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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동호회 탐방] 예술 하나에 사랑과 추억 정이 쌓여 하얀 밤을 지세웠다, cyword '우체국계단'
[동호회 탐방] 예술 하나에 사랑과 추억 정이 쌓여 하얀 밤을 지세웠다, cyword '우체국계단'
  • 김정민 기자
  • 승인 2004.11.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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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호회 '우체국계단'
디지털시대를 살아가는 세대에 아날로그 방식의 정겨운 소통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만든 동호회.
문학, 미술, 여행을 테마로 정기 모임을 갖는다.
[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부산 비엔날레 전시장 모습. 2004년 11월. 사진 / 김정민 기자
부산 비엔날레 전시장 모습. 2004년 11월. 사진 / 김정민 기자

[여행스케치=부산] 여행을 떠날 때는 국내든 해외든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항상 찾게 된다. 예술품 관한 지식이나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한번쯤 들르게 되는 묘한 매력. 여행과 예술의 상관관계? 먼 것 같으면서도 가까운 그들의 공식을 풀어본다.

구수하고 아담한 ‘우체국계단’
이번 행선지는 부산이다. 부산 비엔날레를 보러가는 동호회가 있었다. 여행이 꼭 배낭 메고 시원한 풍경을 봐야하는 것은 아니니까. 색다르다면 색다를 수 있겠고 새롭다면 새로운 여행. 바쁜 일상 때문에 잊고 살았던 문화를 누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동호회 이름은 ‘우체국 계단’. ‘우체국’하면 왠지 글이 생각나는데 ‘계단’까지 붙이니 아담하면서도 세월의 이끼가 낀 시골 우체국 앞의 빨간 우체통이 그려진다. 동호회는 싸이월드 클럽 중에서도 상위랭킹을 달린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여행과 함께 문화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끈적한 정을 조미료 삼아 알콩달콩 인연을 엮어가는 맛도 색달랐다. 그래서 그런가? 게시판에 쓰는 글귀나 읽는 문학 작품, 예술품을 보는 시각도 색달라 보인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토요일 오후. 모임장소인 부산 시립미술관으로 향했다. 어떤 사람들일까? 예술을 너무 몰라 창피해지는 건 아닐까? 긴장 반 기대 반으로 달려간 곳에는 벌써부터 모인 회원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수많은 회원들과 주옥같은 이야기들이 엮인 곳이지만 정모는 이제 겨우 5번째. 줄곧 서울의 화랑과 뮤지컬을 보는 정모를 가졌다가 어딘가 훌쩍 떠나는 여행을 하게된 것은 두 번째라는 이야기를 한다. 바로 전 달에는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의 문화유적을 돌아보고 왔다는 이야기와 함께.

터키 작가의 작품. 꼬치 위에 놓인 초상화는 터키에서 망명한 자들이다. 2004년 11월. 사진 / 김정민 기자
터키 작가의 작품. 꼬치 위에 놓인 초상화는 터키에서 망명한 자들이다. 2004년 11월. 사진 / 김정민 기자

부산 비엔날레와의 교감
지하부터 시작해서 3층까지 전시되어 있는 작품들을 훑기로 했다. 본인이 관람하고 싶은 동선대로 마음껏 관람하기. 작품들을 하나하나 보고 있노라니 회원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난감했다. 누군가 작품을 설명 해주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보는 것도 느끼는 것도 자유. 정해진 규정은 없으므로 자유롭게 즐기라는 말이었나?

그런데 클럽장인 혜영씨가 이것을 놓칠 리 있겠는가. 갸우뚱하는 그림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설명해주고, 미처 보지 않고 지나가는 그림은 좀 더 살펴보라고 지적을 해준다. 그러더니 갑자기 어떤 사진에 다가가며 빙긋이 웃었다. 아프리카 인들이 포즈를 취하고 찍은 사진이었는데 마네의 그림을 패러디 한 것이라며 어떤 그림인지 알겠느냐며 물었다.

자신이 느끼는 그대로 작품을 감상하는 회원. 2004년 11월. 사진 / 김정민 기자
자신이 느끼는 그대로 작품을 감상하는 회원. 2004년 11월. 사진 / 김정민 기자

고개를 흔들자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와 ‘올랭피아’를 패러디 한 것이라는 귀띔을 해주었다. 마음속에서 흘러나오는 존경심. 돌아가면 꼭 한번 마네의 작품집과 비교해 보리라 다짐했다. 그런가 하면 화가 안창홍 씨의 작품 ‘굳세어라 금순아’를 보면서 느낌이 어떠냐고 묻기도 했다.

작가가 우연한 기회에 문을 닫는 동네사진관에서 수백 장의 증명사진 필름을 입수했는데 사진에 눈을 감기고 표면에 상처를 입혀 빛바랜 사진들을 표현해 냈다. 70, 80년대의 우리네 언니, 오빠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정겨운 사진.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떠오른다. 꽉 짜인 밧줄 틈을 파고드는 한 가닥의 여유. 마음속에서 들리는 고요한 외침. 드디어 나도 문화시민이 되는 거야.

해운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회원들. 2004년 11월. 사진 / 이민학 기자
해운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회원들. 2004년 11월. 사진 / 이민학 기자

해운대에 아로새긴 그 날 밤의 추억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바다는 마음을 비우는 시원함을 안겨다 준다. 끈적끈적한 바닷바람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바닷가를 배회하는 회원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측은하다.

토요일부터 모이는지라 비교적 시간적인 여유들이 있는가 보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한 달에 몇 번 없는 쉬는 날을 아껴두었다가 나온 사람, 어제 밤늦게까지 작업을 하고 헐레벌떡 뛰어나온 사람. 그나마 이 모임에 나오는 것으로 삶의 양식을 쌓는다는 이야기를 몇 번이고 되뇌이곤 한다.

예술작품보고 술 마시는 거 아니에요? 기자의 얌통머리 없는 말에 사람들은 그제서야 ‘우체국계단’의 위력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우체국계단’은 문화를 곱씹는다. 뮤지컬을 보면 뮤지컬 등장 배우들과 뒷풀이를 가지면서 밤새 뮤지컬과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전시회를 관람하면 작품의 작가와 자리를 함께 함으로써 작품을 관람하며 느꼈던 무채색의 느낌들에게 색을 입히는 작업을 한다.

그러니 한 번의 모임이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만은 분명한 일이다. 부산 비엔날레는 워낙 큰 행사라서 한번쯤 보아두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는 그들. 그런 모임답게 뒷풀이 장소조차도 예술작품이 그득하게 걸린 까페를 찾았다. 그림을 구경할 사람들은 구경하고 이야기해 취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시간이 흘렀다.

거제도의 멋지남 김형석씨의 후배(서양화가)가 경영하는 카페 더 클래식. 2004년 11월. 사진 / 이민학 기자
거제도의 멋지남 김형석씨의 후배(서양화가)가 경영하는 카페 더 클래식. 2004년 11월. 사진 / 이민학 기자

누군가는 도자기의 문양을 그리고 있고, 누구는 거제도까지 내려가 문화예술회관에서 열심히 예술기획을 펼치고 있고, 누구는 로맨스 소설 작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고. 누구는 연극을 하기위해 전국을 돌며 일주를 하는 중이며, 또 누군가는 작은 출판사를 경영하면서 자신이 내고 싶은 번역서를 언젠가는 꼭 내보겠다는 소망을 품고 있기도 하다.

백 인이면 백 개의 개성들이 어우러져 또 하나의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이제 막 자신의 자리를 찾아 한 계단씩 차곡차곡 오르는 이도 있었고 이제 막 세상 속으로 한발 내딛는 이도 있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가며 지새우는 밤. 부산 시립미술관에서 보았던 인상 깊은 작품도,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며 마셨던 한 잔의 소주도, 한밤중에 해운대 밤바다에 쏘아올린 한 줌의 불꽃도 오늘을 살기 위한 상큼한 윤활유가 되었으리라.

나와 닮은 감성코드를 가진 사람들. 애인조차 알지 못할 감성의 조각들이 하나둘씩 그림맞추기를 하는 시간.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이 세상을 살아가는 맛이 나는 것 아닐까? 갑자기 그 날 저녁 누군가가 흥얼거리면서 치던 피아노 연주 ‘just ones’가 귓가에 맴돈다.  

부산 비엔날레. 2004년 11월. 사진 / 이민학 기자
부산 비엔날레. 2004년 11월. 사진 / 이민학 기자

Tip. 부산비엔날레
부산 비엔날레는 순수미술, 영상, 사진, 조각 등 수많은 미술세계를 감상할 수 있는 묘미가 있었다. 회화나 조각을 보고 단순히 느껴야 했던 예술에서 탈피해서 작가가 스스로 관람객들과 어울리기 위한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적인 작품이 즐비해서 보는 기쁨에 두 배. 예를 들어 ‘벨이 울리면 전화를 받으시요’라는 작품이 있다면 벨이 울렸을 때 그 작품을 만든 작가가 관람객들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작품에 대해 관람객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

수 십 가지의 티가 나열된 일본작가의 작품, ‘당신을 위한 천 잔의 작품’에서부터, 비틀리고 경사진 가구에 앉거나 걸으면서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대지 밖’, 작가에 의해서 신체의 특정부위를 형상화 한 캔들의 집합소 ‘만족감 보장’, 화려하면서도 붉은 꽃을 그린 것 같지만 실상은 부패한 생선들이 화폭에 가득했던 ‘저 바다에 누워’ 등 작가의 개성이 두드러지는 작품도 많다. 색다른 분위기를 느끼고 싶을 때 가볼만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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