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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지구촌기행] 고주몽의 고구려, 졸본성을 찾아서
[지구촌기행] 고주몽의 고구려, 졸본성을 찾아서
  • 이종원 객원기자
  • 승인 2005.10.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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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첫수도는 천혜의 요새였다
[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서쪽에서 바라본 졸본성 절경.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은 해발 800m 고원에 고구려 수도 졸본성을 세웠다. 사면이 절벽으로 천혜의 요새다. 2005년 10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서쪽에서 바라본 졸본성 절경.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은 해발 800m 고원에 고구려 수도 졸본성을 세웠다. 사면이 절벽으로 천혜의 요새다. 2005년 10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여행스케치=중국] 해모수의 아들 고주몽. 그는 하늘과 물이 절묘한 만남을 이룬 곳에 터를 잡고 졸본성을 쌓았다. 처음엔 성으로 인정 받지 못했던 졸본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과정과 고구려사를 자기네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중국의 속셈을 들여다 보았다.

“기원전 2~3세기경 고주몽은 비류수가에 나라를 세우고,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이곳에 세웠다.” 광개토대왕비와 삼국사기에 나온 이야기다. 천제의 아들 해모수, 물의 신인 하백의 딸 유화 사이에 태어난 동명성왕(고주몽)의 신화가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신화는 얼토당토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졸본성이 자리잡고 있는 ‘환인’이라는 지명도 단군신화와 관련이 있고 물태극을 만들며 흐르고 있는 혼강(비류수) 유역에 유난히 눈길을 사로잡는 위산이 우뚝 솟아 있다.

졸본성의 동쪽 성곽. 2천년을 견디어 왔다. 2005년 10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졸본성의 동쪽 성곽. 2천년을 견디어 왔다. 2005년 10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고구려의 첫 수도인 졸본성이다. 과연 고주몽은 하늘신 해모수의 자식답게 힘찬 기상이 서려 있는 곳에 도읍지를 잡았다. 졸본성을 에워싸며 흐르는 비류수(혼강)는 물의 신 하백의  딸 유화의 머리결 마냥 감미롭다.

하늘과 물의 절묘한 만남. 고구려역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중국내 고구려 유적지나 백두산에는 늘 중국 현지 가이드가 따라 다닌다. 고구려유적 전문답사를 막기도 하고 태극기 흔드는 것도 방지하고 어쩌면 가이드라기보다는 감시인으로 따라왔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고구려 역사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동명왕 신화가 어떤 내용인지 전혀 언급이 없다. 뜬금없이 ‘5선녀 이야기’나 일제 때 항일전투에서 희생당한 5명의 여전사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우리가 애타게 듣고 싶은 것은 정작 고구려 이야기인데….

그래도 가이드의 천성은 착했다. 한국인을 위해 ‘아리랑’ 노래까지 준비했으니 말이다. 고구려의 첫 수도인 졸본성이 바라보이는 언덕에서  중국인이 부르는 아리랑 가락은 우리네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한국과 북한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졸본성(오녀산성)과 집안의 고구려 유적지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시켰다. 중국은 고구려 역사 편입을 위한 동북공정에 무려 1조원을 쏟아 부었다. 통일한국을 대비하기 위한 사전 포석인 것이다.

북한을 중국의 위성국가로 만들어 버리려는 속셈이 숨어 있어 더욱 안타깝다. 포연 없는 역사 전쟁의 한 가운데서 졸본성은 어제도 오늘도 말없이 서 있었다.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면서 졸본성은 A가 4개인 국가등급 여행지로 변모했다.

우리네 호텔 무궁화 표시처럼 만리장성, 자금성, 계림등과 더불어 4A급이다. 서문주차장부터는  까마득한 계단길이 하늘로 이어졌다. 직선의 계단길이 힘들면 ‘18반’이라고 불리는 18굽이 지그재그 길로 거니는 것도 운치 있다.

우리 돈으로 1만3000원만 주면 가마를 타고 졸본성에 오를 수 있다. 20분 소요. 2005년 10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우리 돈으로 1만3000원만 주면 가마를 타고 졸본성에 오를 수 있다. 20분 소요. 2005년 10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가마꾼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150원 달라는 것을 100원에 깎고 다리가 불편한 동행을 가마에 태웠다. 의자에 등을 붙이고 지긋히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는 양반집 규수댁이다. 20분쯤 올랐을까? 숨을 헐떡거리자 하늘을 잇는 천창문이 나온다.

해발 800m 꼭대기에 남북 600m, 동서 200m, 둘레 1km의 평지가 있는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깎아지른 절벽 중에 이곳만은 상대적으로 경사가 완만하다고 한다. 내가 생각하기엔 서쪽도 경사가 험하기는 마찬가지다. 어쨌든 물자의 통로이자 적들의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성문의 측면은 U자 형태의 치를 가지고 있어 허겁지겁 올라온 적은 삼면으로 포위되어 칼 한번 못 휘두르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배치는 두 번째 수도인 집안의 국내성에서 보다 발전되어 더욱 단단한 치와 옹성의 형태로 나타난다.

고구려인들은 성쌓기의 달인이다. 산등성이를 따라 성을 쌓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공법이다. 고구려인들은 울퉁불퉁한 바위를 제거하지 않고 그 위에 바로 돌을 쌓는 ‘그랭이 공법’을 사용하여 톱니바퀴처럼 이를 맞게 하여 견고성을 높였다.

두 번째는 ‘들여쌓기’공법이다. ‘수직쌓기’를 한 대부분의 중국성이 얼마 못가 허물어지는데 반해 고구려 성들은 2천년을 견디어 온 비결이다. 들여쌓기는 돌을 계단처럼 쌓는 것으로서 위에서 내려오는 압력과 안쪽에서 밀고 나오는 압력을 동시에 견딜 수 있는 구조다.

처음엔 졸본성도 고구려 성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중국에 조공을 바쳤던 힘없는 국가가 이렇게 견고한 성을 쌓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돌 쌓는 기법이 중국과 확연히 다르고 고구려 유물이 대량 출토되면서 어쩔 수 없이 고구려 성임을 인정하고 있다.

서문 내부에는 보초병이 서 있던 공간이 있으며 성문을 단 홈도 패여 있다. 성문 위에는 망루가 서 있었을 것이다. 주먹을 불끈 쥐고 적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는 고구려 장수를 상상해본다. 바깥성벽의 돌은 반듯하게 잘 다듬어 놓았다.

헐렁하게 보이면서도 전혀 빈틈이 없다. 대형주거터는 왕궁으로 추정되는 장소다. 주춧돌 7개가 늘어선 형태로 남아 있으며 이곳에서 토기와 철기, 돌칼등 중요한 고구려 초기유물이 출토되었다. 대형 주거터 바로 옆은 도교사원터다.

안내판에는 청나라때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옥황관이었으며 1966년 폐쇄되었다고 적혀 있는데 고구려도 도교를 숭상한 나라가 아닌가? 그 신성한 자리에 건물을 다시 올리지 않았나 추측된다. 백두산 천지마냥 졸본성에도 천지가 있었다.

하늘의 자손인 고구려인들은 늘 하늘을 꿈꾸었을 것이다. 800미터 돌산 위에 샘물이 솟아나는 자체만으로도 하늘의 선물이었다. 이 샘물이야말로 생명수다. 아무리 성이 견고하더라도 물이 없으면 싸울 수 없고 물의 양에 따라 성을 지키는 병사 수도 달라질 것이다.

도교동굴에서 바라본 바위절벽. 졸본성은 천혜의 요새다. 2005년 10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도교동굴에서 바라본 바위절벽. 졸본성은 천혜의 요새다. 2005년 10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그 물을 그냥 아래로 흐르게 만하지 않고 작은 저수지를 만들어 효율적으로 물을 활용했다. 배수구에는 또 다른 저장 공간이 있어 빨래나 기타 허드렛물을 사용했다. 천지 아래 절벽으로 내려가면 도교동굴이 나타나고 이곳에서 슬며시 바라본 비류수의 풍경은 가히 일품이다.

S자로 굽이도는 수태극과 산태극이 절묘한 산수화를 그려놓았다. 천하의 명당임을 보여주는 지형이다. 2천년동안 닳고 닳은 멧돌을 어루만지면서 고구려인들의 애환을 느껴보고 식량창고터에서 산더미처럼 쌓여진 군량미를 상상해본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주거터의 온돌구조이다. 현재까지도 온돌은 우리 삶의 방식으로 남아 이어지고 있다. 마당의 창고도 고구려 문화의 흔적들이다. 발부리에 채이는 돌의 흔적을 지나면 장대가 나온다. 선돌에는 요령성 제 1경치라고 쓰여있다.

성 외부에서 바라본 서문의 전경. 치의 형태를 갖추고 있어 3면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다. 2005년 10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성 외부에서 바라본 서문의 전경. 치의 형태를 갖추고 있어 3면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다. 2005년 10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환인댐을 만들어 놓아 인공호수가 되어 한때 높다란 산들이 섬이 되어 장쾌한 볼거리를 제공해준다. 동문으로 내려가는 길 역시 만만치 않은 경사다. 바위절벽 사이에 한사람만 간신히 내려갈 수 있는 공간이 놓여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이곳은 졸본성의 숨통이었다.

이 바위길이 없었더라면 고구려의 해상교통로인 비류수로 내려가는 길이 무척이나 힘겨웠을 것이다. 내려와서 위를 쳐다보니 까마득하다.  80도 계단이 나오고  절벽에 간신히 붙어 있는 잔도에 몸을 의지한다.

긴 계단을 벗어나면 고구려시대에 만들어졌던 우물이 나그네의 목을 축인다. 예나 지금이나 이 물은 생명수였다. 산동이나 단동에서 마셨던 물맛이 아니었다. 바로 우리 시골 우물에서 퍼올렸던 물맛이었다. 물맛을 보고 이곳에 우리 땅임을 확신한다.

생태여행 전문인 양영훈작가는 산성을 둘러싼 수목을 보고서야 우리 땅임을 것을 확신했다고 한다. 소나무, 졸참나무… 우리네 땅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와 너무나 흡사하다고 한다. 절벽이 천연요새인 내성의 역할을 한다면 절벽 아래는 외성을 담당하는 졸본성이 길게 이어졌다.

2천년이 지났건만 성벽은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고구려를 지켜온 힘이 핏줄을 타고 흘러 전신을 뒤흔들었고 심장을 더욱 고동치게 만든다. 조심스레 다가가 돌을 어루만지니 고구려인의 뜨거운 체온이 전해진다.

졸본성의 천지. 800미터 돌산에 샘물이 솟아난다. 고구려 사람들은 늘 하늘을 숭상했기에 천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2005년 10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졸본성의 천지. 800미터 돌산에 샘물이 솟아난다. 고구려 사람들은 늘 하늘을 숭상했기에 천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2005년 10월. 사진 / 이종원 객원기자

초소터가 보인다. 눈을 부라리며 적을 감시했던 장소다. 이곳에서도 철기그릇과 철기무기가 대량 출토되었다고 한다. 적들과 싸우다 장렬하게 죽은 고구려사람들의 흔적이다. 5미터 높이의 성벽은 또 한번 탐승객의 발목을 잡는다. 투박하지만 성은 견고하게 쌓여 있었다.

그 위에 말과 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폭이 넓게 만들어졌다. 잡초만 무성한 돌 틈사이로 눈물과 한숨 소리만 새어나온다. 고구려 유적을 만난 기쁨과 환희보다도 왠지 모를 찜찜함이 나를 괴롭힌다.

우리 땅을 찾지 못한 것도 서러운데 우리 역사와 정신마저 송두리 채 빼앗겨 버렸으니 차마 고구려인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비류수를 거닐었다. 집안에 압록강과 평양의 대동강이 있다면 환인에는 비류수가 있었다.

‘환인’이라는 지명 역시 환웅의 아버지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고구려의 뿌리가 고조선까지 거슬러 올라가 있음을 말해준다. 비류수가에서 중국의 아이들이 발가벗은 채로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2천년 전 고구려의 아이들이 다시 환생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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