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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백두대간 종주기⑬] 산 속에서 만난 새 기운, 속리산
[백두대간 종주기⑬] 산 속에서 만난 새 기운, 속리산
  • 박상대 기자
  • 승인 2005.05.0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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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속리산 문장대 오르는 길. 2005년 5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속리산 문장대 오르는 길. 2005년 5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여행스케치=보은] 백두대간에도 봄이 왔습니다. 4월 첫째 주까지도 산 정상이나 골짜기에는 눈이 쌓여 있었는데. 이제 봄바람을 타고 상큼한 봄기운이 감돌고 있답니다. 속리산 소나무 숲에서 만난 봄바람 이야기. 

봄바람을 아시나요? 문득 어깨 위로 날아와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바람 말예요. 어디서 왔을까요? 눈부시게 파란 하늘 하얀 구름을 타고 왔을까요? 아니면 산 너머 강촌에서 왔을까요? 어쨌든 좋습니다. 바로 일주일 전에 겨울 장비를 착용하고 겨울산행을 했던 산객들은 저절로 콧노래를 붑니다.

뒤늦게 찾아온 지난 겨울의 한파. 주말마다 폭설이 내리고, 거친 눈보라가 온몸을 휘감았습니다. 참으로 지독한 칼바람이었지요. 살을 에는 듯한 거친 바람은 어디로 갔을까요? 온 세상을 굴복시킬 듯한 기세로 덤비던 그 바람은 어디로 밀려났을까요? 이토록 보드라운 바람에게 산을 내주고 자취를 감추다니. 강한 자도 부드러운 것에 밀릴 때가 있군요.  

히야! 산을 오르다 말고 뒤를 돌아봅니다. 저 멀리 산객들이 걸어온 겨울산들이 겹겹이 날개짓을 하고 있네요. 거대한 봉황새 무리의 날개짓이 저러했을까요? 그 산마루들 너머서 불어오는 바람일 겁니다. 겨울 점퍼의 지퍼를 내리고 두 팔을 벌려 봄바람을 끌어안습니다.

봄바람은 개울물을 데리고 산에 오른다. 2005년 5월. 사진 / 박상대 기자
봄바람은 개울물을 데리고 산에 오른다. 2005년 5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오랜만에 가슴이 출렁거릴 정도로 끌어안은 봄바람! 참으로 포근합니다. 살갗을 간질간질 건드리며 휘리릭 안기는 솜씨가 보통이 아닙니다. 땅이 질척거리네요. 봄바람 탓일 겁니다. 꽁꽁 얼었던 겨울산이 마침내 해산을 준비하는 거랍니다.

온몸을 꼭꼭 감싸고 있던 겨울옷을 벗고, 봄바람이 실어온 따사로운 햇빛을 받으며 몸을 푸는 거지요. 봄바람으로 인해 얼었던 땅이 녹고, 땅이 녹으면서 물이 흐르고, 물이 흐르는 가느다란 길로 새로운 생명들이 싹을 틔워 올린다지요? 어쩌면 산행 중에 새 생명들과 봄 인사를 나눌 수 있겠네요.

새로운 얼굴들을 만날 생각을 하니 가슴이 콩닥거립니다. 어렸을 때 학교에 갔다오니 엄마가 새 아기를 낳았을 때처럼요. 신발에 묻은 흙이 바짓가랑이에 묻어도 좋습니다. 그때도 엄마가 청소나 빨래를 시켜도 싫지 않았답니다.  

봄바람을 만끽하며 휴식을 취하는 솔터산악회 회원들. 2005년 5월. 사진 / 박상대 기자
봄바람을 만끽하며 휴식을 취하는 솔터산악회 회원들. 2005년 5월. 사진 / 박상대 기자

킁킁. 봄바람이 봄향기를 데려왔습니다. 흙냄새가 향기롭습니다. 낙엽이 썩는 냄새도 향기롭군요. 지난주에 산길을 걸을 때만 해도 오솔길을 사이에 두고 남쪽에는 낙엽이 쌓여 있고, 북쪽에는 눈이 덮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겨울과 봄은 겨우 낙엽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봄이 왔습니다.

솔잎을 움켜쥐었더니 촉감이 보드랍습니다. 겨우내 찬바람과 눈에 시달리며 긴장해 있던 날카로운 솔잎이 아닙니다. 거짓말처럼 부드럽군요. 솔잎에서 연하디 연한 솔향기가 솔솔 납니다. 솔잎 하나를 뽑아 입에 물고 살짝 깨물어봅니다.

아, 고향 냄새가 입안에 가득 고이네요. 속리산을 오르는 길은 여럿입니다. 속세에서 멀리 떨어진 산인지, 속세에서 멀어져간 사람들이 머무르던 산인지는 따지지 않겠어요. 어느 골짜기 어느 능선을 따라 오르건 속리산은 속세와 가까이 있답니다. 그만큼 넉넉하고 덩치가 큰 산이지요.

속리산에는 암릉과 소나무가 많다. 2005년 5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속리산에는 암릉과 소나무가 많다. 2005년 5월. 사진 / 박상대 기자

경상북도 상주시 장암리 쪽으로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햇빛이 들지 않은 곳에는 아직도 눈이 쌓여 있고, 계곡에는 물 흐르는 소리만 들릴 뿐 물은 보이지 않습니다. 간혹 눈석이가 졸졸졸 흐르는 바위틈에서 물을 받아먹으며 산을 올랐습니다.

산죽밭을 만나면 개구쟁이가 되고 싶습니다. 숨바꼭질을 해도 좋고, 보물찾기를 해도 좋고, 전쟁놀이를 해도 괜찮은 무대지요. 겨우내 움츠리고 있던 산죽 이파리도 이제 봄 색깔을 내고 있습니다. 산죽 사이에서 산새 두 마리가 지지배배 노래하며 날아오릅니다.

겨우내 숨죽이고 있던 새들도 봄바람을 타고 제 세상을 만난 듯 날갯짓을 합니다. 봄맞이 사랑을 합니다. 문장대 아래 산장에 이르자 노랑색 날개에 검정색 점이 박힌 호랑나비 한 마리가 바위 위에서 홀로 봄볕을 즐기고 있습니다.

신선대와 비로봉 중간에 있는 입석대. 2005년 5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신선대와 비로봉 중간에 있는 입석대. 2005년 5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조선시대 세조가 문신들과 이곳에 올라 글을 읽고 시를 썼다네요. 그래서 문장대라는데 느닷없이 한 산객이 묻습니다.

“임금은 여기까지 어떻게 왔을까요? 걸어서? 가마 타고? 말 타고?” 아무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가마 타고 올라왔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데 가마꾼들 엄청나게 고생했겠네.” “혹시 안 온 거 아냐? 후세 사람들이 지어낸 말이겠지.” 모두들 웃고 맙니다.

어쨌든 문장대에 올라 공부를 했다면 거짓말일 거고, 시를 썼다면 믿을 만하네요. 이 좋은 풍광을 놔두고 무슨 공부란 말인가.      

속리산 천왕봉에서 만난 베스트산악회 이국호 대장과 기자. 2005년 5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속리산 천왕봉에서 만난 베스트산악회 이국호 대장과 기자. 2005년 5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신선대를 거쳐 입석대에 이르니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습니다. 입석대 어느 바위에 걸터 앉아 신선대를 보니 소금강산이란 별명이 틀리지 않군요. 따사로운 햇살과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 바위에서 묻습니다. ‘누구, 누드 사진 모델 하실 분?” 모두들 어처구니 없어합니다.

비로봉과 천황봉을 거쳐 소나무 숲길을 걸어 하산하였습니다. 봄바람은 하산길 내내 친절한 동반자가 되어 주었지요. 봄바람 덕분에 얼었던 산이 몸을 풀었으니 이제 다음 달에는 여기 저기서 새 생명들이 세상을 향해 옹알이를 해대겠지요. 다음 주에는 또 그들의 옹알이와 기지개켜는 모습을 전해드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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