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호 표지이미지
여행스케치 5월호
[비대면 여행지①] 행복한 고립을 느끼다, 영주 무섬 마을
[비대면 여행지①] 행복한 고립을 느끼다, 영주 무섬 마을
  • 민다엽 기자
  • 승인 2022.02.10 17: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평화로운 분위기의 무섬마을 전경. 사진/ 민다엽 기자

[여행스케치=영주] 나는 오늘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의 일을 내일로 미루고, 온전히 쉬어 보기로. 오로지 내가 보내고 싶은 시간만을 생각하고 싶어졌다. 영주의 이 작은 시골 마을에 파묻혀 ‘행복한 고립’을 마음껏 누렸다.

빌딩 숲을 가득 메운 자동차 소음과 바쁘게 움직이는 도시의 소란스러움을 뒤로 한 채 남쪽으로 내달렸다. 점차 시야에서 높은 건물이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시원하게 뻗은 도로가 이어진다. 여전히 차창 너머로는 서울로 향하는 꽉 막힌 행렬이 이어진다. 평일 오전, 나는 지금 익숙한 것들로부터 탈출 하는 길이다.

고요한 산 속 마을에 동이 트고 있다. 사진/ 민다엽 기자
외나무다리 위로 여행자들이 걷고 있다. 사진/ 민다엽 기자
구불구불 가느다란 외나무 다리가 이어진다. 사진/ 민다엽 기자

주민들의 삶과 애환을 함께한 외나무다리

고속도로를 타고 3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곳은 경상북도 영주에 위치한 무섬마을. 시골 마을의 따사로운 풍경에 마음이 더없이 말랑말랑해진다. 무섬마을은 ‘물 위에 섬’이란 뜻을 가진 수도리(水島里)의 순우리말로, 마을의 삼면이 내성천으로 둘러싸여 있어 마치 하나의 섬처럼 보이기도 한다.

무섬마을은 불과 40년 전까지만 해도 내성천을 가로지르는 외나무 다리로만 마을에 드나들 수 있던 오지 마을이었다. 1979년 수도교가 개통되기 전 까지 30~50cm 남짓의 폭 좁은 장대에 의지해 물을 건너야 외부와 소통할 수 있었던 것. 게다가 장마 때마다 다리가 물에 떠내려가 매년 외나무다리를 새로 만들어야 했다고 한다. 이 마을에 ‘꽃가마 타고 건너와서, 꽃상여 타고 나간다’는 말이 전해지는 까닭이다.

이처럼 마을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함께한 외나무다리는 이젠 전통이 되어, 여전히 무섬마을을 찾는 여행자들에게 웃음을 전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이 외나무다리를 찾아와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남기고, 매년 10월 열리는 ‘무섬 외나무다리 축제’에서는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꽃상여의 모습도 볼 수 있다.

김욱가옥의 류인희 할머니. 사진/ 민다엽 기자
김욱가옥의 류인희 할머니. 사진/ 민다엽 기자
초가형태의 숙소에서 민박을 할 수 있다. 사진/ 민다엽 기자
이른 아침, 커피 한잔의 여유가 달콤하다. 사진/ 민다엽 기자

 

마음이 따뜻해지는 공간

“나이 스물에 안동에서 이곳으로 시집을 왔지요. 할아버지(김욱)가 선생님이라 함께 타지에 나가 오랫동안 비웠지만, 그래도 어른들이 오랫동안 살아온 집이잖아요. 할아버지가 나고 자란 곳이기도 하고…. 힘닿을 때까지는 고치고 가꾸면서 살아야죠.” 류인희 할머니와 김욱 할아버지 부부가 사는 아담한 초가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김욱 가옥’이란 이름의 이 집은 40여 년간 교직 생활을 하던 김욱 할아버지의 생가로, 20년 전 타지 생활을 마치고 부부가 함께 이곳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나지막한 나무 담장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서니, 툇마루에서 주인 할머니가 손을 흔들며 반갑게 맞아준다.

햇살 좋은 곳에서 한가롭게 낮잠을 자던 고양이도 ‘그르릉’거리며 마중을 나온다. 초가집에 살아본 적은 없지만서도, 왠지 모르게 고향에 온 듯 정겨운 기분. 아침부터 달궈놓았을 뜨끈한 온돌방과 방 앞에 놓인 고무 털신, 세월을 머금은 집안 곳곳에서 다정한 마음이 느껴진다. 마당에 꾸며진 빛바랜 정원도 겨울을 지나 봄과 여름이 오면 녹음이 무성해지겠지. 커피를 끓여 플라스틱 의자에 대충 앉아 햇살이 채워지는 시간을 멍하니 지켜봤다. 따스함이 집 곳곳을 빠짐없이 채우고 있었다.

나는 오늘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같았다. ‘될 테로 되라지!’ 취재고 일이고 일단은 이 여유를 만끽하고 싶었다.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마을 구석구석을 느긋하게 서성거렸다. 돌담을 따라 오랜 전통을 이어온 기와집과 초가집이 보기 좋게 어우러져 있다. 괜히 남의 집 담벼락을 기웃거려도 보고 고양이들과 수다를 떨며 대추차를 마시면서 시간을 보냈다.

무섬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옛 방식을 지키며 살고 있다. 사진/ 민다엽 기자 
해우당 고택에 걸려있는 흥선대원군의 현판. 사진/ 민다엽 기자
고양이들이 한가롭게 낮잠을 자는 모습을 마을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사진/ 민다엽 기자

오랜 전통을 이어오다

현재 무섬마을에는 만죽재와 해우당을 비롯해 총 9점의 지정문화재와 100년 넘은 고택이 16동이나 남아있다. 지난 2013년 마을 전체가 국가 민속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무섬마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중반, 반남 박씨의 박수 선생이 이 마을에 터를 잡으면서다.

박수 선생은 농토조차 없던 이 척박한 땅에 만죽재를 짓고, 충절의 마음으로 은둔 군자의 삶을 살고자했다. 그의 살림집인 만죽재 고택은 무섬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가옥이자 나라를 위한 선비의 충정이 깃든 곳으로, 이러한 정신은 후대까지 이어져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의 동기가 되기도 했다.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92호로 지정된 해우당 고택도 볼 만하다. 해우당 고택은 고종 16년(1879) 의금부도사를 지낸 김락풍의 살림집으로 흥선대원군의 글씨가 적힌 현판으로 유명하다.

 

‘십 리라 푸른 강물은 휘돌아 가는데 / 밟고 간 자취는 바람이 밀어가고 / 끊길 듯 끊길 듯 고운 메아리’ <조지훈, 별리(別離) 중에서>

또 무섬마을은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처가(김성규 가옥)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경북 영양 출신인 조지훈 시인은 1939년 이곳으로 장가를 오면서 무섬마을과 인연을 맺게 됐다. 서울로 공부를 하기 위해 어쩔수 없이 처와 떨어져 생활하던 그는 이별의 아픔을 ‘별리(別離)’라는 시를 통해 표현했다. 시 곳곳에서는 무섬마을의 풍경이 애틋하게 그려진다. 이 밖에도 마을에 대한 자세한 역사를 알고 싶다면 무섬자료전시관을 방문하면 다양한 역사와 전통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무섬마을에 처가를 둔 조지훈 시인. 마을 한켠에 '별리' 비석이 있다. 사진/ 민다엽 기자
집집마다 놓여진 항아리가 놓여있다. 사진/ 민다엽 기자
무섬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음식점, 무섬식당. 사진/ 민다엽 기자

사실 고백하자면 무섬마을에는 여행자들이 기대하는 굉장한 볼거리는 부족한 편이다. 아니, 볼 수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일 수도 있겠다. 대부분의 가옥이 현지인들이 실제 생활하는 주거 공간인 만큼 마음대로 들락거릴 수 없기 때문. 현재 마을에는 약 50여 가구의 주민들이 예전 생활양식 그대로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이곳에서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여느 관광지와는 다른 특별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무섬마을은 일상에서 벗어나 느긋하게 본인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하는 여행지다. 무섬마을을 보다 확실하게 느껴보고 싶다면 민박이나 각 가옥마다 운영하는 한옥체험프로그램을 이용 해보길 추천한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