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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가족여행] 고려 대선승 나옹화상이 열반에 든, 여주 신륵사
[가족여행] 고려 대선승 나옹화상이 열반에 든, 여주 신륵사
  • 이종원 객원기자
  • 승인 2004.06.22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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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신륵사 앞 강가를 따라 운행되는 황포돛배의 모습. 2004년 6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탐욕도 벗어놓고/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나옹화상의 한시를 읊으며 신륵사로 향한다. 신륵사 앞 강가를 따라 운행되는 황포돛배의 모습. 2004년 6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여행스케치=여주] 신륵사는 강변을 거닐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은 여주 쌀 맛의 원천일 것이다. 강바람이 소매 속을 비집고 들어와 살짝 머무르면 온몸이 상쾌하다.

신륵사는 여강이 감싸 안은 봉미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다른 절들이 깊숙한 산속에 자리 잡은 데 비해 신륵사는 강줄기와 은모래벌 그리고 드넓은 들판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창건연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신라 말, 고려 초로 추정된다.

‘神勒(신륵)’이란 사찰명은 이 지방에 나타난 사나운 용마(龍馬)를 어떤 스님의 신격으로 제압한 데서 유래되었다. 고려 때부터는 하늘높이 치솟은 전탑으로 인해 벽절(壁寺)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신륵사와 가장 인연이 깊은 인물은 역시 나옹화상이다.

6백 년 된 은행나무. 2004년 6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6백 년 된 은행나무. 2004년 6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양주의 명찰 회암사에서 나옹화상이 주도하는 설법이 있을 때마다 민초들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수많은 사람이 나옹의 뜻을 따르다보니 왕은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유생들의 탄핵 역시 한몫 했다. 결국 왕은 나옹을 밀양 영원사로 보낼 것을 명령한다. 유배 아닌 유배를 떠난 나옹은 실망감에다 병마까지 덮쳤다.

천릿길을 걷기엔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젊은 시절 머물렀던 신륵사를 지나쳤을 때다. 이젠 더 이상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의 죽음을 그때 예견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시대를 풍미했던 대선승 나옹화상은 결국 신륵사에서 열반에 들고 만다. 열반의 소식을 들은 그의 제자들은 신륵사로 달려와 다비식을 하고 부도를 조성하여 스님의 덕을 기렸다.

강월헌과 삼층석탑. 2004년 6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강월헌과 삼층석탑. 2004년 6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훗날 세종의 능이 여주로 이장되면서 신륵사는 능을 지키는 원찰이 되고 왕실의 보호를 받게 되어 또 한번의 증흥의 길을 걸으며 오늘날 명찰이 된 것이다. 시원스런 나무 그늘을 스치고 지나가면 신륵사에서 가장 전망이 좋다는 곳 ‘강월헌’이 나온다. 절벽 위 험준한 곳에 정자를 올려 세웠다.

위태로운 위치에 세워진 만큼 이 곳의 경치는 절묘하다. 여주의 들녘이 한 눈에 보이며, 굽이도는 남한강의 경치를 감상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다. 까마득한 절벽을 바라보고 있는 정수에게 “정수야 여기서 떨어지면 어떻게 되지?” 아래를 힐끔 내려다보고 한다는 소리가 “피 나.”  

신륵사 다층전탑. 2004년 6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신륵사 다층전탑. 2004년 6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강월헌 옆의 암반 위에는 3층 석탑이 서 있다. 바위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바로 이 자리가 나옹화상의 다비식이 있었던 자리란다. 위쪽으로 올라가면 신륵사의 상징인 전탑이 나온다. 신륵사는 고려 말부터 ‘벽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 다층전탑(보물 226호)이 서있기 때문이다.

탑은 강물을 바라보며 드넓은 여주평야를 지켜보고 있다. 그 자체만으로도 여주 땅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날렵한 여성미를 느낄 수 없지만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는 하인처럼 우직함이 돋보인다. 워낙 탑이 크기 때문에 남한강의 등대 역할을 하면서 도선의 안전을 지켜왔던 것이다.

스님은 탑돌이를 하면서 휘감아 도는 여울을 확인하고 물의 범람에 대비했다. 그리고는 물난리를 막아 달라고 애절하게 기원했으리라. 화강암을 깎아 세운 우리 전통 탑 양식과 달리 진흙을 구워 전탑을 만든 까닭은 무엇일까? 혹시 신륵사 입구에 성황리에 열리고 있는 도자기 축제가 그 해답이 되지 않을까?

고려말 이색이 비문을 쓴 대장각기비. 2004년 6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고려말 이색이 비문을 쓴 대장각기비. 2004년 6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여주 땅의 진흙은 재질이 좋고, 구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 강변에 높은 탑을 세우기 위해서 전탑이 필요했고 그걸 세우기 위해 여주 땅에서 구하기 쉬운 진흙을 사용했을 것이다. 다층전탑 위에 있는 대장각기비(보물 230호)는 고려 말 목은 이색이 공민왕과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대장각을 지어 봉안한 사실을 기록하여 세운 비문이다.

신륵사 극락보전과 다층석탑. 2004년 6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신륵사 극락보전과 다층석탑. 2004년 6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만약 대장각이 지금까지 보존되었다면 국보 중에 국보가 되었을 것이다. 보물은 없어지고 비문만이 남아있어 그걸 어루만지며 아쉬움을 달래본다. 나옹이 9마리 용에게 항복을 받고 그들을 제도하기 위해 지었다는 ‘구룡루’를 지나면 아미타불 도량인 극락보전이 나온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양식으로 조선 후기 건물이다.

추녀를 받치고 있는 4개의 활주도 힘겨워 보인다. 대신 날렵한 팔작지붕은 나는 듯 가볍게 보인다. 장대석이 유난히 크고 반듯하다. 이 돌은 궁궐을 지을 때 쓰는 돌이 아닌가 생각된다. 왕찰의 면모를 갖추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특이한 것은 극락보전 뒤편에 문이 하나 놓인 것이다.

왕의 원찰이기에 세종의 영혼이 산을 타고 이곳에 들어오게 하기 위함이란다. 극락보전 앞에 하얀 다층석탑(보물 225호)이 눈에 들어온다. 대리석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원각사지 석탑과 같은 재질을 썼다고 한다. 무른 질감이어서 그런지 파손이 심하다. 그 때문에 전체 층수를 파악할 수 없어 그냥 ‘다층석탑’이라 부른다.

몸체 4면에는 구름 위를 날고 있는 용을 그려 그 화려함을 더한다. 눈과 비늘발톱까지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용은 왕을 상징하는 상상 속의 동물이 아닌가? 역시 왕의 원찰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민족의 자주성을 보여주는 탑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조사당. 2004년 6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조사당. 2004년 6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극락보전 왼쪽에는 조사당(보물 180호)이 자리 잡고 있다. 정면 1칸 측면2칸의 아담한 건물이다. 전면을 한 칸으로 한 이유는 전면의 문을 전부 개방하면 세 분의 조사영정을 모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운데 기둥을 세우지 않아 대들보가 없는 것이 건축학적 특징이다.

건물 뒤편에 올라 조사당을 내려다보는 맛이 그윽하다. 6백년 된 향나무와 조사당이 멋들어진 조화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향나무는 무학대사가 스승 나옹화상을 추모하기 위해 심었다고 전해진다. 조사당 뒤로 계단을 오르면 보제존자 나옹화상의 사리를 봉안한 석종부도(보물 228호)가 나온다.

통도사의 금강계단처럼 계단이 조성되어 있고 그 위에 종처럼 생긴 부도를 만들었다. 부도가 있으면 비문이 따른다. 보제존자 석종비(보물 229호)의 비문은 당대문장가인 이색이 짓고, 서예가로 이름이 높은 한수가 썼다. 나옹의 내력과 사상이 기록되어 있는데 기와지붕을 하고 있는 상륜부가 특이하다.

다층석탑의 용 문양. 2004년 6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다층석탑의 용 문양. 2004년 6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목조건물마냥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찰의 석등은 인간의 어두운 마음을 밝혀주는 연등의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나옹화상석등(보물 231호)은 부도를 화려하게 꾸미기 위한 공양구로서 화강암을 주재료로 하였다. 다만 불을 밝히는 의미의 화사석은 납석을 사용한 것이 큰 특징이다.

화사석에는 하늘을 날고 있는 용의 모습이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다. 부서지기 쉬운 납석을 사용하여 비천상의 얼굴은 문둥병 환자처럼 훼손되었지만 원래의 아름다움은 변하지 않는다.

석등의 비천상. 2004년 6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석등의 비천상. 2004년 6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나옹화상의 부도. 2004년 6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나옹화상의 부도. 2004년 6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전체적으로 아담하고 화려한 장식이 돋보이는 고려말기 석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런 양식이 후대 왕릉의 석등 양식의 시원이 되었다고 한다. 철제 난간에 소나무가 자라고 있어 그 부분을 제외하고 난간을 올린 모습은 감동적이다.  

나옹의 부도를 보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비록 고승은 죽었지만 그의 정신세계는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남아 잔잔한 여운을 전해주고 있다. 나옹화상의 기가 세기 때문에 이곳의 소나무 가지는 부도를 향해 엎드려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Tip. 
주변볼거리
여주는 문화유산이 많은 곳으로 가족들과 함께 답사여행을 하는데 손색이 없다. 천년고찰 신륵사가 자리 잡고 있고, 현대 불교문화의 진수를 맛 볼 수 있는 목아박물관도 있다. 그 외에도 세종대왕릉, 명성황후생가, 고달사지, 백로 왜가리 번식지, 한얼테마박물관, 여성생활사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어 즐거운 역사체험을 할 수 있다.

도자기 박람회장인 세계생활도자관. 2004년 6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도자기 박람회장인 세계생활도자관. 2004년 6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도자기 박람회
제16회 도자기박람회가 4월 30일부터 5월 16일까지 열린다. 장소는 세계생활도자관이 있는 여주시 북내면 신륵사 일원이다. 주제는 ‘흙과 혼 그리고 불의 조화’다. 도공의 제향, 전통가마 불지피기 재연, 도립국악단의 창작무용 등 다채로운 행사가 이어진다.  

조포나루터 표지석. 2004년 6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조포나루터 표지석. 2004년 6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여주 황포돛배
조선시대 남한강은 교통의 요지다. 지금은 적막하지만 한때는 한양에 세곡을 나르는 주요 뱃길이다. 지금 흔적은 사라졌지만 추억을 가득 실은 황포돛배가 신륵사 앞에서 운행하고 있다. 황포돛배는 조포나루터를 떠나 여주대교를 거쳐 신륵사 강월헌으로 돌아오는 코스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여행을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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