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호 표지이미지
여행스케치 5월호
[인문학 여행] 빼앗긴 들에서 피어난 저항의 꽃, 시인 이상화
[인문학 여행] 빼앗긴 들에서 피어난 저항의 꽃, 시인 이상화
  • 민다엽 기자
  • 승인 2022.08.19 08: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구 계산동에 위치한 이상화 고택. 사진/ 민다엽 기자
대구 계산동에 위치한 이상화 고택. 사진/ 민다엽 기자

[여행스케치=대구] 대표적인 항일 문학가로 손꼽히는 이상화는 서슬 퍼런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역천>, <나의 침실로>, <시인에게>, <통곡> 등 암울한 시대적 배경을 직시하고, 조국의 해방을 염원하는 보석 같은 시를 남겼다. 그의 자취를 따라 빛바랜 골목을 걸었다

대구의 계산동과 남성로 일대에는 20세기 한국 근대문화를 이끌었던 예술인들의 삶터와 활동상이 곳곳에 남아있다. 이상화, 백기만, 현진건 등 당시 대구의 문인들은 이 일대를 중심으로 창작 활동을 했다. 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6·25 전쟁을 거치면서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예술인이 대구로 몰려들었고, 계산동 일대는 대구의 문화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된다. 빛바랜 골목엔 여전히 그들을 기리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이상화의 대표작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1926년, <개벽(開闢)> 6월호 실리며 세상에 나왔다. 사진/ 민다엽 기자
향촌문화관에는 일제강점기부터 6·25전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인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 민다엽 기자

 

황야에 핀 저항의 꽃, 대구 항일문학

이상화와 현진건, 백기만 등은 대구를 대표하는 지조 있는 문인들이다. 당시 일제의 검열과 억압에도 위축되지 않고, 시대성과 문학성을 두루 갖춘 항일 저항 문학을 선보이며, 꺾여가는 민족혼에 불을 지폈다. 이상화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통해 나라 잃은 백성의 비애와 저항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으며, 현진건은 소설 <운수 좋은 날>을 통해 인간에 대한 연민과 비애, 사회에 대한 비판과 분노를 표출했다. <청개고리>, <상화와 고월> 등을 낸 백기만은 이상화, 현진건과 함께 동인지 <거화>를 출판했으며 해방 직전까지 항일운동을 벌인 지사이기도 하다.

이상화는 190145, ‘근대 지식인들의 도서관으로 불리는 우현서루와 시무학당을 설립하고,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던 소남 이시우와 근대 여성운동의 선구자였던 어머니 김신자 사이에서 태어났다. 민족성 짙은 가정환경에서 자란 어린 이상화의 가슴속에는 자연스럽게 저항의 불꽃이 자랐다. 그의 맏형인 이상정 장군 역시, 일제 강점기 조선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투철한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이었다. 이처럼 이상화의 시에 조국의 아픈 현실과 저항정신이 담긴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향촌문화관 아카이브. 이상화의 어린 시절 모습. 사진/ 민다엽 기자
대구에서 태어난 이상화는 우리나라의 근대문학을 이끌었던 민족시인이다. 사진/ 민다엽 기자

 

비통한 현실에 대한 분노와 저항

이상화의 시에는 초창기부터 이러한 깊은 저항 의식이 배어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시 속에 강한 분노와 저항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9239월 일본에서 벌어진 관동대학살을 기점으로다. 같은 해 3, 이상화는 프랑스 유학을 꿈꾸며 일본으로 떠났다. 이때만 해도 그의 시에는 관능적이고 낭만적인 표현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당시 일본에서 발생한 관동대지진을 계기로 일제는 수천 수만에 달하는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했다. 이를 본 이상화는 조국의 절망적인 현실 앞에 무너지며 절규했다.

이러한 상황을 겪은 그는 전과는 다른 경향의 시를 추구하며 시작(詩作)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서울 가회동 일대에 머물면서 창작활동에 전념하던 이상화는 1926, 그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과 조국의 비통한 현실, 그리고 조국에 대한 애정을 절실한 감정으로 노래한 이 시는 단순히 항일 저항 문학을 넘어, 한국 근대문학의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백신애, 김동리, 이육사, 박목월 등 많은 작가들이 등장하며 일제 강점기 한국 근대 문학의 여러 분야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상화가 말년을 보냈던 고택. 사진/ 민다엽 기자
이상화 고택에서는 그의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사진/ 민다엽 기자
계산동 일대에 조성된 근대문학 거리. 사진/ 민다엽 기자

 

계산동 골목, 이상화의 자취를 따라

중구 계산동 근대문학 거리에는 이상화가 1939~1943년까지 말년을 보낸 고택이 보존되어 있다. 이상화 고택은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둔 안방과 친구와 제자들을 맞이하던 사랑방, 마당에 심은 감나무까지, 그의 막바지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의 마지막 작품 <서러운 해조>가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2020년에 국가보훈처 현충 시설로 지정되기도 했다.

한때, 이상화 고택은 지역개발로 인해 사라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이때 대구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나 고택 보존을 위한 서명 운동을 전개하며 이를 널리 알리기 시작했다. 방송을 타고 소식이 전해지면서, 그 규모는 전국적으로 점점 확대되었고 많은 사람과 기업에서 후원의 물결이 이어졌다. 애초 기획했던 100만인 서명까지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무려 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서명에 동참하며 마음을 모았던 따뜻한 일화다. 현재는 이상화 고택을 제외하고, 주변에는 높은 주상복합 건물로 둘러싸였다.

이상화 고택 안에 세워진 시비. 사진/ 민다엽 기자
이상화 고택 주변에는 독립운동가 서상돈의 고택도 보존되어 있다. 사진/ 민다엽 기자

이상화 고택에서 조금 떨어진 서문로에는 이상화가 나고 자란 생가터가 있다. 세월이 지나 4면으로 토지가 분할되어 그 형태가 온전히 남아있진 않지만, 안채에 해당하던 11-3번지에는 현재 이상화를 기리는 개인 카페가 들어섰다. 카페 라일락뜨락1956’ 마당에는 어린 시절 이상화가 영감을 받았을 200년 된 수수꽃다리(한국산 라일락) 나무가 여전히 꽃을 피우고, 그를 기리는 카페 주인의 정성스러운 손길이 곳곳에 묻어난다. 허름한 골목 구석에 자리 잡고 있지만, 한 번쯤 방문해볼 만한 곳이다.

<참고자료> 향촌문화관, )근대골목해설사회(이상화·서상돈 고택)

INFO 이상화 고택

주소 대구 중구 계산동2

INFO 라일락뜨락1956(이상화 생가터)

주소 대구 서문로211-3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