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영주] 스무 살, 부석사 안양루 기둥을 안고 나는 생각했었다. 언제가 되더라도, 이 풍경은 참 그리워질 것 같구나 하고. 멀리, 가까이, 어둡고 또 밝게 두 눈 가득 담겨 오는 산자락들이 징하게 고와서 차라리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새벽 기차를 타고 영주역에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부석사까지 가는 동안, 찬란하게 아름다웠던 은행잎의 노래 때문에 귀조차 먹은 듯했지. 적막한 절집,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 앉아 보낸 고요한 몇 시간은 언제, 어느 때 펼쳐 봐도 눈물겹게 소중한 시간이다.
벌써 다섯 번째다, 부석사를 찾은 것이. 공교롭게도 번번이 은행잎이 다 지고 난 뒤, 일주문 오르는 길 언저리 사과나무들도 제 잎을 다 떨군 뒤에야 찾았다.
겨울을 지나 온 산하에 봄바람이 수런거리는 때가 오면 어쩔 수 없이 구례 가는 기차를 타고 화엄사를 찾곤 하는데, 가을엔 또 부석사에 가고 싶어서 몸살을 하게 된다. 그러고 보니 나는 가을의 화엄사를 알지 못하고, 봄날의 부석사를 알지 못한다.
매화와 산수유, 벚꽃의 향연에 푹 빠지게 되는 봄날의 구례와 달리 부석사에서 나는, 서걱대는 마른 이파리의 쓸쓸함을 절절히 맛보게 되는 것이다. 풍성한 계절이 가고, 길가의 아낙들이 빠알간 사과알을 사가라고 외치는 마른 계절의 기억.
올해도 부석사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은 십 년을 하루같이 한결같은 모습으로 나를 맞아 주었다. 다람쥐 한 마리가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한테 놀라 데구르르 석축을 타고 오르고, 안양루 아래에서 소담한 단풍나무 한 그루가 붉게 타오르는 중이다.
무량수전 옆 감나무에는 까치밥으로 남겨 두었다 생각하기엔 좀 많다 싶게 감들이 매달려 있다. 가끔 바람이 불면 잊고 있었다는 듯, 따 먹어 봄시롱, 약오르지롱, 하면서 깐들깐들 흔들리며 서 있다.
쨍하게 푸른 하늘과 감이 만들어내는 빛깔의 조화가 기껍고 고맙다. 나무들은 비탈에 서서 빈 가지를 흔들고 나는 그 나무들 아래에서 의상대사와 선묘의 사랑 이야기에 마음 설렌다. 사랑의 힘이란 무겁고도 큰 것이어서, 그 커다란 돌을 이고 있는데도 조금도 버거워 보이지 않더라.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도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루, 조사당, 응향각 들이 마치도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싶어진다.
이 대자연 속에 이렇게 아늑하고도 눈맛이 시원한 시야를 터줄 줄 아는 한국인, 높지도 얕지도 않은 이 자리를 점지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층 그윽하게 빛내 주고 부처님의 믿음을 더욱 숭엄한 아름다움으로 이끌어 줄 수 있었던 뛰어난 안목의 소유자, 그 한국인, 지금 우리의 머릿속에 빙빙 도는 그 큰 이름은 부석사의 창건주 의상대사다.”
최순우 선생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굳이 가져오지 않더라도, 무량수전 앞에서 건너다보이는 산자락에 깊이 감명받지 않을 재간이 없다.
유홍준 장관도 최순우 선생 덕에 ‘사무치는’의 말뜻을 제대로 알게 됐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번 부석사 여행은 역사학연구소의 박준성 선생님과 함께였는데, 소백산 자락이 불어넣은 신명 덕분인지 선생님은 무량수전 앞에 서서 저 멀리 능선들이 덩실, 춤이라도 출 것처럼 보인다고 하시며 어깨춤을 보여 주셨다.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건너다보는 그 아름다움 앞에서 무장해제당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듯하다. 배흘림기둥을 어루만지다가, 잘 쌓은 석축을 또 한 번 쓸어보다가, 딸강딸강 풍경소리에 마음을 빼앗겼다가, 나무들 그림자를 밟으며 걷다가…. 마음 내려놓고, 멀리 아스라한 능선들을 바라보며 서 있는, 사무치게 고마운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