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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제주 오름과 숲] 고요하고 아름다운 그 날의 숲길, 제주 머체왓숲길
[제주 오름과 숲] 고요하고 아름다운 그 날의 숲길, 제주 머체왓숲길
  • 정은주 여행작가
  • 승인 2021.09.23 08: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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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로운 분위기가 흐르는 편백숲.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여행스케치=제주] 푸른 초원을 지나 깊은 계곡을 따라 들어간 곳에 미지의 숲길이 이어져 있었다. 돌투성이 지대에서도 나무들은 강인한 생명력으로 울창한 숲을 이뤘고, 조심스럽게 내딛는 걸음이 이내 설렘으로 바뀌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어느 날 마법의 숲처럼 신비로운 머체왓숲길을 걸었다. 

한라산 남쪽 자락에 형성된 머체왓숲길은 일 년 내내 녹음이 우거진 울창함을 자랑한다. 머체왓은 제주어로 머체(돌무더기)와 왓(밭)을 합친 말인데 이름에 담긴 뜻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나무들이 빽빽하다. 머체왓숲길은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인지 관광객보다 현지인들이 더 많이 찾는 편이다.


숲길은 소롱콧길, 머체왓숲길, 서중천탐방로 총 3개 코스로 나뉘는데 1년간 휴식년제를 운영해 현재는 소롱콧길만 탐방이 가능하다. 소롱콧은 한남리 서중천과 작은 하천 사이에 형성된 숲을 가리키는데 지형이 마치 작은 용을 닮아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소롱콧길은 6km가 넘는 꽤 긴 코스이며 보통 걸음으로 약 2시간30분 정도 소요된다. 전체적으로 어려운 구간은 없지만 울퉁불퉁한 돌길에 나무뿌리가 드러난 곳들이 많아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작은 용을 닮은 거대한 바위. 여기에 얽힌 전설이 흥미롭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땅 위로 이리저리 드러난 나무뿌리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작은 용을 타고 누비는 소롱콧길 
머체왓숲길 출입문을 통과해 초원 같은 목장 지대를 지나는 도중에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말 무리를 만났다. 열심히 풀을 뜯고 있는 어미 말 옆에 두 다리를 쭉 뻗고 누운 망아지 한 마리가 보였다. 요란한 풀벌레 소리에서 아랑곳없이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 지. 나무 그늘에 앉아 한참을 바라보다 일행이 재촉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자리를 뜰 수 있었다. 

울창한 숲길에 들어서면 본격적인 탐방이 시작된다. 탐방로에 깔린 야자매트 너머로 사람 손길이라곤 거의 닿은 적 없어 보이는 제주의 천연림이 모습을 드러내며 신비로운 세계로 이끈다. 이끼가 두텁게 덮인 바위와 그 틈을 뚫고 솟아난 우람한 나무들, 기이한 형태로 뻗어나간 나뭇가지들…. 비현실적인 분위기에 빠져 정신없이 걷다 보면 여기저기 튀어나온 돌부리에 발길이 채이기 일쑤다. 

원형으로 쌓인 방사탑.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원형으로 쌓인 방사탑.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숲 속 공터에 방사탑이 늘어서 있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숲 속 공터에 방사탑이 늘어서 있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큰 웅덩이 하나가 나타났다. 웅덩이를 감싸 안은 거대한 바위 덩어리가 마치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용을 연상시킨다. 소롱콧길이란 이름과 잘 어울리는 풍경이다. 여기에 얽힌 전설도 흥미로운데, 옛적 이곳에 듣는 것을 좋아하는 형과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동생 형제 용이 살았다고 한다.

이 둘 사이에서는 언제나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는데 어느 날 둘은 한라산이 폭발한 줄도 모르고 신나게 이야기를 이어가다 그대로 용암에 뒤덮여 돌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우애가 좋은 형제 용은 아마 지금도 돌 안에서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터이다. 과연 내 곁에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함께 즐겁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용을 닮은 바위를 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기게 된다.

도로변에 접한 머체왓숲길 입구.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목장 지대에서 만난 말들. 나무 그늘 아래 잠시 쉬어가기 좋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숲 속에 마련된 쉼터.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숲 속에 마련된 쉼터.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치유의 기운이 가득한 편백나무숲을 지나
탐방로를 가로질러 난 임도를 건너면 순식간에 풍경이 바뀐다. 하늘을 향해 곧게 자라난 편백나무들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 속으로 발길을 이끈다. 나무들 사이에 길게 이어진 야자매트는 마치 숲길을 인도하는 안내자 같다. 사방이 편백나무인 숲 속에서 자칫 길을 잃을까 걱정된다면 야자매트만 따라 걸으면 된다. 

햇볕이 쨍하게 내리쬐는 맑은 날이지만 편백나무 숲은 오히려 서늘한 기운이 가득하다. 빽빽하게 자라난 나뭇가지들이 하늘을 뒤덮어 숲 전체가 그늘이 진 탓이다. 새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고요한 적막감에 이대로 시간이 정지된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든다.

이곳의 오묘함은 영화 관계자까지 사로잡았던 모양이다. 머체왓숲길은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아신전>의 촬영지 가운데 하나로 어린 아신이 생사초를 처음 발견했던 폐사군의 숲과 전지현이 처음 등장해 멧돼지를 잡았던 장면을 편백숲에서 찍었다. 영화에서는 조금 으스스한 분위기로 연출되었지만 실제는 신비로운 느낌이 훨씬 강하다. 

잠시 쉬어갈 겸 평상에 반듯하게 앉아 심호흡하며 숲 속에 흐르는 피톤치드를 깊숙이 들이 마셔본다. 나무들이 뿜어내는 피톤치드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심신을 안정시키는데 도움을 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잠깐의 휴식에도 온 몸이 개운하고 머리가 맑아진 기분이다.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다시 길을 나선다.

기묘한 암반으로 가득한 계곡.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하늘에서 내려다 본 서중천 계곡.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서중천 계곡을 따라 걷고, 또 걷고
편백나무가 끝없이 이어지는 동안 숲은 점점 더 깊어져간다. 나무뿌리가 계단처럼 얽힌 언덕을 지나고 중잣성을 따라 걷는 사이 어느새 중간 지점까지 다다랐다. 작은 공터에 원형이나 원뿔 형태로 쌓인 방사탑들이 세워져 있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공터 모형대로 하늘이 둥글게 보인다. 숲길을 걷기 시작한 후로 오랜만에 보는 온전한 하늘이다. 

이곳을 기점으로 탐방로는 이제 남쪽으로 방향을 튼다. 숲 속에서 나침반 없이 정확한 방위를 찾는다는 건 전문가라도 무척 어려운 일이다. 숲길은 곳곳에 안내 표지가 잘 되어 있어 굳이 방위를 찾을 필요가 없지만 만약의 경우가 발생한다면 서중천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 된다. 제주에서 긴 하천 가운데 하나인 서중천은 남원읍을 거쳐 태흥리 바다까지 흘러간다. 


낮은 관목나무 사이를 지나가는 길은 미지의 세계로 이어진 통로 같다. 바닥은 이끼와 낙엽들로 뒤덮여 있고, 빼빼하게 마른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살랑대며 잎사귀를 흔들어댄다. 마법의 숲도 아닐 진데 앞서 가던 일행이 나무 사이에 가려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오지 탐험대에 합류한 마음이 되어 울창한 숲 속을 정신없이 헤집고 가다 숨도 돌릴 겸 잠시 계곡 옆 샛길로 들어섰다. 헌데 계곡을 가득 메운 건 맑은 물이 아니라 거대한 암반들이었다. 거인이 힘껏 내던진 것처럼 이리저리 쪼개지거나 덩어리진 채 기묘한 형태로 자리한 바위들이 무척이나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태곳적 제주가 이런 모습이었을까. 어느 솜씨 있는 작가의 손길이 빚어낸 예술 작품 같다. 제주도는 비가 와야 물길이 생기는 마른 계곡이 대부분인데 서중천 계곡은 군데군데 물웅덩이를 이루고 있어 한층 싱그러운 느낌이다. 

트레킹 후에 카페 머체왓에서 쉬어가보자.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트레킹 후에 카페 머체왓에서 쉬어가보자.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하늘에서 내려다 본 머체왓숲길. 사방에 녹음이 가득하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하늘에서 내려다 본 머체왓숲길. 사방에 녹음이 가득하다.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숲 터널에선 콧노래가 절로 나오네
다시 임도를 건너 내려가면 푸른 녹음을 따라 좁은 오솔길 같은 탐방로가 끝없이 이어진다. 약 500m 남짓한 서중천 숲 터널은 호젓한 분위기를 만끽하며 걷기 좋다. 아무도 없는 숲길을 홀로 걷다 보면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온다. 흥얼거리는 리듬에 맞춰 발걸음도 따라서 경쾌해진다. 자박자박 걷는 발자욱마다 즐거움이 넘쳐난다. 

어느 정도 숲길을 내려오면 숲 유치원이라는 푯말과 함께 작은 공터가 나타난다. 여느 때라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을 테지만 코로나 시국에 이곳도 당분간 멈춤 상태다. 하루 빨리 자연 속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아무도 없는 텅 빈 공터에 간절한 마음을 담아 놓고 돌아섰다.

걷기, 쉬기, 사색에 잠기기, 멍하니 바라보기, 콧노래 흥얼거리기…. 머체왓숲길에서 몇 시간 만에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 혼자 걸어도, 함께 걸어도 좋은 마법의 숲. 머체왓숲길을 다시 찾아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1년간의 휴식년제가 풀리는 날, 나는 다시 이 숲 속에 서 있을 것이다. 

INFO 머체왓숲길 방문객지원센터
매주 월요일 휴무
주소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서성로 755
문의 064-805-3113

족욕과 약차를 즐기는 카페 머체왓.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TIP 족욕과 약차가 있는 카페 머체왓
숲을 탐방한 후에는 족욕과 차 한 잔으로 피로를 풀어보자. 숲길 입구에 마을 주민들이 운영하는 카페 머체왓이 있다. 따끈한 물에 천연 족욕제를 넣고 발을 담그면 피로가 금세 가신다. 여기에 약차나 효소차를 곁들이면 금상첨화다. 숲에서 캐온 약초들을 섞어 만든 차는 맛도 좋고 몸에도 좋다.

머체왓숲에는 꾸지뽕나무를 비롯해 황칠나무, 감초, 계피 등 약재로 쓰이는 나무와 풀이 많이 자란다. 넓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초록빛 풍경은 이곳을 찾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작은 선물이다.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조용하고 여유로운 힐링 시간을 누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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