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인천] 2006년 ‘굴업도 골프장 개발 추진’ 그리고 2014년 ‘굴업도 골프장 개발 전면 백지화’.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인천의 작은 섬에 골프장을 짓겠노라 선언했다가 그 뜻을 거두어들였다. 도대체 8년이라는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 속사정을 알 길은 단 하나. 굴업도에 불어 닥친 개발 열풍이 멎은 지금, 배를 띄워라, 어기야 디어차, 굴업도로 가잔다.
“저기 손가락 같은 바위 보여요? 그게 바로 삼형제 바위입니다. 이제 도착이네요.” 인천여객터미널에서 덕적도, 덕적도에서 다시 잔잔해진 바닷길을 따라 두 시간을 달렸을까. 재작년에 이어 두 번째 방문이라는 이상경 씨가 반가운 임을 다시 본 듯 알은체를 한다. 일러준 방향을 내다보니 거인의 손가락처럼 뭉뚝하고 거대한 3개의 바위가 보인다. 그 뒤로 목이 긴 공룡이 바다에 넙죽 엎드려 있는 듯한 인천의 작은 섬, 굴업도가 제 모습을 드러낸다.
“선착장에서 민박집이 모여 있는 큰말 방향으로 굴업도 옛 숲길이 있고, 그 반대편 목기미 해변을 따라가면 덕물산과 연평산이 나와요. 연평산에서 보는 경치가 굴업도 제일이라고 하대요. 우리는 산부터 올라갔다가 큰마을 쪽으로 내려오려고 하는데 같이 갈래요?”
초행자를 위한 제안임을 알면서도, 조심스레 먼저 둘러보고 싶은 곳이 있노라 거절한다. 선착장에는 민박집 트럭이 마중을 나와 있다. 하루에 배가 1~2편 드는 굴업도에서의 숙박은 선택이 아닌 필수. 일찌감치 꼬리 살랑대는 2마리 견공 호객꾼에게 발이 붙들려 트럭에 오른다. 고개를 들어 보니 꼭 한 번 갔다 와야지 마음먹었던 개머리 능선이 코앞이다.
사라질 뻔한 금빛 낙원에서
능선에 다리가 달려 어디로 도망을 칠 것도 아닌데, 짐을 풀자마자 가는 길부터 묻는다. 한때 골프장으로 개발될 자리였다는 것, 하마터면 영영 못 볼 경치였다는 사실에 괜히 조급하다. 그런 마음을 읽었는지 굴업도의 전 이장 서인수 씨가 가는 길을 차분히 일러준다.
“큰말 해변을 따라가다보면 그 끝에 철문이 하나 나와요. 그 철문 따라 내리 걸으면 거기가 개머리 능선이죠. 그 자리가 매, 먹구렁이, 왕은저표범나비 같은 멸종위기 동물 둥지거든요. 애초에 사람 것이 아닌데 거기를 깎아서 공을 칠 생각을 했다는 게 참 씁쓸한 거죠.”
짚어준 길로 마을을 가로질러 짧은 해변 산책을 마치고 바위 한가운데 나 있는 철문 위로 오른다. 생각보다 험한 된비알에 이 길 맞나, 뒤돌아보다 비탈길 조금 올라왔다고 끝에서 끝이 보이는 작은 섬인데 길 잃어 봤자 얼마나 잃겠나 싶어 앞만 보고 무작정 걷는다.
몇 해 전 보령에서 바다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무창포 신비의 바닷길을 걸어본 기억이 있다. 만약 그 길이 지각변동으로 꿀렁거리다 바다 위로 둥글게 솟아오르면 지금의 풍경이 되지 않을까. 양옆으로 바다를 낀 둥근 능선을 따라 걸으며 싱거운 상상을 한다. 축구공이라도 하나 굴리면 또르르 바다에 떨어지는 과정이 느린 동작으로 보일 것만 같다.
시야를 간질이는 수크령이 눈에 띄게 많아지더니 이미 개머리 능선 한복판. 누구는 풀길이라 하고 누구는 꽃길이라 한다던데 눈앞의 풍경은 말 그대로 ‘금 길’이다. 능선에 쏟아진 햇볕을 받아 반짝반짝 눈부신 수크령과 어른 허리께 쯤 자란 억새 군락 한가운데 한사람이 겨우 지날 정도의 좁다란 길이 나 있다. 마치 숱 많은 어린아이 머리를 바리깡으로 한 줄 밀어 놓은 듯 아니, 양옆으로 가르마를 타 놓은 좁다란 길이 저 멀리 능선의 끝자락까지 이어진다. 어안이 벙벙할 정도의 풍경에 걷다가 서다가 앉다가를 반복한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이 풍경을 나누며 함께 걷는 이가 없다는 것. 그조차 메뚜기보다 큰 팥중이가 펄쩍펄쩍 뛰어오를 때나 듣기 좋은 새소리가 들릴 때면 까맣게 잊게 되니 퍽 고마운 일이다.
“혹시 아래쪽에 텐트 칠 자리 있나요?” 사슴에 쫓겨 능선의 끝자락인 낭개머리까지 밀렸다가 돌아오는 길. 백패커 이석철 씨와 김귀현 씨와 마주친다. “사방이 눕기 좋은 자리예요. 한 서너 곳 정도 있어요” 하고 돌아서는데, 바다 곁에 집을 지을 두 사람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아마도 오늘 개머리 능선에서는 사슴과 사람이 함께 잠자리에 들 것이다. 그 위로 별똥별이라도 하나 떨어지면 같은 소원을 빌겠지. 이 잠자리가 오래도록 안녕하길, 하고.
세대를 타지 않는 굴업도 연가
개머리 능선 왕복 3km. 그리 길지 않은 여정이었으나 뱃속에서는 이미 전쟁이 났다. 밥 짓는 냄새에 몸만 비비 꼬다가 “식사 하세요!” 반가운 저녁 알람에 후다닥 밥상 앞에 앉는다. “직접 딴 굴이에요. 수저로 굴을 좀 덜어서 양념장 쳐서 밥이랑 비벼서 들어봐요.” 서인수 씨가 아내 최인숙 씨의 밥상을 제대로 즐길 방법을 일러준다. 한 알 한 알 탱글탱글 맛좋은 굴, 직접 따서 말린 도톰한 김, 목이 멜 적마다 된장을 풀어 구수하게 끓인 아귀탕 한 입. 뱃속이 따뜻해지고 나니 허기에 밀려났던 궁금증이 하나둘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한다. 굴업도에 불었던 개발의 바람, 부부가 기억하는 지난 8년간의 이야기 말이다.
“골프장을 세우고 리조트도 지으면 한마디로 섬이 장사가 됩니다. 개발은 해도 좋은데 이 아름다운 섬이 특권층만 즐길 수 있기 되는 꼴은 못 보겠습디다. 그래서 내가 칠 수 있는 난리는 다 쳤어요. 남들 다 계란으로 바위 친다고, 어떻게 대기업을 이기겠느냐고 포기하라고도 하는데 포기할 수가 있어야지. 그렇게 당장에는 지켰단 말이죠. 안심하긴 이르지만요.”
남들은 낙원이라고 부르는 섬을 지키려 8년을 가시방석에서 살았던 부부의 얼굴에서 고단함을 읽는다. 그 덕에 쉴 곳 잃지 않았던 타지인은 두 분 덕에 그래도 섬이 옛 얼굴을 잃지 않았다고 인사를 전하는 것밖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변치말자 해도 사람 사는 곳인데 어떻게 안 변해요. 굴업도도 변했죠. 한 30년 전에는 어선도 스티로폼을 안 쓸 때라 해변이 아주 평안했어요. 백사장도 차가 다닐 정도로 아주 단단했고 때마다 바다에서 후리질도 했었지요. 그땐 돌도 나무도 참 자연 그대로였는데….”
부부가 기억하는 굴업도는 지금보다 더 아름다운가 보다. 참 좋았지, 하는 말에 조심스레 지금도 좋아요, 하고 대꾸해본다. 사슴은 금빛으로 물든 개머리 능선을 뛰놀고 사람의 기척보다 푸드덕, 붕붕, 바스락 바스락, 작은 새와 곤충의 날갯짓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리는 섬. 이젠 비바람 불 때마다 그 섬을 걱정하고 비바람 그치면 그 섬을 그리워지리라. 어쩜, 사람도 아닌 것에 이토록 완벽히 반할 수 있단 말이냐.
Tip. 굴업도 여행
굴업도에는 굴업도 민박(032-832-7100), 장씨민박(032-831-7833) 등 민박집이 5~6곳이 있다. 숙박료는 주중과 주말 구분 없이 5만원이며 식당은 따로 없으나 숙박에 앞서 민박집에 미리 식사를 부탁하면 풍성한 어촌밥상을 1인당 7000원에 맛볼 수 있다.
INFO. 굴업도
주소 인천시 옹진군 덕적면 굴업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