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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여행지에서 만난 3·1 운동] 어둠 속 빛나는 별이 되어준 시, 윤동주의 서촌
[여행지에서 만난 3·1 운동] 어둠 속 빛나는 별이 되어준 시, 윤동주의 서촌
  • 권다현 여행작가
  • 승인 2022.02.10 11: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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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문학관. 사진/ 권다현 여행작가

[여행스케치=서울]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문학에 특별히 애정을 두지 않더라도 <서시>의 첫 구절은 자연스레 다음 시구를 떠올리게 한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 3월이 다가오면 한번쯤 다시 꺼내어 읽고 싶은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따라 서울 서촌자락을 거닐어 본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굴욕적인 창씨개명을 닷새 앞두고 자신의 시 <참회록>에 처참한 부끄러움을 남겼던 윤동주는 오랫동안 독립운동가보다 민족시인으로 표현됐다. 영화 <동주>에서도 그의 사촌인 송몽규는 “니는 계속 시를 쓰라, 총은 내가 들꺼이까”라며 보다 적극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고, 그런 송몽규를 윤동주는 내내 선망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과연 그는 독립의 열망을 담은 시로 일제에 저항했던 감수성 여린 시인이었을 뿐일까.   

정미소 내에 전시된 영화 ‘동주’ 속윤동주. 사진/ 권다현 여행작가
누상동 하숙집의 옛 모습. 사진/ 권다현 여행작가

어쩌면 가장 행복했던 시절, 누상동 하숙집 

윤동주는 만주 북간도의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영화 <동주>가 강원도 고성 왕곡마을에서 촬영된 것도 남한에서는 보기 어려운 북방식 전통가옥이 다수 남아 있기 때문이다. 조선인들이 함께 모여 살던 이 마을은 민족교육운동의 중심지로, 그 이름도 동쪽 나라 즉 조선을 밝히는 마을이란 뜻을 담았다. 통일운동으로 유명한 문익환 목사도 명동촌 출신이며, 안중근 의사도 이곳에서 사격연습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윤동주는 항일 분위기가 거셌던 평양 숭실학교에 진학했고,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문익환과 함께 자퇴했다. 그저 눈빛 말간 문학소년만은 아니었던 것. 

문학에의 열정도 대단했다. 의대나 법대에 진학하기를 원했던 아버지의 거센 반대에도 결국 19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 진학에 성공한다. 여기에서 또 한명의 벗이자 후배인 정병욱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훗날 전쟁터에 끌려가면서도 윤동주의 시집을 끝내 지켜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도록 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와 함께 누상동에서 하숙을 하던 시기는 시인의 짧은 생을 통틀어 가장 평화롭고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이들은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을 했는데, 정병욱은 <잊지 못할 윤동주>에서 “저녁 식사가 끝나면, 우리는 대청에서 차를 마시며 음악을 즐기고, 문학을 담론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성악가인 그의 부인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듣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또 “마음을 주고받는 글벗이 곁에 있었고, 암울한 세태 속에서도 환대해 주는 주인 내외분이 있었기에, 즐거운 가운데서 마음껏 시를 쓸 수 있었”다며 “시집 제1부에 실린 많은 작품들이 그 해 5월과 6월 사이에 쓰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적었다. 아쉽게도 이들이 머물던 하숙집은 이미 사라졌지만, 지금도 그 자리에 윤동주의 옛 하숙집을 알리는 안내판이 자리해 희미한 흔적이나마 더듬어볼 수 있다.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수성동 계곡. 사진/ 권다현 여행작가
윤동주문학관 근처에 마련된 시인의 언덕. 사진/ 권다현 여행작가

시상을 다듬어 걷던 길, 수성동계곡

누상동 하숙집에서 걸어서 5분 남짓이면 인왕산 자락에 접어드는데, 윤동주는 이 길을 따라 아침저녁 산책하기를 즐겼다. 차가운 계곡물로 세수하며 아침잠을 깨기도 하고, 시가 써지지 않는 밤이면 하릴없이 계곡을 누볐다. 윤동주가 얼굴을 씻었다는 수성동 계곡은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에도 등장할 만큼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한때 옥인아파트가 들어서며 사라졌던 것을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해 시인이 거닐던 길을 가늠해볼 수 있다. 다만 골짜기가 깊지 않아 평소에는 물을 보기 어렵다. 비가 충분히 내린 다음날 찾아야 계곡의 운치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데, 조선시대에도 그러했는지 추사 김정희가 <수성동 우중에 폭포를 구경하다(水聲洞雨中觀瀑此心雪韻)>라는 시를 남겼다.      

수성동 계곡 상류에는 청계천 발원지가 자리한다. 도룡농과 가재가 산다는 작지만 맑은 물길이다. 여기서 조금만 더 걸어 올라가면 인왕산 스카이웨이를 만나게 되는데, 이 길을 따라 걸으면 부암동 윤동주문학관과 시인의 언덕으로 이어진다.

윤동주문학관 입구. 사진/ 권다현 여행작가

공간이 시가 되다, 청운동 윤동주문학관 

윤동주문학관은 원래 수도가압장이었다. 가압장이란 느려진 물살에 압력을 가해 다시 힘차게 흐르도록 하는 곳인데, 이는 어쩌면 시의 역할과도 닮았다. 또 리모델링 공사 중 발견한 두 개의 물탱크를 하나는 ‘열린 우물’로 다른 하나는 ‘닫힌 우물’이라 이름 붙였는데, 이는 윤동주의 시 <자화상>에 등장하는 우물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실제 물탱크로 사용됐던 공간이라 벽에 남은 물때마저 시적으로 느껴진다. 지붕을 걷어낸 열린 우물은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눈이 오면 눈이 오는 대로, 그야말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빼꼼히 가지를 뻗은 팥배나무도 애틋하다. 

두꺼운 철문을 열고 들어선 닫힌 우물은 어두운 내부와 서늘한 공기가 시인이 마지막 숨을 거둔 후쿠오카 형무소를 떠올리게 한다. 윤동주는 불과 다섯 달 만에 단란했던 누상동 하숙집을 떠나게 되는데, 이는 일본 형사가 수시로 찾아와 서가에 꽂혀 있는 책 이름을 적어가거나 고리짝을 뒤져 편지를 빼앗아가는 등 감시가 날카로워졌기 때문이다. 이후 힘을 키워야 한다는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일본 유학길에 올랐던 그는 1943년 교토에서 체포돼, 이듬해 3월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됐다. 당시 판결문에 따르면 윤동주는 “조선 민족의 실력과 민족성을 향상해 독립이 가능하게 한다.”며 구체적인 독립운동의 방향성을 밝히고 있다. 독립의 열망을 담은 시 이상으로 현실에서도 일본 재판관 앞에서 당당하게 독립을 외쳤던 것. 닫힌 우물에서는 광복을 불과 6개월 앞두고 스러진 시인의 안타까운 생을 담은 짧은 영상이 상영된다. 

문학관 왼쪽으로 난 계단을 따라 올라서면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드넓게 펼쳐진다. 이곳에 서면 서울 시내가 한눈에 펼쳐지는데, 어쩌면 시인도 여기에서 조국의 서글픈 현실에 아파하고 자신에게 닥칠 어두운 미래를 짐작했을지도 모르겠다. 시인의 언덕에는 <서시>를 새긴 시비와 함께 윤동주의 꼿꼿한 기개를 닮은 소나무 열 그루가 그림처럼 서 있다. 여기서 바라보는 야경도 아름다워 이를 안내하는 ‘서울밤풍경’표지판도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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