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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도심 속 숨은 문화 유적 ⑩] 흔들리는 나라의 불안한 경사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
[도심 속 숨은 문화 유적 ⑩] 흔들리는 나라의 불안한 경사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
  • 구완회 작가
  • 승인 2013.09.1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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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3년 10월 사진 / 구완회 작가
2013년 10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여행스케치=서울] 조선의 26번째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첫 황제였던 고종의 재위 기간은 44년에 이른다. 고종이 12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지 꼭 40년이 되던 해, 이 경사스러운 날을 기념해 광화문 앞에 비석을 세우고 비각을 둘렀다. 그리고 100여 년이 훨씬 더 지난 지금까지 기념비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마도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본 적이 있으리라. 광화문 한복판, 이순신 장군 동상을 바라보고 오른쪽, 교보빌딩 바로 옆에 뜬금없이 자리 잡은 비각 하나를. 하지만 늘 그렇듯 시내를 지나는 차 안에서, 혹은 바쁜 걸음 가운데 ‘이게 뭐지?’하고는 다시 가던 길을 갔으리라. 오늘은 잠깐 걸음을 멈추고, 이 기념비를 설명하는 안내판을 천천히 읽어보도록 하자. 비각을 둘러싼 울타리 안에 있는 안내판의 내용은 이렇다.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 이 비는 1902(광무 6)년에 세워졌다. 비문에는 고종(재위 1863~1907)이 즉위한 지 40년이 된 것과 51세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입소한 것,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의 칭호를 쓰게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웠다고 씌어 있다. 돌거북 위에 세워진 비석 앞면에는 ‘대한제국 대황제 보령 망육순 어극사십 년 칭경기념송’이라는 글이 새겨 있다. 당시 황태자인 순종이 글씨를 썼다. 비를 보호하기 위한 작은 규모의 비각에 ‘기념비전’이라는 현판을 달아 격을 높였다. 비각엔 ‘만세문’이라 새긴 무지개 모양의 이중문이 있다.” 

2013년 10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일본인 집의 대문이 되었다가 해방 후 제자리를 찾은 만세문. 2013년 10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칭경’이라는 아이러니
우선 비의 이름부터 살펴보자.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 칭경(稱慶)이란 경사스러운 일을 기뻐한다는 뜻이다. 어떤 경사스러운 일인가? 고종이 왕위에 오른 지 40년이 된 것, 70세 이상의 고위 관리들의 공식 모임인 기로소의 일원이 된 것(왕도 나이가 들면 기로소에 가입했다), 그리고 황제가 된 것. 1902년 옆의 괄호 안에 있는 ‘광무’가 바로 대한제국을 연 고종 황제의 연호다. 황제만이 쓸 수 있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것은 조선  개국 이래 처음이었다. 광무는 왕망의 손에 무너진 한나라를 다시 일으킨 후한의 초대 황제, 유수의 연호. 아마 고종도 제국주의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 무너져가는 조선을 다시 일으키고 싶은 바람을 담았으리라. 

이렇듯 1902(광무 6)년은 세 가지 경사가 겹친 해였지만, 동시에 갓 태어난 대한제국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리던 때였다. 당시에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호시탐탐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 기회만 엿보는 일본과, 아관파천 이후 한반도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러시아 사이에서 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고종은 강대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었지만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결국 러시아와 일본의 갈등은 전쟁으로 이어지고, 러일전쟁의 승자인 일본이 조선을 차지하게 되었다. 약소국에 불과했던 대한제국의 ‘제국’처럼 ‘칭경’도 희망, 혹은 아이러니가 가득한 이름이다. 


황태자였던 순종이 비문을 쓴 것은 그가 29세 때의 일이었다. 고종을 노린 독커피를 마신 이후로 총기를 잃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일본이 만들어낸 루머에 불과할지라도, 당시 황태자 순종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의 즉위 40년을 기념하는 비각에 ‘기념비전’이란 현판을 달아 격을 높이는 일 정도랄까? ‘전’이란, 건물에 붙이는 이름 중에서 가장 격이 높은 것으로 근정전 같은 궁궐의 중요 건물에 주로 붙인다. 무지개 모양의 만세문에는 지금도 여러 마리의 서수가 사악한 기운을 막고 있다. 하지만 어떠한 서수도 한반도를 파고들어오는 제국주의의 마수를 막을 수는 없었다.   
 

2013년 10월 사진 / 구완회 작가
교보빌딩 옆 칭경비전, 왠지 세 들어 사는 모습이다. 2013년 10월 사진 / 구완회 작가

희망은 사라지고 비석만 남다
일제에게 나라가 넘어가고 조선의 건물들도 수난을 맞았다. 경복궁 정문에 조선총독부가 들어서면서 사라질 뻔한 광화문이 겨우 목숨을 보존해 다른 자리로 옮겨가고, 경복궁 안의 다른 건물들도 대부분 사라지거나 훼손되었다. 궁궐이 이런 상황이니 그 앞 육조거리에 있던 건물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런 와중에도 칭경기념비전은 용케 제자리를 지켰다. 비록 한때 무지개를 닮은 만세문은 어느 일본인이 떼어가서 자기 집 대문으로 사용했지만 말이다. 이 만세문 또한 광복 이후에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지금은 우람한 교보빌딩의 기세에 눌려 세 들어 있는 듯 어색한 모습이지만,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각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서울 시내의 몇 안 되는 유적 중 하나다. 

2013년 10월 사진 / 구완회 작가
대한제국 황제 고종과 황태자 순종. 2013년 10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칭경기념비는 다행히 제자리를 지킬 수 있었지만, 기념비의 당사자인 고종의 이후 삶은 고단한 것이었다. 기념비가 서고 3년 후인 1905년, 조선은 일본과 을사조약을 맺고 외교권을 상실한 보호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리고 다시 2년 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은 비밀리에 특사를 파견하지만 그들은 회담장 문 앞에서 문전박대를 당하고, 일제는 그 일을 꼬투리 삼아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을 황제로 ‘삼는다’. 즉위 44년을 맞은 고종도, 칭경기념비문을 썼던 순종도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 뒤의 일은 일사천리, 조선은 일제의 보호국에서 식민지로 몰락하고, ‘덕수궁 전하’로 유폐된 고종은 살아서 500년 종묘사직이 종말을 고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즉위 40년 칭경기념비에 담았던 희망은 사리지고 비석만 덩그러니 남은 셈이다. 

그 기념비전 곁을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치고 있다. 기념비전은 100여 년 뒤의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들려주고 있는 것일까? 다음에 그곳을 지날 기회가 있다면, 그 앞에 잠시 머물러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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