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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중국 산둥성 석도항&적산법화원, 신라인의 마음의 고향
중국 산둥성 석도항&적산법화원, 신라인의 마음의 고향
  • 이종원 객원기자
  • 승인 2005.08.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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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중국 적산법화원 풍경. 2005년 8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중국 적산법화원 풍경. 2005년 8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여행스케치=중국] 천년 전 중국 반군을 제압하고 청해진에서 해적을 소탕한 해상왕 장보고. 한·중·일 세나라의 역사책에 이름에 오른 유일한 인물. 장보고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인천항 국제 여객터미널
인천국제공항과는 전혀 딴판이다. 협소한 공간에 사람과 짐이 함께 어우러져 북새통을 이룬다. 짐 싣는 카트 구하기도 하늘의 별따기다. 짐에 치이고 사람에 부딪히고…. 몸집보다 큰 짐을 나르는 사람, 빙 둘러앉아 수박을 깨먹는 사람들, 후미진 곳에서 중국돈을 바꿔주는 환전상도 보인다.

여행객, 보따리상과 중국인까지 한데 어우러져 정신이 하나도 없다. 무질서하게 보이지만 이곳을 통해 움직이는 물건들이 한해 수천억 원에 달한다고 한다. 비행기처럼 짐을 부치는 일도 없다. 워낙 배가 크기 때문에 웬만한 짐은 그냥 들고 탄다.

긴 통관시간이 끝나면 면세점이 우릴 기다리고 있다. 담배나 양주도 인천공항보다 훨씬 싸다. 2천5백원짜리 국산 담배를 9백원에 살 수 있으니 말이다.

선내 브릿지. 100m가 넘는 페리호가 이곳에서 통제되고 움직이다. 2005년 8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선내 브릿지. 100m가 넘는 페리호가 이곳에서 통제되고 움직이다. 2005년 8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화동페리를 즐기자
예쁜 조선족 처녀가 안내소를 지키고 있다. 이 배에 탄 승무원들은 48명인데 주 3회 중국을 오가니까 배에서 내려오는 일이 없다. 면세점, 야식코너, 잡화점, 회의실, 목욕탕, 노래방까지 갖추고 있다. ‘부인세수간’이라고 쓰인 여자화장실의 푯말도 눈길을 끈다.

디럭스룸 내부에는 4개의 침대가 놓여있고 세면대, TV, 탁자 등이 놓여 있어 담소도 나누고 일기도 쓰고 독서까지 할 수 있다. 식당엔 한국음식이 나온다. 돈을 아껴야 하는 보따리상은 한 사람이 두 사람 분의 밥과 반찬을 담는다.

화동페리에 탑승하는 승객들 모습. 2005년 8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화동페리에 탑승하는 승객들 모습. 2005년 8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눈치만 줄뿐 뭐라고 하는 사람 하나 없다. 그나마 밥을 사먹는 사람은 행복하다. 컵라면으로 때우거나 뜨거운 물에 찬밥을 말아먹는 보따리상이 수두룩하다. 그런 분들을 생각하니 밥을 하나도 남길 수 없었다. 배에는 노래방이 있었고 깨끗하지 않지만 목욕탕도 갖추고 있었다.

훼리의 장점은 가격이 저렴하고 실컷 바다를 볼 수 있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여행사에 부탁하면 배의 운전석인 브릿지 구경도 할 수 있다.

따이공
페리호가 한번 움직이는 데 8천만원의 비용이 든다고 한다. 관광객이라고 해봐야 50여명도 채 되지 않는다. 그들 가지고는 이 배를 움직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주 수입원은 콘테이너 화물이다.

화물이 적으면 배가 일찍 출발하고 물동량이 많으면 하염없이 기다려야하니 그 고충은 고스란히 승객이 떠 안아야한다. 그걸 불만으로 여기는 사람은 바보다.

만만디는 배를 타면서부터 시작된다. 페리호의 다음 주수입원이 바로 따이공(보따리상)의 여객운임이다. 따이공은 보통 산둥성 지역(위해, 연대, 청도) 그리고 단동 천진, 대련등지에서 물건을 사서 한국에 넘기는 보따리상을 말한다. 10여 개의 한·중 페리 선사는 이들이 먹여 살린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석도항 풍경. 2005년 8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석도항 풍경. 2005년 8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한국으로 돌아오면 가전제품을 사서 중국으로 가서 되판다. 중국세관의 반입 기준이 항구마다 달라 이 항구 저 항구 옮겨 다니면서 물건을 실어 나른다. 배는 그들의 일터이자 숙소다. 일주일에 중국과 한국을 3번 왕복하니 짐을 내리자마자 다시 승선해야 한다.

주로 하선하는 곳은 중국땅이다. 숙박비와 식비가 저렴하기 때문이다. 품목당 5kg, 1인당 50kg이 한국으로 가져올 수 있는 양이다. 깨, 마늘, 생강, 참기름, 고추 등이 이들이 가져오는 물품이다. 40만원 어치 물건을 사오면 대략 15만원이 남는다고 한다.

큰 짐을 낑낑 메고 배에 오르내려야지, 흔들리는 바다에서 살아야지…. 힘겨운 노고에 비해 그리 돈을 많이 버는 것은 아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따이공 노인이 하염없이 바다를 향하고 있다. 중국 세관의 심한 단속과 현지 폭력배들의 등쌀에 허리까지 휘어져 있다.

“한때 이배는 따이공이 300명이나 되었는데 지금은 150명도 채 되지 않아요. 저도 이젠 이 생활 청산해야겠어요.”

노인의 좁은 등에는 ‘회한’이라는 글씨가 큼지막하게 써 있는 것 같다.

중국인들은 붉은 리본에 각자 소원을 적어 나무에 매단다고 한다. 2005년 8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중국인들은 붉은 리본에 각자 소원을 적어 나무에 매단다고 한다. 2005년 8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중창불사
조그만 석도항에 비해 장보고가 세웠다는 법화원은 둘러보는 데만 2시간은 족히 걸릴 정도로 규모가 크다. 아직도 중창불사가 한창이다.

아기자기한 절 분위기는 기대하기 힘들고 어딘지 모르게 돈으로 치장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우리 돈으로 9천원이나 하는 입장료도 부담이 된다. 그렇다보니 중국인들은 감히 절에 들어갈 엄두도 못 낸다.

중국인들이 법화원을 꾸미기 위해 천문학적 돈을 쏟아 부은 것은 장보고의 대한 존경의 표시라기보다는 한국 관광객을 끌기 위한 상술이 작용하지 않았나 의심해본다. 그래도 좋다. 이곳이야말로 한국에서도 볼 수 없는 장보고 동상과 기념관도 볼 수 있으며 한글안내판까지 갖추고 있어 작은 코리아다.

장보고를 더욱 잘 알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그만한 값은 기꺼이 치루자.

주황색 지붕이 있는 자리가 신라인들이 모여 살았던 신라원이다. 2005년 8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주황색 지붕이 있는 자리가 신라인들이 모여 살았던 신라원이다. 2005년 8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적산법화원
학창시절 역사 시간에 신라원, 신라소, 신라방의 용어를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헷갈려서 시험에도 몇 번 틀린 경험이 있다. 신라원 중에서 가장 큰 법화원은 장보고가 세운 불교 사원으로 창립초기에 법화경을 읽었다고 하여 이런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신라와 당나라 간 교역이 늘어나자 산둥반도 일대에 신라인 마을인 신라방(新羅坊)이 생겼고 신라방이 늘어나면서 그들의 정신세계를 묶을 수 있는 종교시설이 절실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신라원인 것이다.

종교시설 역할 뿐아니라 신라와의 연락처, 신라와 일본에서 온 유학승에게 편의까지 제공했으니 당나라의 신라 타운인 셈이다. 오늘날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이해하면 된다. 절은 전답을 소유했으며, 본국과 같이 해마다 8월 15일을 전후로 3일 동안 축제를 열었다고 전해진다.

법화원 바로 아래 마을이 바로 신라인들의 집단 거주지인 신라방이 있었던 장소다. 신라소는 당나라에서 거주하는 신라 거류민의 자치행정기구로 통제하기 위해 세운 관사다.

대웅전 건물을 유심히 둘러본다. 지붕에는 황룡사터에서 발견된 모양의 치미를 올렸고, 건물은 부석사 조사당 건물처럼 벽에 들창을 달았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상이 모셔져 있고 옆에는 관음보전이 자리 잡고 있다. 대웅전 앞에는 향로와 탑을 합쳐 놓은 향로탑이 눈길을 끈다. 2000년에 새로 건축한 삼불보전의 크기도 웅장하다. 이곳에서 바라본 풍경이 웅장하다.

한중우의를 상징한 장보고 기념탑. 2005년 8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한중우의를 상징한 장보고 기념탑. 2005년 8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바다를 오가는 선박의 안전을 지켜준다고 믿었던 적산신. 2005년 8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바다를 오가는 선박의 안전을 지켜준다고 믿었던 적산신. 2005년 8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적산 기슭에 거대한 적산신이 산 위에 올라가 있다. 적산신이 바다를 오고가는 선박을 지켜준다고 믿고 있다. 중국판 포세이돈이라고 해도 좋다. 장보고 기념탑은 세계 한민족연합회 최민자 회장이 10만 불 자금을 투자하여 1994년 건립한 탑이다.

대리석으로 제작하였으며 정면 장보고기념탑이라는 글자는 김영삼 대통령의 친필이다. 기념탑 기단 부분은 남북으로 19m, 동서로 16m에 달한다. 15m높이의 두 개의 탑신은 서로 떨어져 있다. 2개의 기둥상단을 연결한 고리는 한중 양국의 우의를 상징한다고 한다.

장보고 전기관 입구. 2005년 8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장보고 전기관 입구. 2005년 8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최근에 장보고전기관을 새로 꾸몄다. 한글간판이 반갑게 여행객을 맞이한다. 장보고 일대기가 새겨진 부조도 음미해볼 만하다. 전기관에 들어서면 비단잉어가 평화롭게 노닐고 있는 연못을 만난다. 무령종군, 녹정적산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전기관내 장보고 조각상과 부조. 2005년 8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전기관내 장보고 조각상과 부조. 2005년 8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금빛 옷을 입고 있는 장보고 조각상이 전기관 가운데 모셔져 있다. 장보고의 활약상을 그린 그림도 감상해 볼 만하고, 당서, 동국통감, 초한문집 등 장보고에 관한 고문서도 유심히 관찰해 보자. 가장 눈여겨 볼만 한 것이 높이 20여 m의 장보고의 동상이다. 적산신과 함께 바다 건너 신라 땅을 바라보고 있다.

‘源遠流長(원원유장)’이란 편액이 걸린 장보고 기념관에는 드라마 ‘해신’ 포스터가 전면을 차지하고 있어 중국인의 상술을 엿볼 수 있다. 신라방이 있던 자리와 장보고가 장악했던 서해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천년 전 신라인이 오르내렸을 숲 속 오솔길을 거닐면 그들의 체취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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