채를 향해 뚝 떨어진다.

꿀을 품은 참외가 강렬한 햇살에 부풀어 오르다 못해 막 옆구리 터질 것 같은 날이다. 참외로 유명한 성주는 그 옛날 가야부족 연맹의 하나였다. 4세기경 성산가야 또는 벽진가야로 발전했다가 6세기 중엽에는 신라에 병합된다.

이러한 성주에 옛날 큰 나루가 있던 곳이라 하여 ‘한개’라 이름 붙은 전통 한옥마을을 찾았다. 마을 뒤로는 영취산이 병풍처럼 서있고, 앞으로는 흰내(白川)가 흐른다. 역시 한개마을도 배산임수에 어긋나지 않는 옥토에 자리한다.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성산(星山) 이씨들이 대대로 거주해 온 전통마을은, 과거에 합격하고도 벼슬을 마다하고 대쪽같은 선비의 길을 택한 고인들이 많은 마을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것으로는 여덟 채의 가옥과 첨경재라는 재실(齋室 :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을 들 수 있다.

하회댁. 사립문으로 '어험'하며 선비가 들어올 듯 하다. 2005년 8월. 사진 / 노서영 기자
하회댁. 사립문으로 '어험'하며 선비가 들어올 듯 하다. 2005년 9월. 사진 / 노서영 기자

교리댁이란 택호(宅號)가 붙은 한옥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주인의 호나 안주인의 출신지를 따서 택호를 붙였다. 한주종택, 극와고택, 북비고택, 월봉종택, 도동댁 그리고 하회댁과 월곡댁이 그것이다. 푹푹 찌는 듯한 더위 속 시원한 물보다 값진 선물은 드물다.

마을에서 제일 먼저 들른 진사댁(진사 : 과거에 합격한 이에게 내리는 칭호)에서, 안주인이 차가운 사이다 한 잔을 내어 주었다. “성산 이씨 정언공파 30세손인 국자 희자 쓰시는 어른(1868~1939)께서 조선시대 마지막 과거시험에 합격했지요.

진사댁 사랑채의 우물반자 모양의 눈썹천장. 2005년 9월. 사진 / 노서영 기자
진사댁 사랑채의 우물반자 모양의 눈썹천장. 2005년 9월. 사진 / 노서영 기자

그 때문에 진사댁이라 부르게 된 것이고요. 제 바깥분은 그 어른의 증손자 됩니다. 일 때문에 대구에 사는데, 간혹 들러 정원 손질도 하고….” 진사댁 사랑채에서 눈에 띄는 것이 눈썹천장이다.

추녀의 뒷몸과 선자의 짜임을 가리고자 우물반자 모양으로 만든 천장인데, 천장문을 열면 밤하늘의 별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릴 것 같다. 전통 가옥을 볼 때면 곳곳에 깃든 선조들의 세심한 손길에 감탄스러울 때가 많다.

소담한 샛길을 따라 왼편으로 돈재 이석문(李碩文 : 1713~1773)을 기리는 신도비가 나온다. 마을의 북비고택을 지은 돈재 이석문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억울한 죽음을 당하자, 그를 애도하고자 북쪽을 향해 사립문을 내고 평생을 은거했던 호위무관이다.

정조가 그 공을 치하하기 위해 세웠다는 돈재 이석문 신도비이다. 2005년 9월. 사진 / 노서영 기자
정조가 그 공을 치하하기 위해 세웠다는 돈재 이석문 신도비이다. 2005년 9월. 사진 / 노서영 기자

당시,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를 등에 업고 아버지와 상면했다가 이 사실이 알려져 파직 당했다고 전한다. 훗날 이석문의 손자가 되는 이규진(李奎鎭)이 장원급제 했을 때, 정조가 이규진에게, “너의 조부(돈재 이석문)가 세운 공이 가상하다.

아직까지 너의 집에 북녘으로 낸 문이 있느냐” 물으면서, 돈재 이석문 신도비를 세워 주었다는 이야기가 비석에 새겨져 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고, 날이 더워서일까, 마을을 찾는 이도 드물다.

마을 돌담길에 살짝 걸터앉아 고목나무를 바라보니, 나무만큼 늙어 보이는 매미가 울지도 않고 눈을 굴리고 있다. 울기도 벅찰 정도로 힘에 겨운 것일까. 7년이란 긴 세월을 땅 속에서 지내다가, 1주일의 시간을 허락받은 매미.

내일이면 다시 보기 어려울 것만 같다. 월곡댁에 들어갔다. 1911년 이전희가 처음 건립한 가옥인데, 그 부인이 초전면 월곡동에서 시집오면서 월곡댁이라 불린다. 월곡댁은 한개마을에서 부유한 집으로 손꼽히는데, 집터도 비교적 큰 편이다.

사랑채와 안채가 은밀히 통하는 길. 차례로 교리댁과 월곡댁. 2005년 9월. 사진 / 노서영 기자
사랑채와 안채가 은밀히 통하는 길. 2005년 9월. 사진 / 노서영 기자

사랑채, 분가 않은 자녀를 위한 별채 그리고 안채가 있고 그 앞에는 중간 대문인 중문채가 있다. 한 가옥 안에 또 하나의 독립채가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월곡댁 사랑채를 몇 바퀴 돌면서 우연히 사랑채 뒤쪽 날개 부분으로 고개를 숙여야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작은 방문을 발견했다.

그 문은 안채의 왼쪽 모퉁이를 향해 있고, 안채로 들어가는 작은 방문과 마주하고 있다. 동행했던 성주 문화유산해설사, 곽명창씨가 살짝 귀뜸하기를, “옛날 사람들은 내숭이 심하다 아입니까. 하하.” 교리댁 사랑채에서도 유사한 구조를 만날 수 있다.

사랑채 뒤로 제사를 모시는 사당과 안채가 있고, 사랑채 옆 모퉁이로 쪽문이 나 있다. 바로 사랑채와 안채가 은밀히 통하는 길목인 것이다. 사랑채가 손님을 맞이하고 글을 읽던 선비를 위한 곳이라면 안채는 주로 부인과 자녀들의 생활공간이다.

교리댁 사랑채에서 바라본 풍경. 경치를 집에 빌려온 것 같은 수법을 전통조경에서 차경이라 부른다. 2005년 9월. 사진 / 노서영 기자
교리댁 사랑채에서 바라본 풍경. 경치를 집에 빌려온 것 같은 수법을 전통조경에서 차경(借景)이라 부른다. 2005년 9월. 사진 / 노서영 기자

남녀유별(男女有別)을 덕목으로 알았던 당시의 선비들과 아녀자들에게도 역시 숨구멍이 있어야 했던 것인데 막을 수 없는 자연의 섭리를 그 누가 부정하랴. 교리댁 사랑채에 발을 딛고 오르면, 값비싼 풍경화를 방 안에 들여놓은 듯하다.

창문을 넓게 내어 안산의 경치가 액자 속의 살아있는 작품 같다. 건축에서는 이러한 조경법을 ‘경치를 집안으로 들이는 수법’이라 하여 ‘차경(借景)’이라 부른다. 교리댁의 현재 주인은 80세가 넘은 이태영씨로 성주중학교 미술교사를 지냈다.

그래서인가, 곳곳에 그림 도구와 조각 같은 작품들이 놓여 예술가의 집 분위기가 배어 나온다. 한개 마을이 조성된 것은 조선 세종 때이다. 당시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李友)가 처음 이곳에 이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고, 현재는 월봉 이정현(李廷賢) 후손들이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집성촌이다.

한주종택 전경. 한주 이진상의 증손자 되는 이해석옹이 바닥에 뭔가를 적고 있다. 2005년 9월. 사진 / 노서영 기자
한주종택 전경. 한주 이진상의 증손자 되는 이해석옹이 바닥에 뭔가를 적고 있다. 2005년 9월. 사진 / 노서영 기자

해방 후에는 100여 호가 넘었던 한개마을의 공식적 가구 수는 76가구이지만, 빈집도 여럿이라 실거주자는 150명 정도다. 마지막으로 마을에서 제일 안쪽에 있는 한옥인, 한주종택을 찾았다. 한주종택은 1767년(영조 43년) 이민검(李敏儉)이 세우고, 1866년(고종 31년)에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이 새로 고쳐 지금까지 내려온다.

가옥 동쪽으로 1910년에 세워진 정자, 한주정사가 있다. 대청마루에 앉아 연두빛 필터 낀 듯 연초록빛을 발산하는 나무들과 연못을 바라보니, 가슴이 꽉 차 온다. 온 세상이 다 내 것 같다. 정자의 대청마루에는 ‘조운헌도재(祖雲憲陶齋)’라는 현판이 보인다.

주자의 학설을 본받고 퇴계의 주리론을 받든다는 뜻의 '조운헌도재' 현판이 걸린 한주정사. 2005년 9월. 사진 / 노서영 기자
주자의 학설을 본받고 퇴계의 주리론을 받든다는 뜻의 '조운헌도재(祖雲憲陶齋)' 현판이 걸린 한주정사. 2005년 9월. 사진 / 노서영 기자

중국 송대, 주자(朱子)의 학설을 본받고 퇴계의 주리론을 받든다는 의미로 한주 이진상의 사상이 엿보인다. 추정컨대, ‘운(雲)’자는 주자의 호인 운곡산인(雲谷山人)에서, ‘도(陶)’자는 퇴계 이황을 받드는 도산서원(陶山書院)에서 따온 것이리라.  

한주종택을 나와 돌담길을 걷는다. 따사로이 비추이는 햇살이 마을 옆 시내 속으로 발을 디딘다. 햇살을 품은 시내는 영롱한 빛을 낳는다. 마을을 뒤로 하고 나오면서 주머니 속에서 성주에서 딴 참외 한 개를 꺼냈다. 한개마을에서 먹는 참외 한 개 맛이 참 달구나.

Info 가는 길
자가운전 _ 경부고속국도 왜관IC -> 33번국도 -> 성주 -> 월항면 소재지에서 좌회전 -> 한개마을

성주는 참외가 유명하다. 2005년 9월. 사진 / 노서영 기자
성주는 참외가 유명하다. 2005년 9월. 사진 / 노서영 기자

꿀통에 텀벙, 달콤한 성주 참외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하는 성주 참외를 따려면 초저녁이나 새벽이 좋다. 낮에는 40도가 우습게 넘어가서 5분만 있어도 온몸이 축축하게 젖는다. 참외농사는 아시, 두벌, 시벌, 네벌 많으면 끝물까지 다섯 번 정도 수확하게 된다.

성주 주민의 70% 이상이 참외 농사를 한다니, 과연 참외 마을답다. 노란 바탕에 선명한 흰색 줄이 그려진 성주 참외는 자연의 달콤함이 깊이 배어 나온다.

효험있는 약숫물 이야기가 전해지는 감응사. 2005년 9월. 사진 / 노서영 기자
효험있는 약숫물 이야기가 전해지는 감응사. 2005년 9월. 사진 / 노서영 기자

감응사
영취산 중턱에 자리한 감응사(感應寺)는 802년(신라 애장왕 3년)에 보조국사 체징이 창건한 사찰이다. 한개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감응사에는 특효가 있는 약수가 눈길을 끈다. 애장왕이 왕자를 낳았는데, 왕자가 심한 눈병에 걸려 백약이 무효했다.

어느날 왕비가 태자를 위해 기도하던 중, 꿈에 도인이 나타났다. 도인은 왕비에게, 다음날 아침 독수리를 따라가라 하고는 사라졌다. 그 독수리가 지금의 감응사 약수터로 길을 안내했다.

약수로 눈을 씻고 마신 왕자는 바로 눈병이 나았다고 전해지며, 부처님의 은덕을 기리고자 약수가 있는 곳에 절을 창건하고 감은사(感恩寺: 지금은 감응사)라 명하였다. 감응사 스님의 말에 따르면 요즘에도 약숫물을 마시고 눈병이나 피부염이 나았다는 사람이 여럿이라고 한다.

동방사지 7층석탑. 2005년 9월. 사진 / 노서영 기자
동방사지 7층석탑. 2005년 9월. 사진 / 노서영 기자

동방사지 7층석탑
성주에서 왜관 방향으로 7층 석탑이 보인다. 신라 8세기 말 애장왕 때 건립된 석탑으로 당시에는 9층이었던 것이, 홍수로 인해 두 층이 소실되고 현재는 7층만 남았다. 동방사라 불리는 사찰 경내에 있었는데 지금은 사찰은 없고, 석탑만 홀로 남아 비닐하우스 사이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포천계곡
성주에서 가천삼거리를 지나 좌회전, 수륜 방향으로 1km 정도 우측으로 붙어 가다보면, 포천계곡이 나온다. 신계리와 용사리 사이에 있는 이 계곡은 물이 맑고 뼈가 시리도록 차갑다. 성주에서는 오래전부터 피서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계곡으로, 상류로 갈수록 빼어난 자태를 자랑한다.

각지에서 찾아 온, 피서객들은 수박을 한 조각씩 건네며 너도나도 이웃이 된다. 계곡 상류에 만귀정 폭포가 있다. 폭포의 물살이 굉장히 세고 차가우며 수량이 풍부하여 5초간 폭포를 맞고 있으면 온 몸이 차갑게 얼 정도다.

마을 주민의 설명에 따르면, 저녁이 되면 포천 계곡이 선녀탕이 된단다. 선녀는 다름 아닌 마을 주민. 홀라당 웃통을 벗어던지고 계곡물에서 둥둥 몸을 식히고 가기 때문이란다. 

Info 가는 길
자가운전 _ 경부고속국도 왜관IC -> 33번국도 -> 성주 -> 월향면 소재지에서 좌회전 -> 한개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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