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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제주 오름과 숲] 걷고 또 걸어도 신비로운 숲, 그 속에 빠지다 제주 평대리 비자나무숲&돝오름
[제주 오름과 숲] 걷고 또 걸어도 신비로운 숲, 그 속에 빠지다 제주 평대리 비자나무숲&돝오름
  • 정은주 여행작가
  • 승인 2022.02.09 10: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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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천 그루의 비자나무들이 자라는 '비자림'
오묘하고 신비한 숲길을 따라 완벽한 '힐링'
드넓은 비자나무숲이 내려다보이는 돝오름
톹오름에서 내려다본 전경. 사진/김도형 사진작가

[여행스케치=제주] 제주도 북동쪽에는 수 천 그루의 비자나무들이 자라는 희귀한 숲이 있다. 오래된 비자나무 고목들이 군락을 이룬 제주 평대리 비자나무숲은 단일 숲으로는 세계적인 규모를 자랑한다. 사시사철 푸른빛인 숲은 언제 찾아도 신비하고 오묘한 분위기가 흐른다. 

흔히 ‘비자림’이라 불리는 제주 평대리 비자나무숲은 수백 년 간 비자나무들이 스스로 숲을 형성한 보기 드문 사례다. 약 45만㎡ 면적에 2,800여 그루의 비자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1993년에 숲이 지닌 학술적인 가치와 아름다운 경관을 인정받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비자림은 인근 평대리나 송당리 마을에서 멀지 않아 이른 시간부터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진다. 매일 아침 가장 먼저 숲길에 발을 딛는 이들은 마을 주민들이다. 숲을 한 바퀴 돌아보는 탐방로가 잘 꾸며져 있어 관광객들도 아침 산책 코스로 많이 이용한다. 상쾌하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자박자박 숲길을 걷다 보면 하루를 여는 발걸음이 가볍고 즐거워진다. 자연이 스스로 돌보고 가꾼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비자나무숲을 보면서 다시 깨닫게 된다.

괴상한 형태로 자라난 나무들이 오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사진/ 김도형 사진작가
바위를 움켜 쥔 채 자란 나무들. 사진/ 김도형 사진작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되어 볼까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비자림은 넓은 주차장과 화장실, 편의점, 카페 등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무엇보다 탐방길이 걷기 편해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 없이 숲을 만끽할 수 있다. 나무들이 우거진 숲길이지만 바닥이 고른 덕분에 아이들이나 유모차 통행도 가능하다. 그래서인지 3대를 이룬 가족 여행객들도 많은 편이다. 

주차장에서 숲길까지 임도와 같은 편편한 포장길이 약 5분 정도 이어진다. 철따라 철쭉과 수국, 배롱나무 등이 반갑게 여행자들을 맞는다. 중간 즈음 걷다 보면 벼락 맞은 비자나무 푯말이 나타난다. 나무가 반쯤 고사된 상태이지만 여전히 무성하게 잎을 피워내며 굳건히 자라고 있다. 어려운 상황을 이겨낸 자연의 강인한 생명력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숲길 입구에 다다르면 커다란 돌하르방이 말없는 환영 인사를 건넨다. 비자림은 숲을 한 바퀴 둘러보는 원형 코스로 이루어져 있는데 어느 쪽부터 탐방해도 상관없다. 보통은 돌하르방 건너편 ‘천년의 숲’이정표가 세워진 오솔길부터 시작한다. 탐방 시간은 넉넉히 잡아도 1시간~1시간 30분 정도면 충분하다. 숲길에 발을 들이는 순간 숨 죽어 있던 오감이 푸르르 살아나는 난다. 새가 지저귀고 바람이 한들거리는 숲길을 걷다 보면 어디선가 나무의 정령이 나타나 말을 걸어올 것만 같다. 기이한 형상으로 자라난 나무들 사이로 오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책 속으로 빨려 들어간 듯 이곳에서는 누구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 된다.  

비자림이라 쓰인 기념석. 사진/ 김도형 사진작가

‘아바타’부터반지의 제왕까지 오묘하고 신비한 숲길을 따라

숲을 가장 먼저 느끼는 건 청각이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삭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바닥이 온통 붉은 화산송이로 가득한 비자림은 화려한 시상식장에 깔린 레드 카펫을 연상시킨다. 화산이 폭발하면서 생성된 분출물인 화산송이는 제주도 전역에 퍼져 있지만 비자림처럼 숲 전체를 뒤덮고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한 발씩 뗄 때마다 바삭거리는 소리가 새들의 노랫소리와 어우러지며 독특한 하모니를 들려준다. 

숲에는 수령이 보통 500~800년에 달하는 오래된 비자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나무를 뒤덮은 푹신한 이끼와 줄기를 타고 올라간 굵은 덩굴들이 태곳적 원시림을 떠올리게 한다. 누구는 이곳을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신비한 숲 같다고 하고, ‘반지의 제왕’처럼 요정과 정령들이 살고 있는 숲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긴 세월을 한 공간에서 함께 자라야 했던 나무들은 함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법을 터득한 것 같다. 나뭇가지들이 서로 겹치지 않게 이리저리 방향을 틀어 자라다 보니 이처럼 괴상하고 특이한 형태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햇빛을 고루 받기 위한 나무들의 생존 방식이 지금과 같은 독특한 경관의 숲을 만들어 낸 듯하다.

비자림은 지형적인 특징도 눈길을 끈다. 제주만의 생태 환경인 곶자왈의 형태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바위틈바구니에서 뿌리를 내린 나무들과 바위 틈새로 일정한 온도의 바람이 새어 나오는 숨골은 비자나무숲을 더욱 신비롭게 만든다. 숲에는 나무들만 사는 것이 아니다. 봄철에는 짝짓기에 나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노래처럼 귓가를 간질이며 운이 좋으면 숲 사이를 뛰어다니는 노루도 만날 수 있다. 어디선가 ‘딱딱딱’하는 소리가 들린다면 오색딱따구리가 근처에 있다는 신호다. 

비자림에 자라고 있는 연리목. 사진/ 김도형 사진작가
오랫동안 한자리를 지켜온 비자나무들. 사진/ 김도형 사진작가

비자림의 터줏대감 새천년 나무와 사랑의 상징인 연리목

탐방로 끝자락에는 고려 명종 때 식재되었다는 새천년 나무가 서 있다. 밀레니엄 시대를 맞는 2000년도에 무사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숲에서 가장 오래되고 건강한 기운이 깃든 나무에 새천년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새천년 나무는 비자림에서 최고령에 속하는 터주대감 같은 고목이지만 우람한 나무 기둥과 사방으로 뻗어 난 풍성한 가지들이 여전히 푸르른 기운을 발산한다. 사람에 비유하면 아직도 청년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힘찬 에너지가 흘러넘친다. 

새천년 나무와 반대편에 있는 연리목은 연인들을 위한 연가 같은 나무다. 가까이 있던 두 나무가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줄기가 맞닿아 자라게 된 것을 연리목이라 하는데 애틋한 연인들의 마음을 닮았다고 해서 사랑나무로 불리기도 한다. 뿌리가 하나로 합쳐지는 경우는 연리근, 가지가 이어져 한 그루로 자라는 것은 연리지라고 부른다. 비자림의 연리목은 두 그루의 나무 줄기가 하나로 단단하게 얽힌 모습이 더없이 믿음직스럽게 보인다. 아름다운 사랑의 환희보다는 갖은 고난에도 묵묵히 지켜온 굳건한 약속처럼 느껴지는 나무다. 

새천년 나무와 연리목을 뒤로하고 나오는 길. 비자림은 한 번 다녀간 이라면 언젠가 다시 꼭 찾고 싶을 만큼 완벽한 힐링 시간을 선사한다. 혼자여도 외롭지 않고 누군가와 동행해도 결코 부담스럽지 않다. 오랜 세월 품어온 맑고 청아한 기운을 아낌없이 나눠주는 숲을 나서며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본다. 시간이 흐르고, 또 세월이 지나도 항상 변함없는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어주기를. 

돝오름 둘레길을 걷는 탐방객. 사진/ 김도형 사진작가
오름 아래 펼쳐진 푸른 들녘. 사진/ 김도형 사진작가

돝오름에서 내려다보는 비자나무숲

비자나무숲 뒤편에는 풍만한 산체를 이룬 돝오름이 있다. 돝오름은 오름 형태가 돼지가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돝오름과 비슷하게 발음되는 돗오름, 돛오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돝오름에 오르면 너른 숲이 한눈에 잡힌다. 비자림에서 차로 5분 정도 거리에 위치해 함께 둘러보기 좋다. 송당리 마을로 이어진 도로에서 비포장된 샛길에 들어서면 오름 아래 조성된 주차장에 닿는다. 

돝오름은 높이가 129m 정도이지만 정상에 오르면 비자림은 물론 다랑쉬오름과 손지오름, 높은오름 등 시원한 전경이 펼쳐진다. 산 중턱까지 경사가 급한 구간이 이어져 숨이 조금 차오르지만 수고로움에 대한 보상이 충분히 주어진다. 조금만 힘을 내면 생각한 것보다 더 근사한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다. 탐방로를 따라 오르는 동안 무성하게 자라난 억새풀과 미나리아재비, 제비꽃 같은 야생화들이 눈을 즐겁게 해 준다. 분화구가 넓은 편이어서 둘레를 돌아 정상에 오르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린다.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오름이 펼쳐내는 전경을 천천히 음미해보자. 부드럽게 흐르는 바람결에 이른 봄의 향기가 스치듯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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